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70화 (170/925)

170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9)

"제온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저 사람은 또 누구고?"

"······."

내 부름에 제온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동무하던 팔을 풀며 한 걸음 물러나 현관문 쪽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로막는 척하며 만약을 대비한 퇴로를 확보하였다.

"확인해보니 어떻습니까? 제 말대로이지 않습니까?"

"···네. 예언자님의 말씀대로, 저자는 제 형이 아니었습니다."

제온의 대답에 자칭 예언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뚜렷해졌다.

그럼 나는 당황할 차례인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제, 제온···아?'하고 제온의 이름을 더듬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악마 숭배자의 만족도는 올라간 듯 보였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뭐, 뭔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어! 내가 네 형이 아닐 리 없잖아? 날 자세히 봐! 어딜 봐도 네 작은 형인 시온 리벨론이잖아?"

"이제 더 이상 속지 않아, 이 가짜!"

"아니야, 날 믿어야 해. 저 누군지도 모를 놈이 아니라 나를! 너는 저자에게 속고 있는 거야!"

나와 제온이 실랑이질을 시작하자, 악마 숭배자 놈은 키득거리며 느긋하게 관전했다.

자신의 이간질에 넘어가서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우리가 다투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들의 계획을 망쳐놓은 장본인인 내가 곤란해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뭐가 되었건 중요한 것은 저자가 나를 이미 잡은 물고기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 끌기 딱 좋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악당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그냥 바로 처리하면 될 것을···.

괜히 상대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낄낄대며 가지고 놀다가 큰코다치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클리셰다.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각성하는 바람에 '푹, 찍, 으악!' 당한다거나, '와, 와-!'하며 몰려든 지원군에 의해 뒤치기 당한다거나.

'수많은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내용이잖아? 거기서 뭐 느끼는 점 없어?'

당장 책방에 가서 악과 정의가 맞부딪히는 소설을 아무거나 집어 읽어도 배울 수 있는 교훈이거늘.

'얘들은 책도 안 읽나? 아니면 반면교사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어느 쪽이건 좋은 게 좋은 거다.

악당이 그러한 슬픈 역사를 답습해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는데, 어쩌겠는가.

정의의 이름으로, 시간을 끌어서 그들이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그것이 도리다.

"여기, 오른쪽 손목에 난 점 보여? 그리고 여기, 배꼽 아래 대각선 방향에 나 있는 점이랑···. 아, 그래! 여기! 여기! 왼발 검지랑 새끼발가락에도 작은 점이 있는 거 보이지?"

나는 소매를 걷어 손목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제온에게 시온의 몸에 난 점의 위치를 확인시키기 시작했다.

바꿔치기 따위는 없었다는 일종의 이의제기다.

주섬주섬 재킷과 조끼와 셔츠를 하나씩 들춰서 배를 까보이고, 다시 옷매무새를 천천히 가다듬었다.

신발과 양말도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 신발 끈을 끄르고 다시 묶는 과정은 덤.

어차피 몸은 그대로고 알맹이만 바뀐 상태다.

이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전해 듣지 못하고 따라 나왔다는 설정이잖아?'

그저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라 여기겠지.

내 속셈을 눈치챈 제온은 내가 부스럭대는 모습을 싸늘한 표정을 고수하며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 발을 들이댔을 때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변론은 그게 다야? 어디 한번 계속해 보시지?'라고 말하는 듯한 띠꺼운 표정을 끝까지 유지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자, 어때! 몸에 난 점 위치도 똑같지?"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내가 진짜 시온 리벨론이 맞는다는 얘기지."

"고작 점으로?"

"고작이라니? 점 하나 정도의 위치는 같을 수도 있는데, 그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 이런 우연이 세상에 어딨겠어? 정 부족하면 더 보여줄까? 허벅지 앞쪽이라던가, 등이라거나···!"

"아니, 됐어! 벗지 마!"

내가 주섬거리며 단추를 푸는 시늉을 하자, 제온이 못 볼 꼴 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렸다.

어차피 나도 진짜로 벗을 생각은 없었기에 풀었던 단추를 다시 잠갔다.

기껏 마법 스크롤들을 몰래 숨겨 넣고 오느라 밤이라 해도 이 여름에 재킷까지 챙겨 입고 나왔는데, 홀라당 벗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어째서 내가 작은 형의 몸에 난 점 위치를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 용으로 얘기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

'설마, 내가 시온의 몸에 난 점 위치를 하나씩 짚은 것 때문에 짓는 표정인 건가?'

이건 오해다.

일부러 하나씩 찾아보고 외운 것은 결코 아니다.

'목욕할 때 이쪽저쪽 꼼꼼히 씻다 보면 그 정도는 다 보게 되잖아?'

그러면서 낯선 위치에 있는 점들을 보면서 '난 여기에 점이 없었는데, 얘는 여기 있네?'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기억에 남았던 것뿐이다.

사실 등에 난 점 위치도 모른다. 막연히 등에 점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말해본 것에 불과했다.

당장 해명할 수도 없고 미치겠다.

"그, 그야 가족이니까 당연히 알 줄 알았지!"

"그럼 내 몸에 난 점 위치도 알겠네?"

"어, 그게 그러니까···. 왼쪽의 그··· 눈썹 앞머리 부근?"

"지금 보이는 곳 말고."

"···오른쪽 엉덩이?"

"찍지 말고."

"찍은 거 아닌데? 지금 확인해보지그래?"

"······."

시온의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 어릴 적 같이 목욕하며 물장난 치던 기억을 떠올려 대답했다.

그러자 제온의 표정에 드리워진 혐오가 더욱 짙어졌다.

'왜 나한테 그래? 네 진짜 형한테 가서 따져! 고향에 있는 비비한테!'

정말 억울해 죽겠네.

"아, 아무튼! 저 사람이 대체 무슨 말로 너를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이제 잘 알겠지?"

"아니, 모르는 건 당신이겠지."

아무리 재밌는 콩트라도 그것만 죽 이어지면 유치해 보이고 질리는 법이었다.

완급 조절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눈앞의 관객과 더 숨어있을지 모를 관객들을 위해서, 극의 분위기를 다시 진지하게 바꿨다.

"바뀐 건 어디까지나 영혼뿐···. 둘째 형의 몸에 들어가서 진짜 형의 영혼을 밀어내고 차지한 거잖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몸을 뺏어간 거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집어삼키는 중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 나는 정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제온아, 제발 정신 차려!!"

제온이야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면 그만이나, 문제는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 문제 또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제온이 퇴로 확보를 위해 뒤로 물러났던 것 덕분이다.

그를 바라보며 설득하는 척하며 악마 숭배자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

다소 위험한 행동이긴 했지만, 제온이 내 등 뒤를 확인해주고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애먼 놈을 함께 바라보며 말다툼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그렇게 제온은 악마 숭배자에게 형을 빼앗긴 동생을. 나는 악마 숭배자에게 홀린 동생의 정신을 되찾아 주려는 형을.

우리는 맡은바 배역에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왜 내가 네 형이 아니라는 건데?"

"글씨체가 다르잖아."

치사하게.

아무리 떠오르는 게 없다고 해도 그렇지, 여기서 팩트를 들고 오는 건 반칙이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류 작업할 게 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 서류 종이가 팔락거리며 날듯이 넘어가는 만큼, 글씨체도 함께 날아갈 수도 있지! 공작님도 그렇고, 공작가의 행정관들도 그렇고. 다들 일 처리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르다는 거, 너도 알잖아. 내가 그들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고! 네가 내 마음을 알아? 갈수록 개발새발이 되어가는 글씨체를 본 공작님께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며 '시온 경의 업무 속도가 빨라져서 기, 기쁩니다···.'같은 소리를 하실 때, 내가 얼마나 착잡했는지 네가 아느냐고!"

사실 나도 모른다.

세르펜스는 그런 소리를 안 했으니까.

오로지 시간 끌기를 목적으로 덧붙인 말에 불과했다.

"그럼 가족들 초상화가 그려진 탁상 액자는 왜 치운 건데?"

"치운 게 아니라 안 꺼낸 거야! 공작저 안으로 짐을 옮긴 다음에 아직 안 푼 것뿐이야."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때가 언젠데 아직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리해야지 해야지 했는데! 짐을 풀고 필요한 것을 꺼내는 것보다 공작가에 얘기하는 게 훨씬 빠르고 간편한 나머지 그만···! 옷도 공작님이 새로 사주셔서, 겨울 코트 같은 건 아직도 상자째로 침대 밑에 처박혀있어서, 사실 그 액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

그가 어떻게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 형이 10대 사춘기 때부터 침대 매트릭스 아래에 숨겨···."

"야!! 그 얘기를 꺼내는 건 좀 아니지!"

본능적으로 급하게 제온의 말을 틀어막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온의 기억은 막지 못했고,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시온 녀석. 그딴 곳에 그런 값진 것을 숨겨 놨었단 말이야? 혼자 자취하면서 왜 숨겨, 왜! 지금 찾으러 가봐야 늦겠지?'

그 소심한 성격을 떠올려 봤을 때 충분히 그럴만한 녀석이었는데, 그 가능성을 떠올려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나는 시온이 그런 거 안 보는 순수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너한테 들켰다는 것을 안 뒤로, 다른 곳에 숨기는 버릇을 들였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 얘기는 좀···."

아쉬움의 눈물을 삼키며 변명을 이어나갔다.

"어쨌거나, 고작 그런 것들로 나를 의심한 거야?"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형이 나를 대하는 태도야! 자꾸만 나를 피하고,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먼저 말도 안 걸어 주고···! 그리고 무언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꾸 형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트집 잡을 거리가 떨어졌나 보다.

창의성이 부족한 녀석이다. 없는 것을 적당히 꾸며낼 줄도 알아야지.

어쩔 수 없이 제2막을 준비해야겠다.

"그, 그건 분명···! 저, 저자가 네게 뭔가 한 것이 틀림없어!"

몸을 틀어, 깔끔한 신사복 차림을 한 악마 숭배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야 돌아본 그의 얼굴에는 의심이 한 점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래. 내가 진작에 정체를 들켜서 제온에게 모든 것을 떠벌리고 난 이후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해봤겠어?'

선착순은 이 세상을 이루는 주요 법칙 중 하나다.

그러게 좀 더 빨리 행동에 들어갔어야지, 굼뜨게 뒷북이나 쳐대니까 이단 심문관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경계망을 좁혀오는 것도 모르고 연극 감상이나 하고 있지.

'하다못해 마음이라도 곱게 썼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조금만 더 인류애를 가지고, 서로를 헐뜯는 형제를 가엾이 여겼으면 이런 일은···.

아니다. 그랬으면 악마 숭배 따위를 하지 않았겠구나.

'악마 숭배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쯧쯧.'

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줄도 모르고, 놈은 우리가 선보이는 연극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관객이 저토록 즐거워해 주니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무대를 한 번 맛본 자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거로구나!'

매일같이 소설을 써대는 유지스와 설정을 짜는 세르펜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어디서 대본이라도 구해다가, 그에게서 본격적인 연기 지도를 받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 아니야! 저분은 당신이 가짜라는 것을 내게 알려주고, 내 형을 되찾게 해줄 분이셔!"

"내가 바로 네 형이야!"

"거짓말! 너는 내 형의 몸에 씐 악령에 불과해! 우리 형은 너처럼 약아빠진 놈이 아니야, 더는 작은 형을 욕되게 하지 마!"

"날 욕되게 한 건 너거든?! 어디서 저런 다단계 사기꾼 같은 복장을 한 놈에게 속아서 형제를 팔아먹으려 들어?"

"사기꾼이라니!"

"네가 수도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래! 다들 저렇게 멀끔하고 신용 있어 보이는 옷을 입고 우리 같이 시골에서 올라온 놈들을 속여 먹는다고! 이 순진한 동생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수도에서 3년만 지내보면, 너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졸지에 신성 루멘 제국의 수도가 사기꾼들의 집결지가 되어버렸지만, 리벨론 령 같은 깡촌에 비하면 아주 거짓은 아니다.

'그나저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거지?'

주머니에 넣어 둔 회중시계로 자꾸만 손이 가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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