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10)
"이제 연기는 그만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악마 숭배자가 조롱기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들킨 건가? 그럼 왜 저렇게 느긋하게 말하는 거지? 설마 이중 함정이었나?'
등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눈앞의 놈을 너무 얕본 것은 아닐지.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은 우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목적으로 저놈 또한 시간을 끌고 있었다거나···.
불현듯 불안과 걱정이 엄습해왔다.
"···여, 연기라뇨?!"
떨리는 목소리는 감춰지지 않았고, 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히죽이 웃었다.
"연기, 아주 잘 보았습니다. 누가 보면 당신이 진짜 시온 리벨론인 줄 알겠습니다."
"···네?"
걱정과 달리, 그가 말한 연기와 내가 떠올린 연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아휴, 깜짝이야. 우리 관객님, 그거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난 또 뭐라고.
하마터면 심장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우리의 연극은 악마 숭배자를 속이고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었지만, 놈의 시선으로 본 연극은 내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시려면 더 그럴듯하게 연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절박함과 당혹스러움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잖습니까. 어떻게든 속여야 한다는 다급함만 느껴지는 삼류 중의 삼류 연기이었습니다만···. 꽤 즐겁게 봤습니다."
쉽게 말해, 내 연기만 들켰다는 소리였다.
비록 작품 해석에는 실패했지만, 배우의 연기 분석만은 훌륭했다.
'그런데 그 말은 전전긍긍해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즐겼다는 소리잖아?'
완전 악질이었다.
누가 악마 숭배자 아니랄까 봐, 그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은연중에 드러냈다.
"대체 무슨 말로 내 동생을 홀린 거야?"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진짜 가족을 곁에 불러들인 겁니까? 저라면 행여나 들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얼씬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혹시 곁에 두고 조롱하려던 목적이라면 굉장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군요. 제가 악마 숭배자였다면 스카우트를 제의하고 싶을 정도로."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악마 숭배 세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게 될 줄이야. 거긴 그렇게나 인재가 부족한가?
싹수만 보이면 데려가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이미 악마 숭배자로서 프라시더스 공작을 타락시켜 성검을 받지 못하게 하신 분에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공작님은 여전히 순수하시고, 악마 숭배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그쪽이면서!"
"여전히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신가 본데···. 그래 봐야 소용없습니다."
놈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다 넘어질 뻔한 것을, 뒤에 서 있던 제온이 어깨를 붙잡아 받쳐줬다.
"마, 마왕 새끼, 개새끼!"
"···뭐?"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기···. 자꾸 나를 악마 숭배자로 몰아가길래 억울해서 그만···."
줄곧 히쭉거리던 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희미해지고,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귀기가 서렸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지며, 기온이 뚝 떨어진 것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뭐, 뭐야. 대체, 몇 명이 더 숨어있는 거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차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바 아무개 씨의 기척을 느낀 것 같은. 그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쪽도 악마 숭배 세력을 적대한다고 보면 되는 거···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함께 마왕을 까면서 오해도 풀고 친해지는 게 어떤가 해서···."
급하게 말을 덧붙여 봤지만, 놈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 그 자체였다.
저자가 웃는 낯으로 우리를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나와 제온을 붙잡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악마 숭배자라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몸에서 새까만 마력을 줄기줄기 피워 올리는 그 섬뜩한 모습이란···!
만약에라도 마왕 개새끼를 외쳐보라는 도발이라도 했었다면, 이미 나를 찢어 죽인 이후였으리라.
"어, 어어···.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됐지? 금방 돌아갈 줄 알고 주방에 야식 좀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 놨었는데···. 식기 전에 빨리 돌아가 봐야 해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면 안 될까? 아, 하하···."
멋쩍어하는 척,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놈이 나를 미친 사람 보는 듯한 눈으로 보았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확인 결과, 돌입 예정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15분가량.
'아직도 이것밖에 안 지났어?'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최선을 다해본다던 이단 심문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속으로 혀를 차며 회중시계의 뚜껑을 탁-, 소리가 나게 덮은 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대로 보내줄 것 같으냐?!"
"···이, 이제 생각해보니 야식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네. 아니, 같습니다. 와, 제가 그동안 너무 무례했죠? 저희, 다시 차분하게 대화해봅시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공작님이 너무 순수하고 여린 분이라, 신 룩스메아께서도 차마 그분에게 짐을 얹을 수 없어서, 성검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얘기까지 했던가요?"
말투가 반전되었다.
놈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이제껏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집어 던졌고, 나는 바짝 쫄아 놈의 눈치를 살피느라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
"···아, 하하."
개새끼가 나오기 전 화제를 다시 꺼내보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그때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놈은 흉신악살같은 얼굴로 계속해서 흑마력을 피워 올렸고, 그것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고, 명확한 형태를 갖춘 마법이 되었다.
검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칼날이 공중에서 번뜩였다.
어깨를 잡은 제온의 손이 움찔하며 힘이 더해졌다.
"저, 죽일 생각은··· 아니시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야 인질로 쓸 수 있으니까요?"
"네놈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그리했겠지."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불러왔다는 건가?
"저, 저는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라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럴 생각이었는 데요?"
"곧 죽을 놈이 보이는 마지막 연극에 어울려 줄 생각이었으나, 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완전히 확신에 찬 목소리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선은 무슨···.'
불만이 떠올랐지만 눈앞의 마법이 무서워서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몸을 움츠리는 척, 왼쪽 소매 안쪽에 밀어 넣은 마법 스크롤이 빠지지 않도록 고정해두었던 실핀을 슬쩍 빼냈다.
"그래, 그 스크롤."
"엇···!"
작은 실핀이 바닥에 댕그랑 떨어졌다.
"과거가 현재가 되었을 때, 그 시점에 프라시더스 공작과 접촉한 사람이 너와··· 그 스크롤을 제작한 마법사였던가?"
뭐야, 어느 시점부터 새로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있는 거야?
저놈이 알아챈 건 아닐 테고, 분명 마왕이 말해 준 것일 테다.
'마왕의 힘을 빼돌렸던 세르펜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썩어도 준치라더니, 반쪽인 데다 자신이 직접 지은 거지만 신명까지 붙은 놈이라 그런지 다르긴 다르다.
"선택의 날.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무너져 내려야 할 프라시더스 공작은 어째서인가 영웅으로 칭송받고, 진작 죽었어야 할 놈은 죽지 않고, 없던 존재가 하나 생겨났지."
거기까지는 제온에게 얘기하지 않았었는데 괜찮은 건가?
놈의 말에 놀랐는지 제온의 손아귀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살짝 아프다 싶었지만, 덜덜 떨리는 것이 애처롭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나뿐이라 이러는 걸 텐데.'하는 생각에 차마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분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녀를 의심했었다. 네놈은 너무 약해 빠져서 단순한 미끼인가 했지만···. 그런데 보면 볼수록 진짜 수상하단 말이지?"
그래서 솔레르티아의 스크롤에 장난질을 쳤던 모양이다.
내게 손을 썼던 것처럼, 세르펜스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며 겸사겸사 함께 처리할 속셈이었나 보다.
"아무리 지켜봐도 그 마법사는 공작에게 접근할 생각은 없어 보였고,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존재들이 공작저에 버젓이 자리를 틀고 앉았는데, 그들 모두와 연관된 놈이라고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나다.
어떻게 나를 콕 찍었나 궁금했었는데, 듣고 보니 내가 눈에 띄긴 띄었나 보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하게 구구절절 설명해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시인했군!"
"앗!"
확신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떠본 것에 불과했다니. 많이 분했다.
그렇긴 해도 궁금했던 부분을 알게 된 것은 피차 마찬가지.
나는 이미 들킨 상태였고, 그 대신 마왕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내가 이겼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기다 혼자 떠들어대면서 시간도 끌어주고 있었다.
"그, 그냥 질문한 것뿐입니다! 그게 왜 시인한 게 되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도망가면 그만이고,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었으니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앗!"
반쯤 맞았다.
"눈치채지 못한 건가? 이미 자신의 퇴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놈의 시선이 내 너머를 향했다.
나는 어깨를 잡은 제온의 손을 떼어내고, 뒤쪽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굳게 닫힌 현관문뿐···.
"뭐야, 저거 언제 소리소문없이 닫혔어?!"
"뭐, 뭐야? 그게 왜 떼어내 져···?"
"···떼어내다니?"
내가 떼어낸 것이라고는 어깨 위에 올려졌던 제온의 손뿐이다.
"미안하지만, 제온에게는 미리 말해둔 상태여서 이제 와서 내 뒤통수를 치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인생은 선착순, 모릅니···."
다시 제온의 손이 어깨 위에 턱-, 하고 얹혀졌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떼어냈고, 그는 다시 올렸다.
"···엇, 야! 너 눈이 왜 이래?!"
어쩐지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서 확인해보니, 그의 두 눈이 썩은 동태눈처럼 맛이 가서 동공이 완전히 풀려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제대로 먹혀들어 갔는데, 어째서?!"
"아, 우리 애가 워낙에 연약해서 그만···. 그러길래 장난치지 말고 저에게 걸었어야죠."
살짝 제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체중을 실어 무릎으로 그를 내리누르며 양팔을 잡아 제압했다.
'그나저나 얘 이거 세뇌당한 거야, 단순한 정신 착란 같은 거야?'
전자라면 세르펜스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묶어둬야 할 텐데,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왼손으로 시계를 꺼내어 확인해보니 남은 시간은 3분 남짓.
'서두르겠다는 말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나?'
최소 5분에서 10분 정도는 일찍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세르펜스를 제외한 프라시더스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시계는 왜 자꾸···. 잠깐, 진짜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서, 설마?!"
악당답게 설명에 심취한 나머지, 내가 시간을 끌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다.
이쯤 되면 고질병이다, 고질병.
"···그렇다 해도 네가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라고는, 기껏 해봐야 공작저의 남은 병력 정도? 교단에 몰래 연락을 취했다고 한들, 성기사 몇 명 정도려나?"
몇 명 정도가 아닌 것 같던데···.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미 준비는 충분하다. 내가 괜히 주말에 만나자고 한 줄 아는 건가?"
악마 숭배자들이 평일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느라 주말밖에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닐 터.
주택에 여러 가지 마법적 방비를 해놓고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소란을 틈타 도망가는 건 곤란하니, 지원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죽여둬야겠군."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허공에 떠 있던 묵빛의 칼날이 나에게 쏘아졌다.
아니, 쏘아지려는 찰나.
쨍그랑하며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암막 커튼을 뚫고 날아든 화살이 내게 날아오던 칼날을 쳐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쨍그랑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모든 창문에서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마치 계획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저택 내부로 퍼져, 눈 깜짝할 사이에 숨어있던 악마 숭배자들을 제압해서 한 놈씩 손에 들고 중앙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머리쯤 되어 보이는 놈은 청은발의 이단 심문관에게 제압되었다.
"죄송합니다. 좀 더 일찍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이자들이 일시에 기척을 드러낸 터라 계획을 조금 바꿨습니다."
"아···."
마왕 새끼, 개새끼···.
여러모로 외치지 말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