156회
33. 공작님과 시온 리벨론 (2)
시계를 안 봐서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역시, 누구처럼 시간 단위를 훌쩍 넘기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좀···, 크흠. 후련해지기는 했네요."
"그거 봐라."
세르펜스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디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와서, 그거에 꽂혀서 여기저기 권하고 돌아다니는 모양새다.
'맛있지? 그치?'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것 같은 행동에 왠지 웃음이 다 나왔다.
"와! 그런데 이렇게 울기까지 했는데, 시온이 아니라면 진짜 허무하겠다. 그쵸?"
"시답잖은 소린 그만하고···."
눈가에 세르펜스의 손가락이 살짝 스치고 지나가니, 무겁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이 가뿐해졌다.
한바탕 울고 털어낸 덕분인지 머릿속도 맑고 산뜻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카타르시스 어쩌고 하면서 슬픈 영화를 찾아보나?'
영화 하니까 생각난 건데, 취미를 구할 때 왜 이것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 세계에 영화는 당연히 없지만, 오페라와 연극 따위는 존재하였다.
세르펜스에게 다양한 감정을 간접 경험시켜줄 수 있으면서, 남이 보기에도 퍽 고상한 취미 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악마 숭배자들이 판치면서 문화생활들이 끝장나기 전에, 여유가 생기는 대로···.
"선우? 뭔가 지금 상황과 전혀 무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핫! 어떻게 아셨죠?!"
화들짝 놀라며 정답을 맞혔음을 알리자, 세르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가끔 선우가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이, 이 세계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이거나 현실 도피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아뇨. 그냥 제 원래 성격이 이런 건데요?"
"···그, 그래. 그렇다는 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는 뜻이니 참으로 다행···. 그래, 다행이다."
말은 마침표로 끝맺음 했지만, 어쩐지 ‘다행인 건가?’하는 의문형처럼 들려왔다.
"말이라도 긍정적인 게, 보기 좋습니다!"
"아까는 당장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처럼 굴어놓고, 지금은 왜 자꾸 딴 길로 새는 걸까?"
"세르펜스 말이 맞았습니다. 제가 너무 불안해서 조급했어요. 어쨌거나 이 밤이 다 가기 전에만 얘기를 끝내면 되는 것을! 중요한 문제일수록 더 느긋하게 고민하고 대화해야 하는 건데!"
"···마음의 안정을 찾으신 것 같아 기쁩니다."
하하 웃으면서 해맑게 말하니, 세르펜스가 머리에 꽃 단 놈 보듯 했다. 그걸로도 부족해 존대까지 썼으니.
이제 됐으니까 본론이나 말하라는 간접 표현이다.
"비비가 시온이라는 가정하에,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세르펜스를 대하는 태도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지. 익숙···하기도 하고."
그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의식중,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몸을 움츠리며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듯 붙잡는 모습이 보인다.
시선도 아래로 내리깔렸다.
'꺼리고 두려워하며 외면하는 그 반응이? 그딴 게 왜 익숙한 건데?'
어렸을 적, 주변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거절당하고 외면받아야 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외면한다는 건 같았지만, 그 기반에 깔린 감정이 다르다.
그 화제에 대해 세르펜스가 보였던 반응도 지금과 다르다.
"누가 그랬어요?"
그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세르펜스는 절로 도끼눈이 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작은 심호흡을 내쉬며 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손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 진한 옷 주름이 남았다.
"어···, 으음."
세르펜스가 몇 번이고 '어'라는 어절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결국은 '전 프라시더스 공작부인'이라는 메마른 표현을 골라 내뱉었다.
"유모는 없었던 거로 아는데, 직접 수유를 할 정도면 최소한의 인정이라도 있었던 거 아닙니까?"
"으음···. 명확하게 밝혀지거나 학설로 정립된 것은 아니나, 제국에서는 젖을 물리는 자의 신성력이 아기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일종의 미신 같은 것이 있다."
전 프라시더스 공작은 세르펜스를 성검의 주인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던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신성력을 더 늘릴 수만 있다면, 불확실한 방법일지라도 닥치는 대로 수용했다는 건가.
'그렇다 해도 세르펜스를 두려워 할 이유는···, 아.'
그녀는 본디 신관이 되고자 했다.
원치 않았으나 대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하였다. 급하게 결혼을 했고 임신과 출산 또한 마찬가지.
모든 것이 그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울증이 왔대도 이상할 것 하나 없고, 자신을 다독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상태는 갈수록 악화하였겠지.
'산후 우울증···. 어쩌면 산후 정신병까지 갔을지도 모르겠네.'
전 공작 부부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서로에게 어떠한 배려나 관심, 사랑 같은 건 없었다.
책임만을 강요하는 관계.
그것은 어린아이였던 세르펜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전 프라시더스 공작이 세르펜스를 대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했으려나?'
그놈의 성검이 뭐라고. 성검의 주인이 뭐길래, 이다지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걸까.
'아니지. 애초에 성검이 내려온 이유가 뭔데?'
악마 숭배자고, 나발통이고, 그냥 이 세상에서 영원히 꺼져줬으면.
그렇게 악마가 좋다면 그들과 손 붙잡고 마계에서 하하 호호 살 것이지, 왜 싫다는 대륙 사람들에게 자꾸 악마를 권하는지 모르겠다.
악마가 스팸 메시지야, 뭐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애초에 내가 두려웠다면 보좌관으로 지원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렇죠."
"그렇게나 무서워하고 끔찍하게 여길 정도라면···. 환생한 것이 '나에게 살해당한' 시온 리벨론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맞는가?"
내 주의를 바깥에서 안으로 돌리기 위해서 모르면서도 아는 척 말한 것이 아닐까, 약간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는데.
'정말 알고서도 그랬구나.'
비비가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피하려 해도, 잠시 스쳐 지나가며 눈이 마주친 순간이 있었을 거다.
제삼자의 시선으로는 눈치챌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었겠지.
본인의 일이니만큼.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는 만큼. 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겠지.
"그자가 '시온 리벨론'이 아닐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가령 예를 들어, 신의 사자라거나 해서 나의 추악한 본성을 알고···. 아니다. 그런 거라면 선우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세르펜스의 본성이 뭐 어쨌다고요?!"
"···아!"
세르펜스가 오이 보고 놀란 고양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이미 늦었다, 이놈아!"
"서, 선우···! 미,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내가 진짜 못살아! 자식새끼 키워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더니!"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추악이란 단어야말로 그런 데에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
괜히 따지고 들었다가 손해만 봤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꼬리를 사렸다.
혼날 땐 조용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배운 듯하다.
"···잘못했습니다."
"말로만?"
"으, 으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나오는 걸 보니 갈 길이 멀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선우-···."
세르펜스가 내 이름의 마지막 자를 질질 끌며 나를 불렀다.
귀를 축 늘어뜨린 시무룩한 고양이상을 해가지고,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무척이나 안쓰럽다.
이렇게 유순한 녀석이 세상에 또 어딨다고, 그런 몹쓸 사상을 세뇌해 놨는지.
"···다신 그런 말 안 쓸 거죠?"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
"옳지, 옳지."
마음이 진정 되고 나니, 과연 25세 성인 남성을 이렇게 취급하여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별 상관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세르펜스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닌 것 같으나, 일단 본인이 맞는지 물어보고 가정이 맞는다면···. 설득해 봐야지."
두 살배기도 아닌 2개월도 안 지난 갓난아기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한다니.
확실히 누가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그래도 살인 멸구 같은 소리는 안 하네.'
장족의 발전이다.
"문제는 어떻게 비비를 따로 떼어놓느냐, 그건데···."
"그거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무능하다 한탄했지만, 역시 만능펜스는 어디 가지 않았다.
"어떻게요?"
"조금 전에 신성력 폭주가 있지 않았나. 그것을 빌미 삼아 적당히 겁을 주면서 자세히 살펴본다 하면···."
"네?! 그게 폭주였어요?"
"그럼 뭔 줄 알았나?"
내가 화들짝 놀라자, 세르펜스는 되려 이상한 소릴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폭주지, 달리 폭주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성력은 안정된 힘이라, 폭주가 흔한 일이 아니긴 하다. 다른 힘과는 다르게, 내가 했던 것처럼 외부의 도움으로 쉽게 안정시킬 수도 있고."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그 힘이 폭주하고,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다.
'그런 내용이 [성검의 주인]에서는 나오지 않아서, 신성력은 그런 거 없는 줄 알았지.'
휴마누스 이 녀석, 멘탈 하나는 튼튼했구나.
그러고 보면 거시기, 그 뭐냐. 거 선택의 날에 그거. 그걸 생각하면 나보다 더한 멘탈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서나,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일이지."
···요즘 주인공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이러다 나도 주인공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보통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있기 마련이라 문제가 없고, 유전과 상관없는 발현의 경우 그 힘이 미약하여 상관이 없으나···."
"비비의 경우는 다르다, 이거죠?"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다 하니까 하는 말인데, 비비 안에 들어 있는 건 성인 아닙니까?"
"신성력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그것을 억지로 끌어다 쓴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아이보다 폭주하기 쉬울지도 모르겠군."
어떤 느낌인지 대강 감이 잡혔다.
예를 들어 졸음이 왔을 때.
잠깐 버티다가 자연적으로 스르르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비비는 내일 쓸 체력을 오늘 다 쓴다는 특제 드링크를 마시고 억지로 버티다가 장렬하게 고꾸라지듯 잠에 빠진 느낌이다.
"지극히 떨어지는 효율로 목적을 이루고자, 제 통제력을 넘긴 힘을 끌어다 써댔으니 폭주할 만도 하지."
"고작 머리채 휘어잡는데 그렇게까지 합니까?"
"사용된 신성력의 양만 놓고 본다면···."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세르펜스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에는 시온의 올리브색 머리카락이 자리하고 있을 테고, 그 의미는···.
"말이 씨가 되는 법이 있어요.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 거 아닙니다."
"그래."
이제까지 시온의 몸에 신성력이 없다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으나, 오늘만큼은 다행이라 이루 말할 데가 없다.
그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면 지금쯤···.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지 간에, 신성력이 낭비되었다는 증거로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지 않았나."
온전히 운동 에너지로 쓰였어야 할 신성력이 빛 에너지로 소모되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원래 신성력을 사용하면 빛 뿜뿜 하잖아요?"
"외부적으로 작용할 때나 그렇지, 내가 언제 신체를 강화할 때도 그러는 거 봤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신성력으로 신체 강화를 한 상태인지 안 한 상태인지 내가 구분할 길이 없다.
그런 거 안 써도 나 정도는 한쪽 팔로 들고 뛰지 않아?
"언제 쓰셨는데요?"
"설마 인간의 순수한 육체적 힘으로 성벽을 한달음에 뛰어넘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
판타지 세계 초인들의 온전한 신체 능력의 한계와 강화된 능력 사이의 전환점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게 뭐람.
"한데,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지금 하시는 겁니까? 아까 그 자리에서 알렸어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말하자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딴 이유로 애가 폭주해서 녹다운되었는데 입 다물고 있었다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세르펜스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어왔다.
"할 얘기가 있으니, 둘이서 빠지자는 신호를 보낸 것은 선우였잖은가."
뭐가 되었건, 오늘 내로만 얘기를 끝내면 된다고 말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