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76화 (176/925)

176회

36. 공작님의 가족 상봉 (1)

세르펜스도 돌아왔겠다, 아침을 먹기 위해 유지스와 함께 본관에 있는 식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하니 여느 때와 같이 세르펜스가 먼저 자리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예, 잘 잤습니다."

습관처럼 던진 질문에 세르펜스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존댓말이 음식을 나르는 시녀들을 의식한 반응이라는 건 알지만, 완벽한 체하는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표정뿐만이 아니다.

잘 잤느냐는 질문에는 언제나 '네. 시온 경도 잘 주무셨습니까?'라는 질문이 되돌아 왔는데, 오늘은 잘 잤다는 말을 묘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런! 그러면 안 돼요, 잘 주무셔야죠."

그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지스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맞습니다!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게 바로 자는 겁니다."

생각에 잠기느라 선수를 뺏겼지만, 내 의견 또한 그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우리 둘의 반응을 본 세르펜스의 완벽한 미소가 조금 깎여나가고, 그 틈으로 황당함이 살짝 드러났다.

"···저, 분명 잘 잤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내 대답에 세르펜스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고개도 살짝 기울어졌다.

기억을 되짚어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있는 걸 테다.

그러다 문제점을 찾아냈는지, 그가 열없게 웃었다.

"아···,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별건 아니고, 그저 조금 피곤해서 잠을 설쳤을 뿐입니다."

너무 피곤해서 가위라도 눌린 모양이다.

어쩌면 그 정도를 넘어 악몽을 꿨는지도 모르겠다. 이단 심문관에 관한 얘기를 듣고 아버지를 떠올렸다거나···.

'그런데 이 녀석, 어제 쉬러 가라는 말에도 이상하게 반응하지 않았어?'

어째 께름칙하다.

그냥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진 탓이라 치부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가 보다.

지금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보니, 자러 가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피곤하면 악몽을 꾸는 것이 일상이라도 되는 건가? 왜 나는 이걸 이제야 눈치챈 거지?'

애가 잠투정을 하면 왜 그러는지 이유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얼른 재울 생각만 해댔다.

원래 아이들이란 그렇다.

아무래도 괜찮은 얘기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잘도 조잘거리면서, 꼭 알려줬으면 하는 부분은 물어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교단에서 오늘 오후 중에 방문해도 되겠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녀석이 빤히 눈에 보이는 수법으로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서 물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둘만 있을 때 캐묻기로 하고, 일단은 그가 던진 화제에 맞춰 주어야겠다.

"허락하셨어요?"

"예. 세 시쯤에 방문해 달라고 답변 드렸습니다."

"에일리히 님께서 공작님을 빨리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저를··· 말입니까?"

슬쩍 찔러보듯 던진 말에, 세르펜스가 '그게 무슨 개소리지?'라는 물음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덮으며 반문했다.

"그럴 만도 하죠. 아무리 가문을 나왔다고는 해도, 귀여운 조카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볼 기회잖아요."

"하지만 교단의 규율상···."

"그것과는 별개죠. 아무리 규칙을 철저하게 지켜도, 감정만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엘프도 '세계수의 맹세'를 함에 있어, 감정을 건 맹세는 금기로 여기죠."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유지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는 듯,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진짜 이해했다는 건 아니고, 그런 척만 했다는 얘기다.

"···시온 경이 보시기에는 어떠셨습니까?"

"에일리히 님이요?"

"네. 어제 위리디아 님께서도 간단히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시온 경의 의견은 듣지 못한 것이 떠올라서···."

내가 먼저 운을 띄우기는 했지만, 그가 먼저 이단 심문관에 관해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유지스가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꺼리는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많이 불안한 모양이다.

"직업이 이단 심문관이다 보니 약간 서스···, 엄격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순수한 사람은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악숭이가 어째서 제온의 귀를 잘라 보내지 않고 다른 방식을 취했는가?' 따위의 서스펜스한 발언을 하기 전.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은 우리를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그리고 이건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 추측인데···. 에일리히 님께서 그동안 프라시더스 가와 완전히 연을 끊고 지낸 이유가 교단의 규율 탓도 있었겠지만, 행여나 공작님의 자리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더욱 그러신 게 아닐까 합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전대 공작을 포함해서겠지만, 그 양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세르펜스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목을 축이는 척, 내가 한 말들을 곱씹었다.

속으로 이단 심문관이 어떤 사람인지 분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참! 그리고 시온을 혼내기도 했죠."

"아, 기억납니다. 보고서에 분명···."

유지스는 그런 것까지 쓴 모양이다. 쓸데없이 상세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세르펜스의 안에서 이단 심문관의 평가가 조금 오른 듯했다.

'내 얘기에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더니, 왜 나를 혼냈다니까 괜찮게 보는 건데?!'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좋은 상황이다.

이런 사적인 감정보다 지금은 세르펜스를 안심시켜 놓는 것이 우선이다.

"혼난 주제에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무섭거나 나쁜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유지스의 말처럼 저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두 분 모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분명···. 아! 직접 만나기도 전에 이런 얘기를 물어본 것은···. 으음···,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이 아닐지···."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단 심문관의 사전 평가를 내리다 말고, 돌연 아차 하며 입가를 가렸다.

안절부절못해 하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그냥 편하게 좀 살지.

고작 이런 거로 '프라시더스 공작은 뒷조사 애호가' 같은 얘기는 안 나온다.

"궁금할 수도 있죠. 아니지, 궁금한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뭘 그런 것 가지고 실례니 뭐니 따져요? 어차피 에일리히 님은 공작님에 관한 소문들을 다 들었을 텐데."

"맞아요. 중요한 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거죠. 세르펜스 님께서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 관해 물어보셨다는 걸 알면 오히려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안 물었다면 그게 더 서운했을걸요?"

나와 유지스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르펜스를 우쭈쭈 달랬다.

"그렇다면야 다행입니다."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그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어째서 서운할 일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내게 슬쩍 보낸 것 정도?

하지만 그게 어디 그의 탓이겠는가.

'세르펜스에게 있어 혈연은 따뜻하고 끈끈한 정이 아니라, 차갑고 질척거리는 늪에 불과할 테니까···.'

더 이상 이단 심문관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에 세르펜스가 자리를 비웠을 때 공작저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에 관한 얘기가 오갔다.

가끔은 나와 유지스 둘이서 디저트를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달콤한 나날>에서 신작이 나왔다는 얘기 들으셨습니까? 초콜릿 파운드에 바나나 퓌레를 듬뿍 넣어 만들었다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듣기로는 특별 주문하면 바나나 퓌레 대신 다른 퓌레를 넣어주기도 한다나 봐요."

"하지만 초콜릿 파운드에 유자 퓌레는 좀, 안 어울리지 않을까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유자 퓌레로 주문을 넣었다는 것을···!"

세르펜스는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천천히 손을 놀려 우리와 식사 속도를 맞추며 귀를 기울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와 세르펜스는 집무실로 향했다.

유지스는 그동안 저택 안에만 있기 답답했다며, 세르펜스도 돌아왔으니 점심 먹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딱히 어디로 향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삼림이 우거진 산을 오르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공작저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르펜스, 어젯밤에 악몽 꿨죠?"

"···도대체가."

"그렇게 티를 내놓고 누구한테 뭐라 해요?"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앉는 대신, 세르펜스의 자리 앞으로 가서 책상을 짚고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다짜고짜 따졌다.

그러자 녀석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흘기듯 가늘게 떴다.

"어제 자러 가기 전부터, 악몽을 꾸게 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죠? 왜 말 안 했어요?"

"···말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은가."

"왜 달라지는 게 없···!"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를 치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누나와 함께 이불을 덮어쓰고 TV에서 해주는 공포 영화를 보고는 했다.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나를 누나는 태연하게 도닥였고, 그러면 이상하게 무서운 것이 싹 가셨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은 다 해놓고, 부모님이 오면 누나가 제일 먼저 달려나갔지만.'

그리고 거실에 이불을 펼쳐 부모님 사이에 누나와 나란히 누워 잠들면, 악몽도 무서움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세르펜스에게 그런 추억이 있었을까?'

그에게 있어 악몽이란, 함께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고행에 불과했을 거다.

"지금은 좀 괜찮아요?"

"덕분에, 이전보다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도, 그가 악몽을 꾸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완벽하게 방심했다.

"피곤하면 항상 그래요? 공작령에 처음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도 꽤 피곤한 상태였는데, 그때는 안 그랬잖아요."

"피곤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깊이 잠드는 쪽이 문제다. 그 당시 피곤한 건 정신뿐이었고, 신성력 덕분에 체력은 멀쩡했으니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더 피곤해지기 전에 자러 간 거고···."

그냥 이제까지 잠을 제대로 안 잤다는 얘기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고, 악몽이 무서워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가뜩이나 적게 자는 녀석인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 했네! 이걸 왜 눈치를 못 채?!'

세상에 사람이 잠을 자면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작에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펜스라서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무심코 지나친 것이 화근이다.

그도 결국에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천사다 명예 엘프다 뭐다 하면서 인외 취급을 해댔다.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린 인간이라는 것은 계속 상기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제가 오고 나서 악몽 꾼 적이 또 있어요?"

"작년 이맘때?"

"······."

심지어 악몽이 무서워서 아등바등 도망치던 녀석이 나 때문에 무리하는 바람에 결국 악몽을 꿨다고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이제라도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아니, 어제 눈치를 챘어야지!'

세르펜스를 키우면서 오늘만큼 나 자신의 부족함을 체감한 적이 없다.

"그럼 어제 신성력이라도 남겨두지, 그걸 왜 저에게 썼습니까?!"

"그야 아프면 안 되잖은가. 그리고 그편이 내게 더 이롭기도 하고···."

"세르펜스에게 있어 이롭다는 이렇게 괴롭다의 준말이라도 된답니까?"

"생각해 봐라. 어중간하게 신성력이든 체력이든 남겨서 자다 깨는 것을 반복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대로 못 일어나고 아침까지 잠드는 편이 훨씬 낫다."

"생각하긴 뭘 해, 인마!"

"···무릎 꿇고 손들까?"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골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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