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65화 (165/925)

165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4)

유지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온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동생분이 굉장히 귀여우신가 봐요."

"···그, 렇습니다."

비비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나, 제온은 그를 마냥 귀여워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제온은 변명 한번 못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의 얼굴이 창피함에 붉게 달아올랐다.

"가정사에 관한 얘기를 나눌 예정이라, 자리를 비켜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요. 이해해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제온은 '동생이 얼마나 귀여운지에 관하여, 형과 함께 토론하고 싶어서 남몰래 방에 찾아온 극상의 팔불출'로 거듭나 있으리라.

유지스의 입술이 또다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고, 제온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 올렸다.

"전 이만 나가볼게요. 가족들끼리 편히 대화 나누세요."

그녀가 방을 떠났고, 제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가졌다.

"어, 음···.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그게 미···."

"그런 것보다 저번에 사용했던 방음 마법 스크롤 재고 남았지?"

엘프의 예민한 청력을 의식했는지, 제온이 반말로 물었다.

'드디어 생각이 정리된 건가?'

비비가 시온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제온은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스크롤을 찢었다.

"방금 저를 동생이라 소개한 것으로 봐서, 위리디아 님께서는 당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예, 그렇긴 한데···. 그냥 신의 계시를 전달받고 있다고 둘러댄 상태입니다. 아! 진짜로 실시간 통신이 되는 건 아니고, 그냥 넘어오기 전에 알고 있던 미래를 토대로 조금씩 풀어내는 중인데,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거겠죠. 굳이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다고 느꼈는지, 제온은 가차 없이 내 말을 잘라냈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르, 아니, 공작님···. 그냥 편의상 앞으로는 세르펜스라 지칭하겠습니다."

"······."

제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차피 이미 비비 앞에서 마구 불러댄 이름이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는 제온 앞에서 못 부를 이유는 없다.

"아무튼 세르펜스뿐입니다. 아! 이제 비비랑 부 집사님을 포함해서 셋이네요."

[성검의 주인]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건 말하자면 tmi다.

이들에게 이 세상은 현실이고, 그건 이제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온이 죽은 시점은 [성검의 주인]의 시작점인 '선택의 날' 이전이나, 그 안에 포함된 역사의 한 귀퉁이였으니.

비비가 '공작가의 보좌관'으로 지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검의 주인]에서 흘러갔던 역사 또한 허구라 할 수 없었다.

'구태여 소설 어쩌고 하는 얘기를 꺼내서 혼란을 줄 필요는 없지.'

장담하건대, 그런 것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세르펜스뿐일 거다.

"그리고 앞으로 더 늘어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유지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제온이나 시온과 달리, 그녀는 [성검의 주인]에서 이루어진 역사의 주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계시로 받는 것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 역사가 존재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하물며 그 끝이 휴마눈새와의 결혼임에야.

'우리 유지스가 아깝지, 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비밀이었다.

"그 외에 그것을 알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전혀 없는 데요. 셋밖에 모른다니까요?"

내 말 허리를 잘라내기까지 하길래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어째 제온이 엉뚱한 것을 물고 늘어졌다.

은연중에 수상함을 흘리고 다녀서 의심을 산 것 아니냐는 시선까지 보내왔다.

"아까 비비에 관한 얘기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본래의 화두를 꺼냈다.

"비비가 아니라 작은 형 때문에 왔습니다."

"그 두 개가 뭔가 다릅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같은 얘기 같은데?

비비가 시온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정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것을 부정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 둘을 구분 지은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아까 낮에 잠깐 업무차 나갔다가 수상한 사람을 만났다고 해야 할지, 끌려갔다고 해야 할지···."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말 그대로라는데,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어어···?'하는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자동으로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말대로라면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왔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제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맞게 이해하셨습니다."

아까,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예상했다는 말은 전적으로 취소한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예상한 사람이 있다면 상품으로 세르펜스 1회 쓰담권(券)이라도 선물로 주고 싶을 정도다.

세르펜스가 거부하겠지만, 이건 제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갖춘 유지스라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 문제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아! 무사히 탈출하신 것은 참말로 다행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됐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아까부터 뭔 말을 하려고만 하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깔끔하게 넘겨버린다.

'대체 얘한테 중요한 건 뭐야? 가족인가? 설마 가족 말고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유지스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동생 한정이 아니라 가족 전반에 걸친 팔불출이었을 뿐.

"지금의 보좌관님은 저의 진짜 형이 아니니, 돌아가서 직접 시험해보라며 돌려보내 주더군요."

연약한 제온이 어떻게 빠져나왔나 했더니, 자력 탈출이 아니라···.

"눼?!"

너무 놀라 혀까지 꼬여 버렸다.

얼타고 있는 나를 보며 제온이 다시 말해주랴 물었고,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그쵸."

거, 사람 되게 할 말 없게 만드네.

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어떻든지 간에 그자가 말하기를, 지금 작은 형의 몸은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있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하나밖에 없는 데요?"

속으로 불러 보고 거울에 말도 걸어 보며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영혼의 존재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프라시더스 령에 처음 내려갔을 당시, 가명으로 ‘시온’이라는 이름을 대던 세르펜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했던가.

몸 안에 시온의 영혼이 있었다면, 제 입으로 시온은 참 엉뚱한 것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었을 때 튀어 나왔어야 했다.

시공간의 오그라듦을 느끼고 수치심에 떨면서, '크아악-!' 하는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말이다.

"두 개의 영혼이 서로 싸우다, 침입자의 영혼이 승리하여 주인의 영혼을 압박하고 짓누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혼의 싸움 같은 것은 해 본 적도 없고, 해 볼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딴 걸 했다면 당연히 제가 알아챘겠죠!"

"이대로면 얼마 안 있어 몸 주인의 영혼이 잡아먹힐 거라 하던데···."

"설마 그 얘길 믿는 건 아니시죠?"

"그랬다면 이렇게 얘기를 꺼냈겠습니까?"

귀가 얇은 건 시온뿐이었나 보다.

아까부터 내 말을 묘하게 씹고 있는 것 같아 불안감에 찔러보니, 제온이 오히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비비가 작은 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수상한 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다. 존재한다. 그것도 그의 아주 가까운 곳에.

나는 '그 사람이 바로 네 작은 형'이라는 말을 삼켰다.

"그렇다 해도 약간 의심은 생기지 않았을까요? 제가 속였을 수도 있잖습니까."

"···보좌관님은 사서 의심받는 것이 취미라도 되는 겁니까?"

"아뇨, 절대 아닙니다!"

바로 부정했으나 미심쩍다는 제온의 눈빛은 여전했다.

언젠가, 세르펜스가 나를 '괴롭힘당하는 것을 즐기는 취향'으로 오해했던 것이 떠오른다.

둘을 더하면 '괴롭힘을 당하고 싶어서 일부러 의심 가는 행동을 사서 하는 사람'이 되는 건가?

무척이나 위험한 사람이다.

"취미 생활은 적당히 하시고."

"아니라니까요!"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빨리 작은 형의 몸 속에서 침입자의 영혼을 몰아내야 한다며, 이번 주말에 보좌관님을 자신들이 있는 장소로 유인해 오라고 했습니다. 물론, 호위 없이."

이건 그거다.

내가 유지스에게 호위를 받으며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안 나가니까, 날 납치하려고 제온에게 수를 쓴 거다.

"그리고 자신들을 '테네브리오의 예언자'라 소개하며···."

"테, 뭐요?!"

"테네브리오의 예언···."

"미친?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예언자는 또 뭐고?!"

"···네?"

갑자기 튀어나온 거친 말에, 제온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언급될 시기가 먼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테네브리오. 그거, 마왕이 직접 지은 자신의 신명(神名)입니다."

"마왕의 신명···?"

마왕은 신이 아니다.

신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하나, 반신이라 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그자는 자신이 완전하길 바랐으며, 동시에 유일하기를 원했다.

그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악마 숭배자들이 모여 하나의 교단을 창설했을 때.

대륙의 존재들은 그것을 그냥 '악마교'라 불렀으나, 그들은 '테네브리오 교단'이라 칭했다.

갓 지은 따끈따끈한 이름이라서인지, 꿀단지처럼 꼭꼭 숨겨 뒀던 이름이어서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작중 설명이 있었다.

아무튼, 지금 나올 이름은 아니라는 거다.

"일단 계속 얘기해봐요. 소개하면서 뭐요?"

"아, 예···."

잠시 정신을 놓았던 제온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정신을 되찾아왔다.

"지금 작은 형의 몸을 뒤집어쓴··· 악마의 하수인 때문에 성검이 본래의 주인이 아닌 엉뚱한 자에게 향했다고 했습니다."

"참 내, 악마의 하수인은 자기들이면서! 나 때문에 세르펜스가 성검을 받지 못했다니, 말을 지어내도 유분수지! 예언가는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죠? 아니다. 전하긴 뭘 전해? 그딴 놈들이랑은 엮이지 않은 것이 상책입니다!"

내가 오지 않았어도 성검의 주인은 세르펜스가 아니었다.

진짜 살다 살다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대체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성검의 주인을 선택하는 신의 의지에 개입한단 말인가.

'아니면 뭐, 내가 세르펜스를 타락시키기라도 했다는 건가?'

열심히 회개해달라 외치면 외쳤지, 타락을 부추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길바닥에 홀로 버려져 있던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를 주워다가 확대해놨더니, 어째서인가 곡해되어 학대했다는 소문이 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서럽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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