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회
33. 공작님과 시온 리벨론 (3)
시온의 육체에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방에 도착했다.
"왜 또 빛이야?"
오늘만큼 빛이 지긋지긋해진 날은 또 없을 거다.
방문 아래의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에 긴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그림자 같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온이 찻잔 등을 치우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십···."
평소대로 존댓말을 쓰려다 이곳이 리벨론 령임을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큰 형이라면 기다리다 지쳐 이제 막 방으로 돌아간 참입니다."
"지금 시각이 몇 신데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형을 피하려고 일부러 늦게 오신 것 아닙니까?"
말하는 것을 보니, 제온은 카론이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듣고 중간에서 조율해 주러 왔는가 보다.
"피곤해서 쉰다고 했는데···."
"팔팔하다며 공작님을 데려가셨잖습니까."
이놈의 입이 방정이네.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은 아니나, 대화가 조금만 짧았어도 방 안에서 카론을 마주칠 뻔했다.
"그런데···."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던 제온이 쟁반 위에 서둘러 다기들을 옮기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서 약간 걱정의 빛이 스친 것도 같으나.
아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시온의 몸을 걱정한 것일 테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럼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제온이 사무적인 인사를 건네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저기!"
"네."
"어, 어으음···."
"···말씀하십시오."
급히 할 말이 있다는 듯 불러세워 놓고 어물어물하고 있으니, 제온이 재촉하듯 말했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제온을 불러 세운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비비가 시온일 가능성에 대해 말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
그러나 이내,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말해도 되는지. 확실해졌다 하더라도 시온이 그것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등등.
여러 생각이 엇갈리며 말문을 막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온 탓일까?
내가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장난이라도 친 거라 여긴 건지, 제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할 말이 없으시다니,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제온은 내 대답조차 듣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비어 버린 방에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씻고 잘까, 자고 씻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세르펜스에게 판타지적인 고뇌를 털어놓고, 판타지스러운 문제를 상의하다 왔는데.
이곳도 현실이라고 외치듯이, 갑자기 현실적인 고민이 덮쳐왔다.
밤도 늦었으니 간단히 세안만 하고 일어나서 샤워하자는 결론을 내고 욕실로 향했다.
"아놔, 진짜. 세르펜스, 와···."
문득 바라본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황당을 금할 길이 없었다.
부어오른 눈가를 치료해주기만 하면 다냐고 속으로 따지면서 얼굴에 허옇게 눌어붙은 눈물 자국을 씻어냈다.
'방을 나서기 전이라도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니야!'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작된 간단한 티타임에, 세르펜스는 나와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비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타이밍 좋게도 비비는 식사시간 내내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며 칭얼거리다가, 결국 잠이 든 상태였다.
"막내 공자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아주 건강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보아도 걱정스럽다는 그의 표정에 백작 부인이 안도 섞인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시온이는 좀 어떠니?"
"네? 저도 괜찮습니다. 공작님께서 신성력을 써주신 덕택에···."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별로 신경 써주지 못해서, 엄마가 미안해."
"아뇨, 막내는 아직 어리니까 당연히 막내부터 챙겨야죠."
내 대답에 백작 부인이 기특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리벨론 백작도 흐뭇해하는 눈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비비가 시온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있었던 일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다시 세르펜스가 입을 열자, 리벨론 부부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그에게로 향했다.
"어제의 사건은 신성력이 폭주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호, 혹시 크게 잘못된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성력의 경우 외부의 도움으로 그것을 대신 통제해 줄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제어력만 있다면 쉽게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세르펜스의 차분한 답변에 리벨론 백작이 안심하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그 안심은 곧 의아로 바뀌었고, 그것을 눈치챈 세르펜스는 그가 묻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바로 말씀드렸어야 맞는 건데, 상황이 경황없이 흘러가기도 했고 바로 말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차라리 안정된 후에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이제야 얘기를 꺼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이라뇨! 오히려 그런 부분까지 배려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단축키 2번쯤에 지정된 연기펜스의 송구스럽다는 표정에, 리벨론 백작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외부의 도움이나 본인의 제어력이라 하면···."
리벨론 가문에는 신성력을 보유한 자가 없었고, 2개월도 안 된 아기에게 제어력을 찾는 건 비상식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자제분의 경우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신성력을 다룰 때 본능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그것을 인지하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단지, 가진바 힘이 커서 그것을 전부 통솔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았을 때, 제가 작은 도움을 준다면 오늘 같은 일은 또다시 생기지 않을 겁니다."
"오, 오오-!"
자기 자식이 천재라 가능하다는데. 그리고 그것을 보증해 주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펜스인데.
상식이고 뭐고 알게 뭔가.
'우리 애는 천재다.'
이 말은 하나의 마법 같은 키워드였다.
"핫···! 크흠, 폐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미 후원을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거리낌 없이 부탁하셔도 됩니다."
"그, 그렇게까지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그러잖아도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아, 어찌 갚아야 할지···."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도울 여건이 된다면 돕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프라시더스 공작님께서는···!"
연기펜스가 해사한 그 얼굴로, 단축키 1번에 놓인 자애롭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울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내면 연기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감동의 도가니에 강제로 던져 넣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리벨론 가의 사람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세르펜스는 제온을 의식하여, 감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쓸쓸하고 우수에 찬 눈빛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잠시 자제분과 조용히···. 으음···, 시온 경?"
"넵!"
"제가 도착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아 막내 공자가 경에게 무언가 반응한 것 같으니···. 수고스럽겠지만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나와 세르펜스. 그리고 시온으로 의심되는 비비.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삼자대면 구도를 만들기 위해 미리 짜놓았던 대화였다.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혹시 어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인가요?"
땟찌 사건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리벨론 백작 부인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모르나, 격양된 상태에서 신성력의 제어를 보조하며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익히게 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자리에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요?"
"으음···. 시온 경은 오래 곁에 두었기 때문에 익숙해져서 괜찮으나, 다른 분이 계시면 제가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세르펜스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백작 부인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밤새도록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그 '땟···.' 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된소리가 연속되는 거친 발음에 비비가 흥분한 게 아닐까요?"
논리적으로 전혀 증명할 수 없지만, 얼핏 들으면 상당히 과학적으로 들려오는 의견이었다.
'그런 이론이면, '띠뜨버거 사듀세여, 띠뜨버거 머꾸띠퍼여.'라는 문장에는 아주 경기를 일으키겠네?'
신뢰성이 0%에 수렴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제 생각이 맞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제 품에 안겨 잠들어있는 비비가 깨기라도 할까, 그 단어를 생략하며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온이는 제 아비와 큰형과 닮아서, 비비가 낯설어 할 것 같진 않거든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신 건가요?"
"네?"
"때, 그거···. 하실 수 있나요?"
"······."
진짜 해야 하는 것도 아닐진대,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비비의 양손을 붙잡고 '땟찌, 땟찌!'라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것이 아닐까?
"그건 제가 하면···."
"얘는! 그럼 공작님의 머리카락이 잡힐 거 아니니!"
"···아들 머리는 괜찮고?!"
내 반문에, 그녀가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해한다.
하긴 나 역시 세르펜스의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 중 하나를 바쳐야 한다면, 기꺼이 내 머리카락을 바칠 의향이 있다.
세계가 치러야 하는 비용적인 측면을 생각해 볼 때, 그게 맞다.
만일 세르펜스의 단발과 내 삭발 중에 고르라 하면 상당히 고민하겠지만, 결국에는 삭발을 택하지 않을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동안 마음을 다잡았는지, 세르펜스가 굳게 각오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상상의 단계에서 끝날지라도 머리채 잡히기와 땟찌라 말하기 중 택하라면 역시 후자가 낫다는 판단이 섰나 보다.
치사한 녀석.
"그럼 그가 깨어나는 대로,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해요."
중간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목표하던 그림은 그려졌다.
세르펜스가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의 품에 비비를 안겨주었다.
비비는 그렇게 꺼리던 세르펜스의 손에 자신이 넘어간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잠들어 있다. 의식이 없는 만큼 안락한 승차감을 온전히 느끼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비비를 건네받은 우리는 어제 사건이 있었던 내실로 향했다.
세르펜스는 장소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의견이었지만, 어제와 맞출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맞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리벨론 백작 부부가 기꺼이 그곳을 내주었다.
"하실 건가요? 땟찌."
"···절대 안 할 거다."
혹여라도 비비를 살피는 세르펜스의 집중이 흐트러질까, 내실이 있는 층 전체를 비워 준 리벨론 가 사람들 덕택에 세르펜스가 편하게 말해 왔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 해보시지?"
"싫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몹시나 단호했다. 세상에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