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62화 (162/925)

162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1)

비비의 부탁을 받은 제온의 의견은 빠르게 폐기되었다.

옷이라면 비비가 좀 더 자라고 나면 새로 살 예정이라며 그냥 넘어갔고, 애칭 문제는···.

'나중에 비비가 말을 하게 되어 불만을 표하면 그때 생각해본다나?'

비비는 평범한 아기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뒤에서는 이미 말을 하고 불만도 드러냈으나, 그의 가족들이 그것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비비는 언젠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에 안고, 언젠가 올 그 날을 위해 멋들어진 애칭을 구상하는 듯했다.

'왠지 저러다 흐지부지될 것 같은데···.'

처음부터 싫어하는 기색을 표했을 때, 그 반응이 귀엽다며 비비로 결정되지 않았던가.

말을 하게 된대도 그것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외 리벨론 영지에서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올 때와 달리 카론 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따로 마차를 타고 이웃 영지의 기차역 까지 배웅을 나왔다.

우리는 백작 부인의 품에 안긴, 개나리색 투피스를 입은 비비의 모습을 뒤로하고 수도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아차, 세르펜스에게 카론과 악수해 달라고 말한다는 걸 깜박했네!'

깨닫고 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기차는 역을 떠난 뒤였고, 그렇게 달리고 달려 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작저로 돌아왔다.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서양풍 저택이 어느샌가 익숙하다 못해 내 집처럼 편안해져서, 반갑기까지 하다.

그곳에서 마주한 반가움은 저택뿐만이 아니었다.

"주인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니, 한스 이 양반은 하나도 안 반갑고.

"세르펜스 님, 시온! 오랜만에 뵈어요!"

유지스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유지스도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요. 시온은 별일 없었나요?"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시온의 말은 항상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냥 의미 없이 내뱉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가볍게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항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가끔 하는 말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서 그러시는 게 아닌가 하는데···."

"아하하하-, 시온은 농담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이번 건 정말로 웃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환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짓말 대회에서 '나는 평생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다.'라고 말한 사람을 본 듯한 반응이다.

"그보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것임을 알고 있는 세르펜스가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유지스를 진정시키며 질문했다.

"그럼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가 많긴 한데,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내일 하기로 할까요?"

"마차에서 충분히 쉬어서 괜찮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탓에 제대로 된 손님맞이를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늦었지만, 위리디아님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말이 좋아 손님맞이고 차 대접이지, 결국 다녀왔던 것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다는 얘기였다.

"차보다는 두 분과 함께 마시려고 기념품으로 사 온 술이 있는데, 그건 어떤가요?"

역시 유지스는 뭘 좀 안다.

아르젠토 령까지 혼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세르펜스와는 딴판이다.

'먼 곳에 다녀왔으면 당연히 기념품이 따라붙어야지!'

온갖 클리셰가 범벅되었던 [성검의 주인]답게 이 세계의 드워프들은 술에 환장했다.

그러다 보니 테라룸 왕국을 상징하는 기념품은 자연스레 드워프제(製) 물품과 술이 되었다.

"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세르펜스의 눈길이 한스에게로 향했다.

굳이 세르펜스 행동 분석기를 돌릴 필요도 없다. 술은 유지스가 가져왔으니, 함께 곁들일 안줏거리를 준비하라는 의미다.

한스도 그것을 알아보고, 바로 준비시키겠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 쪽 건물로 향했다.

우리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윈스톤 님도 함께 자리하시면 일루미나티가 다 모이는 건데···."

유지스가 윈스톤만 따돌리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야 최측근으로 언제든 옆에 붙여놔도 이상할 거 없다지만, 윈스톤은 아직도 세르펜스의 호위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세르펜스의 무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그것을 앞지르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신보다 뛰어난 자만 호위 기사로 두란 법은 없었다.

본신의 무력이 뛰어난 프그누토 백작 또한, 자신보다 약해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러운 기사를 호위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명색이 공작인데, 호위 한둘쯤은 있어야 뽀대가 나지!'

이제 윈스톤은 공작가의 기사 단장과 비등한 실력을 갖췄다.

세르펜스의 피셜에 의하면 완성 단계인 단장과 달리 아직 성장할 여지가 남았다고 하니, 공작의 호위 기사라 불러도 남부끄럽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력'이 아닌 '실적'의 문제.

세르펜스의 명을 받고 솔레르티아의 가게를 지킨 것만으로는 약했다.

"아쉽지만 어쩌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일루미나티 간부 모임 정도라 생각합시다!"

"그래야겠네요. 윈스톤 님도 하루빨리 자리를 잡으면 좋으련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와 유지스의 시선이 세르펜스를 향했다.

무언의 압박을 느꼈는지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곧 있을 볼타 산맥 토벌에 참가시킬 예정이었다."

"아, 그거 다행이네요. 대련이 아닌 실전에서의 실력도 증명할 수 있고, 같이 싸우다 보면 공작가의 기사들과 전우애도 좀 쌓일 테고···, 네?! 그거 세르펜스도 참가해야 하는 거잖습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나의 이동식 울타리가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없으면 불안하긴 하는가 보군."

"당연하죠! 제 자신감의 원천은 세르펜스 쉴드니까!"

세르펜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심각한데 지금 웃음이 나오나?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불만을 표하자, 그가 턱짓으로 유지스를 가리켰다.

"한시적으로 유지스 쉴드는 어떠신가요? 저로는 부족하나요?"

그녀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

설마 오늘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유지스를 공작저에 들인 거였나?

"아뇨! 매우 든든합니다!"

"세르펜스 님보다요?"

"가까이 사는 이웃이 먼 곳에 사는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죠."

"시온은 신기한 말을 많이 아시네요!"

유지스가 감탄하면서 내 말이 맞는다고 긍정하였다.

세르펜스는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다. 자신이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한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가는 김에 당신이 전에 말했던 그것도 조사해 볼까 한다."

어째, 멀리 있어도 자신이 더 든든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렸다.

"시온이 말했던 그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악마 숭배 세력이 볼타 산맥의 결계를 해제하여 그 안의 마물들을 세상에 풀어놓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유지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돼요. 그곳의 마물들이 퍼져나간다면 수많은 일반인이 피해를 당할 거예요!"

"최대한 찾아보겠지만···. 정기 토벌의 일정은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자들이 손을 쓴다면 토벌이 끝난 이후일 거라 생각합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아무것도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탓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럴 거면 아까 조사 어쩌고 하는 얘기는 왜 꺼낸건데?’

조금 전 그의 발언에 느꼈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막 태어난 둘째에게 애정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관심을 끌려 하는 첫째를 보는 것만 같다.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평소보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마물들의 수를 최대한 줄여 놓을 생각이다."

"그러다 세르펜스가 잘못되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맞아요, 너무 무리하시진 마세요!"

"···아."

나와 유지스의 걱정하는 말에 세르펜스가 감동했나 보다.

그가 살짝 부끄러워하는 낯으로 머뭇거리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내게는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휘하의 기사들만 무리시키겠다."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세르펜스를 보며, 나와 유지스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생명에 위협이 되는 선까지 몰아붙이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렴요, 알고 말고요."

"네, 그들이 위험해진다면 세르펜스 님께서 어련히 구해주시겠죠···."

그냥 죽기 직전까지 체력을 고갈시키겠다는 소리겠지. 그걸 왜 모르겠는가.

단지 첫 토벌부터 한계를 체험할 윈스톤이 안쓰러워질 뿐.

그래도 세르펜스 옆에서 제 한몫을 톡톡히 해낸다면, 토벌이 끝날 때쯤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않을까 한다.

'세르펜스가 공치사를 해주며, 측근으로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한두 마디쯤 건네면 딱 되겠네!'

개인 호위로서의 데뷔전이라 생각하면 나쁠 것은 없다.

아마도.

- 똑 똑 똑.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안주의 준비가 끝났는가 보다.

매운 기 없이 달곰하게 조리된 미트볼 조림과 다양한 종류의 치즈와 까나페 등이 테이블 위에 차례로 올려졌다.

끝으로 유지스가 사 왔다던 술과 얇게 썬 유자. 그리고 영문 모를 노란 액체가 든 병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시녀들이 물러났다.

"달달한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냥 먹으면 좀 쓸 것 같아서, 자리가 만들어질 때 같이 준비해 달라고 미리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말하며 유지스가 증류주로 보이는 투명한 술을 각자의 잔에 조금씩 나눠 따르고 노란색의 음료를 추가로 따른 후, 얇게 썬 유자까지 빠뜨렸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상큼한 유자의 향기 속에 감춰졌다.

'이거 생각 없이 홀짝거리다간, 그냥 훅 가겠는데?'

세르펜스가 달콤한 향에 이끌려 그것을 살짝 맛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번쩍 뜨이는 모습도.

그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모처럼인데 술기운 몰아내지 말고, 그냥 취해보죠?"

"아직 보고받을 내용이 남았다."

보고라 할만한 게 있던가?

라드라바의 보물만 건네받고 나면 땡일 텐데. 구차한 변명이었다.

"뭐 어때요, 마시자마자 바로 꾀꼬닥 할 것도 아닌데! 전 신성력도 뭣도 암것도 없으니 혼자 취할 텐데 그게 무슨 재밉니까? 게다가 아깝잖아요! 유지스가 이렇게 정성 들여서 준비해왔는데! 유지스도 그렇게 생각하죠? 거봐요, 맞대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맛있잖습니까? 그쵸? 맘에 들었죠? 마음에 들었으면···."

"···아, 알았으니 진정해라."

자고 일어난 직후조차 한 점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세르펜스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오늘 밤을 불태워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유지스가 제조한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오, 이거 진짜 맛있네?!'

술도 술이지만 이 유자 베이스가 장난이 아니다.

화끈한 알코올이 지나고 난 자리를 달짝지근한 단맛이 어루만졌다.

"라드라바의 보물들은 무사히 챙길 수 있었어요. 아공간 주머니가 여러 개 있길래 종류별로 분류해 넣고, 한 군데에 모아서 담아왔어요."

유지스가 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 개수가 총 6개였으니, 저 안에 5개의 주머니가 더 들어있겠지.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가죽보다 좀 더 짙은 갈색으로 복잡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르펜스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자신의 품 안에 넣었던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어 가장 겉에 있던 빈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위리디아님?"

"네, 말씀하세요."

"이번 출장에 쓰인 비용과 저번 투기장 관련 조사에 쓰인 비용에 관해 보고를 올려주시면 바로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계산은 확실히 하는 편이 좋습니다."

내가 준 정보를 통해 유지스가 구해 온 돈으로 세르펜스가 생색을 내었다.

한층 더 어이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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