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72화 (172/925)

172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11)

새까만 흑마법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고, 환하게 빛나는 신성력이 그것을 베어내고, 또 막아내고.

그렇게 어둠과 빛이 서로 맞부딪히는 화려한 전투씬 따위는 없었다.

'내가 제온에게서 눈을 뗀 잠깐 사이에 그의 정신에 뭔 짓을 한 것으로 봐서, 준비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출입문을 무시하고 쳐들어온 성기사들에 의해, 악마 숭배자들은 준비한 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1:1로 전원 제압당했다.

그러고도 성기사 쪽은 인원이 남았는지, 깨진 창문 너머로 몇 명의 성기사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 이리 많이 몰려왔···, 윽!"

어디선가 허망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했으나, 성기사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는지 '퍽-!'하는 둔탁한 타격음을 마지막으로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준비는 내가 더 철저하게 한 모양이네."

"크, 으윽-!"

내 혼잣말에 연극 관람이 취미로 추정되는 악마 숭배자 놈이 이단 심문관에게 깔린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뭐야, 아직도 기절 안 했어?"

다른 놈들은 진작 기절해서, 희끄무레하게 자체발광하는 신기한 밧줄에 의해 굴비처럼 한데 엮이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은 놈이라 얘기라도 들어보려고 남겨 둔 건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잠시뿐.

이단 심문관이 뿜어내는 은빛의 신성력 아래로, 놈의 새까만 마력이 살짝씩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놈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이단 심문관의 신성력을 밀어내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왕이 아무나 무작위로 찍어서 자기 이름을 알려준 건 아니다, 이건가?"

"이, 이···! 양심도 없는 놈!"

"뭐?"

내가 왜 악마 숭배자에게 양심 지적을 받아야 하지?

"네놈은 진짜가 아니잖은가! 형제의 몸을 빼앗고, 그를 그렇게 무참히 찍어 누르는 것이 미안하지도 않은 거냐?!"

그의 말에 내 밑에 깔려있는 제온이 좀비처럼 으으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제대로 된 언어 구사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솔레르티아의 가짜 스토커가 걸렸던 세뇌는 아닌가 보다.

"와, 제압당해서 흑마법은 더 못 쓸 것 같으니까, 다른 쪽으로 수작 거는 거 보소? 그게 행동을 유도하는 시동어 같은 건가 봐?"

"죄송합니다. 좀 더 빨리 처리해야 했는데, 죽지 않도록 조절하느라···."

"네? 아뇨, 에일리히 님을 탓하려던 게···."

···아니라는 말까지 들어줬으면 했는데.

이단 심문관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표정한 얼굴로 은색의 창을 놈의 어깻죽지에 찔러넣어 버렸다.

예리하게 벼려진 창날의 끝에 신성력이 맺혀 악마 숭배자가 만들어낸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막을 뚫어냈고.

푸욱-,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끄으윽-!'하는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저걸 참네···?'

잠시 검은 마력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나, 이내 정신을 다잡았는지 놈은 기어코 버텨냈다.

"동생분은 이쪽으로 넘겨주십시오."

다른 악마 숭배자들의 정리는 끝났는지, 성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얘가 몸이 많이 연약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럼 잘 부탁합니다."

내게서 제온의 신변을 넘겨받은 성기사는 그의 뒷목을 가볍게 눌러 기절시킨 후, 축 늘어진 그의 몸을 곱게 안아 들었다.

누가 성기사 아니랄까 봐,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끄으윽! 큭···."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들려온 앓는 소리에 무심코 시선이 향하였다.

이단 심문관이 창 자루를 잡은 채 비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까지 하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는 모습을 보면, 적이지만 그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면 고통이라도 덜 할 텐데···.'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도대체 마왕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보고 있는 내가 소름이 끼치고, 괜스레 어깨 부근이 간질거리며 신경 쓰일 정도다.

나를 죽이려 했고, 나눴던 대화 속에서 그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놈을 동정할 생각은 없지만, 인간 된 도리로서 그 고통을 조금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변호도 좀 하고.'

마왕이 생각보다 구체적인 부분까지 알고 있었고, 그걸 또 잘도 떠벌거려 놓았다.

여기저기 퍼트리기 전에 미리미리 반박해 놔야지.

"···뭐, 그쪽 말대로 그렇다고 쳐. 물론 나는 시온 리벨론이 맞고, 그 사실은 여기 있는 내 동생 제온이 정신을 차리면 바로 인정해 줄 테지만,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고."

마왕 새끼 발언을 이단 심문관이 모르는 것을 떠올려 봤을 때, 그 이후. 시인했니 어쨌니 하는 대화는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문이 닫힌 이후'부터 듣지 못했으려나?'

그것은 내가 제온에게서 시선을 뗀 뒤. 그리고 그가 내 어깨를 잡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리라.

기왕이면 그 전의 대화도 거리가 멀어 듣지 못했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특히 매트릭스 아래의 그것에 관한 얘기는 내가 숨긴 것도 아닌데, 누군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얼굴이 홧홧해졌다.

“뭐가 됐건, 어쨌거나 악마 숭배자들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거잖아? 그렇다는 건 내가 악마 숭배자들의 계획에 있어 큰 걸림돌이라는 거고, 그렇다는 건 범 대륙적으로 겁나 착하고 좋은 놈이라는 의미 아니겠어?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정 아닌가?"

옆에 유지스가 있었다면 신의 사자인 나를 견제하는 것이 틀림없노라 내 말에 긍정해 주었겠지만, 없어도 그다지 문제 될 것은 없다.

아니, 없는 게 다행이다.

세르펜스라면 모를까. 내가 신의 사자라고 말하고 다녔다가는 신성 모독으로 잡혀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까 되게 이상한 말을 하던데···. 마왕이 선택의 날 이후에는 사람들이 공작님을 비난했어야 한다고 했지? 신께서 어련히 생각이 다 있으셔서 그런 선택을 내리신 거고, 성검이 없어도 공작님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왜 그런 개소리를 했을까? 마왕의 '왕'은 개가 왕왕 짖을 때 내는 그 '왕'인가?"

"크으···, 끄아아악-! 네, 네 이노옴-!!"

그냥 흑마력을 유지하는 정신만 좀 흐트러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조금 과했는지, 놈이 생각보다 더 크게 분노하며 으드득 이를 갈며 몸부림쳤다.

저러다 분을 못 이겨, 제 혀라도 깨물어 자결하는 것은 아닐는지 걱정이다.

"그,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꼭 옴짝달싹도 못 하는 놈을 두고 비아냥거리며 놀리는 것 같잖아···. 그냥 사실만 말한 것뿐이니까, 진정해. 응?"

저들도 허구한 날 룩스메아를 욕하고 다니면서, 그걸 역으로 당하는 건 참을 수 없나 보다.

놈이 뿜어내는 흑마력이 크게 부풀어 올랐고, 이단 심문관 또한 신성력을 더욱 키웠다.

그런 이단 심문관의 표정은 무척이나 서스펜스했다.

세르펜스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기준으로 추정하건대, 귀찮게 사로잡아서 교단에 끌고 갈 것도 없이 당장 그를 족쳐서 알고 있는 것을 불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계속 숨어서 견제 중일 유지스와 눈앞의 내가 없었다면, 정말 그리했을 것이다.

"···계, 계속 말해도 돼요?"

"예. 흥미로운 의견이니 계속 말씀해 보십시오."

왠지 모르게 그의 눈치가 보여 넌지시 질문했고, 이단 심문관은 악마 숭배자의 입에 재갈을 쑤셔 넣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조금도 흥미진진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악마 숭배자 놈···. 아. 계속 악마 숭배자, 악마 숭배자 하니까 좀 번거롭네···."

별걸 다 줄인다는 별다줄의 민족으로서, 이런 건 옳지 못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비록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 한들, 나의 정체성은 그곳에 있었으니. 내 뿌리는 내가 지킨다!

"대충 줄여서 '악숭'이라 부르죠, 뭐. 어감이 좀 귀엽긴 하지만, '아이고, 숭하다!'의 준말 같기도 하고, 꽤 괜찮지 않습니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악숭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단 심문관과 성기사, 그 누구도 동의해주지 않았다.

"···하여튼 저 악숭이도 마왕의 간교한 혓바닥에 속았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해 주자는 말은 아니고요!"

"······."

호응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 내 말에 뭐라도 반응해 주는 놈이라고는 악숭이뿐이라니.

세상 헛산 기분을 느끼며, 이단 심문관이나 성기사에게 말을 건네는 건 포기하고 악숭이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테네브리오의 예언자라고 했던가? 악숭아, 마왕에게 예언인 척하면서 희망 사항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 줄···, 앗! 이제 전할 수 없게 되었구나? 미안."

교단 측에서 악숭이가 마왕과 교신하는 것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쨌든지 간에, 마왕이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일걸? 생각해 봐, 신도 아닌 주제에 남이 붙여준 것도 아니고, 직접 자기 자신에게 신명이라면서 이름을 붙인 놈인데. 그런 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너도 참 미련하다. 네가 들은 얘기들은 모두 마왕의 소망을 반영한 놈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 말이야."

세르펜스의 명예를 위해, 마왕의 명예는 잠시 쓰레기통에 처박혀줘야겠다.

그러길래 미래를 알고 있다면 나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어야지, 그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쓰나.

원래 회귀자는 자신의 회귀 사실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 법이다.

"그딴 걸 다 믿고 예언가니 뭐니 하는 호칭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다니다니···. 어우~ 남사스러워라, 진짜. 내가 다 쪽팔린다."

"크, 으븝-. 으브븝, 븝!"

놈도 이제야 부끄러움을 자각했는지 몸을 비비 꼬며 꿈틀거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재갈 때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전부터 악숭 세력은 공작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해 왔잖아? 그래서 그런가, 이번 일도 그것에 대한 연장선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나를 꾀어내는 방법부터 너무 의심스럽잖아. 내게 뭔가가 씐 것 같다니, 그딴 말을 대체 누가 믿겠어? 듣는 입장에서는 '아, 이런 이단 놈들. 당장 교단에 신고해야지!'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너 같은 수상한 놈이 아니라 룩스메아 교단에 연락해서 '우리 형 좀 봐주세요~.'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어라? 이거 말하고 보니 정말 그럴듯하네?

효과는 없었지만, 이단 심문관도 오자마자 날 스캔하지 않았던가.

보통의 경우라면 영혼이 어쩌고, 타락이 뭐시기하는 말을 들으면 룩스메아 교단에 달려가는 것이 우선이다.

"악숭아, 혹시 너 미끼야? 미끼 맞는 거 같은데? 처음부터 널 교단에 사로잡히도록 유도해서, 자신의 망상으로 이루어진 거짓 정보를 흘리게 할 속셈이었던 거 아냐? 혼란을 가중시키려고 예언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와, 이거, 진짜, 와-! 마왕, 이 새끼 진짜 개새끼네! 나름 자신을 믿고 따르는 놈들인데, 마계에 가만히 앉아서 이간질이나 해대고 말이야!"

"으, 으븝···, 으브븝···."

"너도 진짜 불쌍하다. 예언이랍시고 마왕으로부터 얘기를 전달받을 땐 참 좋았지? 남들보다 특별 대우해주는 것 같고. 이번 일만 잘 끝내면 간부가 되는 건가 하면서 기뻐했을 텐데···."

이런 짓은 룩스메아도 안 한다.

이 세계 사람들이 바보라서 트롤메아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트롤링을 하더라도 마음이라도 착하게 먹는 쪽을 모시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

'거기다 무능해서 인간들이 하는 일에 터치를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자기네가 멋대로 규칙을 정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니, 믿는 입장에서 이보다 편할 수가 없다.

신 룩스메아의 이름 아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결국, 쓰다 버릴 패에 불과했구나···?"

"······."

놈은 저항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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