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63화 (163/925)

163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2)

"다음으로, 페라리우스 가문을 조사하는 아르젠토 가문을 조사하라는 명령 말인데요."

세르펜스가 받아야 할 보고가 더 있다고 말했을 때는 그냥 취하기 싫어서 한 변명인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새 유지스에게 뭔가를 시켜놓았나 보다.

"그런 건 또 언제 시켰대요?"

"잠시라도 악마 숭배자의 일을 거들었던 자와 그를 옹호한 자를 그냥 믿고 일 처리를 맡길 수야 없지 않은가. 출발하기 전, 집사에게 봉함한 서류를 맡겨 놨었다."

어쩐지 얌전히 물러난다 했더라니. 역시 불신펜스는 어디 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지스는 유능한 죄로,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니며 조사하러 다닌 것만으로 모자라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고 또다시 뛰어다녔다.

"네?! 어째서 이런 임무를 내리셨나 했더니···.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건가요?"

"악마 숭배자들의 일에 지장을 줄 만한 정보를 내주는 대신 한 번 눈감아주는 것으로 결정 났습니다."

"정보라 하면···. 아! 일단 보고부터 마칠게요."

나라면 궁금한 것이 생기는 대로 질문했다가 옆길로 빠졌을 텐데.

착실한 유지스는 자신의 의문을 뒤로 미루고 보고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사실 보고라기도 민망한 게, 수상하다 말할만한 행동은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르젠토 공작이 머무는 별장은 물론, 공사 중인 저택 내부까지 잠입했는데도 그들이 악마 숭배 세력의 일에 가담했었다는 것을 지금 알 정도로요."

"용케 거기까지 잠입할 생각을 하셨네요?"

"경비가 둘로 나뉜 만큼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런 의도로 물은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기겁하며 한 질문에 유지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좋은 물이 들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되려 그가 그녀에게 나쁜 물을 들이고 있었다.

유지스 쪽에서 들어오는 물이라고는 유자 과즙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자 향이 가득한 술을 다시 채웠다.

"어쨌거나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뭔가 서류를 따로 빼두기에 황실에 보고를 올리기 위함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들과 관련된 증거를 인멸하려던 속셈이었나 보네요."

"그거라면 폐하께서도 용납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확실히 악마 숭배 세력과는 손을 끊은 건 맞겠죠?"

"손을 끊다 못해, 척을 진 상황입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개심한 걸까요?"

"······."

바람이 불기는 했지.

세르펜스라는 이름을 가진 나비의 날갯짓으로부터 시작한 작은 바람이 거센 돌풍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으니.

나는 이것을 나비펜스 효과라 명명하겠다.

"그리고 곧 알게 되시겠지만, 페라리우스 령은 황실 직할로 넘어가서 2황자가 직접 관리하게 될 예정이라는 것 같아요. 페라리우스 령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아르젠토 공작가에도 빚을 만들어 두었으니, 황실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잃은 것보다 얻는 게 더 크겠네요."

제국의 귀족 중 악마 숭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국제적인 망신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내어, 아르젠토 공작저가 터진 것 말고는 달리 피해라 할 만한 것도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민간 피해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건 또 내세울 만한 일이란 말이지···.'

거기다 부수입까지 챙겼으니 전화위복이라 할 만하다.

황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얌체같이 이득만 쓸어 담아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이유일 겁니다."

"그럼 주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건가요?"

"아까 말한 그자가 내어 준 '정보'와 관련된 일입니다."

보고는 그것이 끝이었나 보다.

유지스는 이제부터 세르펜스가 하는 말에 경청하겠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아르젠토 공작은 '팔숨 경이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안다.'라고 얘기했었지?'

황실에서 페라리우스 령을 황실 직할령으로 선포했다는 건, 팔숨 경이 알고 있다던 '방법'은 그곳에 설치된 게이트라는 얘기와도 상통했다.

"악마 숭배 세력이 암흑가에서 악마를 소환한다는 정보입니다."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잖아요."

"뿐만 아니라, '암흑가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정보도 함께 제공했습니다."

"그것도 이미···, 앗!"

유지스가 김이 샌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놀람이 담긴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암흑가를 관리하며 그곳을 감시한다.'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잠깐만요,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된 이상 황실에서 '암흑가의 지배자'와 접촉하여 그자를 회유하거나, 아예 치워버리고 다른 인물을 앉히려 들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세르펜스는 바로 그 해결책을 입에 담는 대신, 달달한 술을 입에 담았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가 보군요."

"현재 암흑가의 지배자는 '일루미나티'의 일원 중 하나라는 설정으로 나갈까 합니다."

"그렇다면 가상의 인물이 필요하겠네요!"

설정 짜는 일에는 쿵짝이 참 잘 맞았다.

둘이서 술을 홀짝대면서 쑥덕쑥덕 얘기가 오가더니, 유지스가 사 온 술이 거의 동날 즈음에는 <비극적인 과거의 아픔을 안고, 대의를 위해 암흑가를 호령하는 인물상>이 떡하니 튀어나왔다.

그렇다.

어느덧 유지스는 남에게 속는 피식자에서, 남을 속여먹는 포식자로 거듭나 있었다.

'이게 결사 단체인지, 사기 단체인지 분간이 안 가네!'

사기하니까, 리벨론 영지에서 비비를 속여먹던 세르펜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순진한 어린애에게 모든 죄를 홀랑 뒤집어씌우고 본인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였다.

'와, 내가 애 앞이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해서 그렇지···.'

진짜 너무했다.

물론 그 전에 충분히 사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온에게서 사과를 받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쉐르풴수···."

"음?"

"쩌어기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서 있어요."

"···뭐라고?"

"손들고! 무릎 꿇고! 서 있으시라고요."

세르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깊이 고민했다.

"인간의 신체 구조상, 무릎을 꿇은 상태로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만 골라달라."

진지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고작 그건가?

아까부터 홀짝거리면서 계속해서 술을 들이켜더니 취했는가 보다. 얼굴도 살짝 달아오른 것이 취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원래 이런 공약 잘 안 거는 사람인데, 그가 취한 것이 아니라면 세르펜스의 사탕 병에 계피 사탕을 섞어 넣어도 좋다.

"지금 말대꾸 합뉘까? 뭐얼~ 잘했다고!"

"으음···. 잘하지 않았나?"

"최선임까? 확쉴해여?"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확실할 거다."

"어허!"

"···아닌···가?"

그가 자신 없다는 투로 목소리를 죽이며, 의기소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케 아무궛도 모르는 순진한 아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어도~ 오눌은 못 넘어감다!"

"내가 언제···."

"어허!"

남에게 죄책감을 떠넘기면 마음도 편하고 좋을 테지. 그러다 그것에 익숙해지고 맛 들이면?

그냥 천하의 둘도 없는 쌍놈이 되는 거다.

'과한 죄책감에 시달려 걱정했더니, 이건 또 무슨 난리래?'

하여간, 중간이란 것이 없는 녀석이다.

"그래서 사과할 겁뉘까, 말겁뉘까?"

"알았다. 내가 미안했다. 사과하마."

"옳지, 옳지! 굿 세르, 굿 펜스."

칭찬의 의미로 그의 턱밑을 살살 긁어주니, 그가 고개를 흔들며 그것을 떨쳐냈다.

앙칼진 야옹이 같으니.

"세르펜스 님이 시온에게 뭔가 잘못이라도 하셨나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람?! 우뤼 애는 아~무 잘못도 없거등여?"

야옹펜스와 장난치고 있자니, 갑자기 유지스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해왔다.

'세르펜스가 시온에게 잘못을 해? 먼저 잘못한 게 누군데!'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세르펜스가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던가.

비록 대외적인 모습이라 하더라도 '이거 좀 과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다.

일 처리가 미숙해도 핀잔 한 마디 없었으며, 퇴근 시간은 또 얼마나 칼같이 지켜 주었는지.

그 예리한 날에 베이는 줄 알았다.

'시온에게도 똑같이 대해줬을 거 아니야!'

어디 그뿐이랴?

2년 넘게 취업 못 하고 백수 생활 하던 그를 공작가라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시켜 줘, 월급 많이 줘.

거기다 보고 있노라면 업무 스트레스가 날아갈 정도로 힐링 되는 외모의 상사까지.

굴비 한 번 보고 밥 한술 떠먹는 자린고비 안 부럽다.

'아닌가? 그런 자린고비는 원래 부럽지 않아야 정상인가?'

아무튼지 간에 세르펜스가 얼마나 시온에게 잘 해줬을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놈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세르펜스의 둥글고 어여쁜 뒤통수를 노렸다니.

'와, 진짜 생각할수록 화나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해도 그렇지, 얼굴이 눈앞에 안 보인다고.

세르펜스가 자리를 비운 고 사이에 악마 숭배자가 하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애를 그렇게 모질게 노려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 애가 얼마나 겁이 많고 순둥순둥한데,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으면!'

그치만 그렇다고 해도 죽인 건 정말 너무했다.

서스펜스가 잘 못 했네. 말이라도 들어봤어야···.

'아니지? 시온은 어디 세르펜스의 말을 들어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나?'

제대로 대화도 안 해보고 오해한 건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괘씸했다.

'하지만 살해당한 기억 때문에라도 분명 시온도 힘들었을 텐데···.'

세르펜스를 보며 공포에 질렸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착한 녀석이라 뭐라고 탓할 수만은 없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말이나, 제온에게 나를 옹호하는 얘기도 해 주었고.

'그래, 속인 놈이 나쁜 거지 속은 애가 무슨 잘못이야?'

나쁜 악마 숭배자들 같으니라고.

그런 그들에게 계속 노려지고 있는 세르펜스가 너무너무 불쌍하다.

대체 세르펜스가 그들에게 뭘 잘못했다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성검도 휴마누스에게 넘어갔는데 자꾸 세르펜스 근처에서 알짱거리는지 모르겠다.

"가엽슨  쉐르퓅슈···. 우쮸쮸쥬, 밋-볼 머글뤠?"

"많이 취했다. 오늘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 흡, 음···."

포크로 미트볼을 찔러 그의 입에 넣어주자, 오물오물 잘도 씹어 삼켰다.

"뭐예요, 두 분 다 취하신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유지스야말로 잔뜩 취해서 새빨개진 귀를 연신 까딱거리고 있었다.

오늘 내가 뒤처리해줘야 할 취객은 둘인가?

그래도 다행인 건, 둘 다 얌전하게 취해서 크게 신경 써야 할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 그럼 하나 더 갑니다! 슈우웅~."

"이 정도면 취한 수준이 아니라 미친···, 잠까, 합!"

"아이고, 우리 아들 잘 먹네!"

"이러지 마라···, 음, 으음···."

그렇게 세르펜스의 입에 하나씩 쑤셔 넣다 보니, 어느새 미트볼은 동나 있었다.

포크로 열심히 그릇을 파보아도 미트볼이 새로 생겨나는 일은 없었다.

왜지?

"아하하하하-!"

유지스의 술버릇은 아무래도 웃는 건가 보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그녀가 배를 부둥켜안고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다리까지 바동거리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와, 지잉짜~. 나만 안 취했눼! 어휴~, 뒷정리는 항상 내 몫이라뉘까!"

자리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세상이 일렁거리고 바닥이 솟구쳐 올랐다.

'악마 숭배 세력의 습격인가?! 하필 이렇게 다들 취해 있을 때···.'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세계가 어둠에 물들고,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 * *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다.

내가 지금 내 방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나, 취했었구나."

살짝 알딸딸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거나하게.

주정은 어제의 내가 부렸는데, 어째서 창피함은 오늘의 내가 감당해야 하는가.

무슨 낯으로 세르펜스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말실수는 안 했···지?'

되짚어보자.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말하였나? No.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했는가? No.

[성검의 주인]에 나온 내용을 발설하였는가? No.

비비가 시온 이라는 것을 눈치챌 만한 힌트를 흘렸던가? No.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요 사항들을 체크해 봤지만, 전부 다 'No'였다.

"좋았어, 문제 될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네!"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예고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였다. 그는 팔짱을 낀 상태로, 가관이라 말하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일이래요?"

"선우, 당신이 숙취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까 봐 기껏 와봤더니···. 반성의 기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군."

숙취고 뭐고 고생하게 내버려 둬도 모자랄 판에 수고를 마다치 않고 찾아와준 것을 보면, 확실히 여린 녀석이다.

"그런데 세르펜스도 어제 좀 취했었죠?"

"전혀."

"그럼 어째서 그걸 다 받아먹고 있었던 건데요?"

"그, 그야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나 옷에 소스가 묻게 되잖은가. 그렇다고 그것을 쳐낸다면 바닥에 버려질 테니까, 그게···."

취했네, 취했어.

얼굴이 붉어진 것 말고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얘도 제대로 맛이 갔었나 보다.

역시 술에 취했어도 나의 '세르펜스 상태 분석'은 정확했다.

"왜요? 미트볼 같은 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테니 아까운 건 아닐 테고.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 미트볼이 불쌍하기라도 했습니까?"

"크윽-."

···진짜냐?

"원, 원래 취하면 별거 아닌 게 다 불쌍해 보이고 그렇다고 합디다. 생선 머리와 눈 마주치고 펑펑 우는 놈도 봤어요."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긴요? 미트볼에 눈은 안 달렸지만, 그래요. 불쌍할 수도 있죠. 생각보다 미트볼에 진심이었나 봅니다."

"······."

그런데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동정하지 못하는 놈이 미트볼은 동정한다는 건 좀···.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에게서 미트볼이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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