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회
36. 공작님의 가족 상봉 (3)
사람은 당분이 떨어지면 성격이 날카로워진다던데.
그러고 보면 최근 녀석이 먹은 달다구리라고는 하루에 한 번, 작은 사탕 하나가 전부이지 않은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세르펜···!"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셈이지? 오늘은 일을 안 할 작정인가?"
세르펜스가 잠시 치워뒀던 서류를 다시 제 앞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자신은 일을 해야 하니 꺼지라는 소리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는 잠시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등산 갔다 돌아온 유지스와 함께 점심을 먹고, 또다시 일을 하다가….
어느덧 시간은 2시가 되어있었다.
-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세르펜스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그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잽싸게 문을 열어 시녀가 가져온 쟁반을 빼앗듯이 건네받고 문을 도로 닫았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어디로 향하는가 싶더라니."
"원래 간식 시간은 3시지만, 오늘은 3시에 손님이 오잖아요."
"그렇군."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달한 향기에 세르펜스가 내심 반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재빨리 책상 위의 서류들을 재배치하여, 차와 간식거리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드시게요?"
"일이 밀리기도 했고, 곧 손님이 와서 시간을 또 뺏길 테니···."
"어차피 시간 뺏기는 거, 한 시간만 더 쉽시다!"
"······."
"어허! '쉽시다.' 다음은?"
"···그럽시다."
이 자식이, 한 번으로 족할 것을 괜히 두 번 말하게 하고 있다.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이리로 옵니까?"
"그런데 이건 뭐지? 굉장히 단내가 나는데···."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달달한 냄새에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꿀 냄새에 이끌린 꿀벌처럼, 달콤한 향에 홀린 세르펜스가 티포트 덮개를 벗겨냈다.
"됐고, 빨리 응접실 문이나 열어요. 이건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니까."
"으음···. 알았다."
주전자 뚜껑에까지 손을 댔던 세르펜스는 그것을 여는 대신, 다시 덮개를 덮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오늘의 간식을 손에 거머쥔 내가 위풍당당하게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세르펜스가 문을 닫은 후, 쪼르르 나를 앞질러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하나부터 열까지 어린애 같아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 오늘의 메뉴는 핫초코와 스모어 쿠키입니다!"
녀석의 잔에 까맣고 진득한 음료를 채웠다.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아직입니다. 여기에 이 마시멜로를 넣으면 훨씬 맛있어집니다!"
쟁반 위에 놓인 집게를 들고 그를 저지하자, 세르펜스는 바로 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어서 빨리 넣지 않고 뭐하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단 심문관님에게 괜한 트집 잡지 않고,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넣어드릴게요."
"···정말 이러긴가?"
"빨리 약속해요. 다 식으면 마시멜로가 안 녹을지도 모릅니다?"
"으윽···! 치사하게 인질을 잡다니···."
"따뜻한 우유에 초콜릿을 녹인 음료에다가, 마시멜로를 넣고, 잘게 다진 초콜릿을 그 위에 뿌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으읏···."
이야, 이게 통하네?
힘으로 얼마든지 뺏을 수 있으면서, 녀석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노려봤다.
"선우는 그자에게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거지?"
"아이고, 우리 공작님께선 뭐가 또 이렇게 불만스러우실까? 제가 이단 심문관님 편만 들어줘서?"
"···장난치지 말고."
녀석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세르펜스의 가족이고, 세르펜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게 답니다."
"고작?"
"그리고 세르펜스가 한 번쯤은 진짜 가족의 정이 무엇인지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이미 선우에게서 충분히 받고 있으니, 더는 필요 없다."
그거라도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모든 정을 나에게서만 바라고 의지하고 있어서.
그래서 더 문제라는 것을 세르펜스는 모른다.
"프라시더스 가는 리벨론 가나 선우의 가족과는 다르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선우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은가. 선대 공작이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세르펜스는 제게서 마시멜로 하나 강제로 못 뺏는 사람이죠."
"그런 얘기가···."
"그런 얘기입니다."
그가 내 속을 들여다보듯, 두 눈을 맞추고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있었다.
"선대 공작만 유별나게 이상한 놈이었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무슨 근거로?"
"프라시더스 공작가처럼 긴 시간 동안 명맥을 이어 내려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선대 공작 같은 개새··· 였다면. 엄청나게 악명을 드높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전 한 번도 못 들어봤습니다."
"입막음을 잘한 거겠지. 아니면 연기를 잘했거나."
"그것도 정도가 있죠!"
한두 명이 아니라 대대손손 개차반이었다면 중간에 한두 명 정도는 삐끗할 만했다.
강한 신성력을 명분 삼아 반역을 일으키거나.
하다못해 균형이고 나발통이고, 권력을 잡겠다며 그 뛰어난 외모로 황제든 황태자든 꼬셔서 황가에 제 핏줄을 섞었어야 했다.
'세르펜스만 해도 잘못된 교육으로 엇나갔을 뿐, 보면 볼수록 여리고 순진한 구석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고···.'
개차반 같은 집안에서 세르펜스같이 순한 녀석이 갑자기 태어났다기보다, 선대 공작 개자식이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왔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듯했다.
얼마나 독하고 욕심이 많은 놈이었으면, 이단 심문관이 공작위를 양보하고 제 발로 교단에 들어갔을까.
"당신의 아버지란 작자는 나쁜 놈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르펜스의 뿌리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세르펜스도 그랬으면 하고요."
"···으음."
"그자와 세르펜스가 다른 존재인 것처럼, 이단 심문관님도 마찬가집니다."
"······."
"대답은?"
"···그래, 알았다. 선우, 당신의 말대로 하지."
내가 집게를 딱딱, 맞부딪치며 대답을 촉구하자 그가 마지못해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해서, 그자가 '그런' 인간이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보지 않고 평생 남남으로 지낸다 해도, 뭐라 하지 않을게요."
세르펜스가 그게 다냐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죽여도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 자. 따뜻하고 달달한 거라도 마시면서, 느긋하게 마음을 가라앉히시죠."
나는 따뜻한 주전자 속 음료를 내 잔에 따라서, 준비된 마시멜로 두 개를 전부 넣고 작은 종지에 담겨 있던 다진 초콜릿을 그 위에 솔솔 뿌렸다.
그리고 거의 식어버린 세르펜스의 잔과 바꿔 놓았다.
"당신은 정말···."
"제가 뭘요?"
뭔가 말을 하려는 줄 알았으나, 그는 흐린 말꼬리를 바로잡는 대신에 뜨거운 음료를 후후 불었다.
까만 핫초코 안에 새하얀 마시멜로가 천천히 녹아들었다.
세르펜스는 그것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돌연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두 개지?"
"이쪽 잔은 식기도 했고, 안 그래도 단 핫초코에 마시멜로까지 넣으면 제겐 너무 달아서···. 저도 단 걸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달면 속이 좀 메슥거리거든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어째서 이렇게 단 음료를 내오면서, 잔은 두 개지?"
"네? 그야 두 명이니까···. 어라?"
"차를 따로 내오지 않은 것은 손님이 왔을 때를 상정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시선은 접시 위에 놓인 쿠키로 향했다.
쿠키의 개수도 평소보다 묘하게 많았고, 하나하나 세어보니 정확히 짝수를 이루고 있었다.
"···들켰나 본데요?"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내가 주방에 무언가 언질을 주었으니 이렇게 나온 게 아니냐는 의문이다.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냥 평소와 마찬가지로 제가 먹고 싶어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정말로요!"
사실을 말했으나, 세르펜스의 집요한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만, 내가 없을 때도 이렇게 매번 간식을 챙겨 먹었나?"
"아뇨."
"······."
머쓱한 마음에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쿠키를 집었다.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자, 진득한 마시멜로가 폭신하게 치아를 감쌌다.
그렇다. 나는 마시멜로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뿐, 세르펜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 맞다.
'어차피 슬슬 들킬 때도 됐잖아?'
이제까지 들키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쭉 이어졌던 그의 식습관으로 인해 구축된 편견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진작 들키다 못해 동네방네 소문이 나고도 남았다.
"아무려면 뭐 어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깁시다!"
"···개새."
"앞에 '마새'는 어디로 간 겁니까?"
"그대의 양심이야말로 어디로 갔지?"
"이야, 이 집 쿠키 잘 굽네! 완전 쿠키 맛집이야! 세르펜스도 하나 드셔 보시죠?"
세르펜스가 눈으로는 여전히 나를 좇으며, 손을 뻗어 쿠키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녀석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맛있죠?"
"···그렇군."
자고로 옛 성현들이 말하길, 좋은 게 좋은 거라 하셨다.
우리는 달달한 쿠키와 그보다 더 달콤한 음료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시계 분침이 정각을 가리키기 10여 분 전, 접시를 모두 비우고 시녀를 불러 테이블을 치우게 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정각이 되자마자 이단 심문관의 방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정원에서 놀고 있던 유지스가 먼저 올라왔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제온이 이단 심문관을 안내하며 응접실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단 심문관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공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단 심문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단 심문관 역시 웃음을 띠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서로 격식을 갖추며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흡족···.
'···은 개뿔! 삭막해! 어색하다고!'
누가 봐도 가족이라는 것을 얼굴로 말해주고 있는데, 서로를 남처럼 대하고 있는 모습이란!
잘못 맞춘 퍼즐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말거나, 세르펜스와 이단 심문관은 웃는 낯으로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시온 경?"
"아, 네! 앉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다들 자리에 앉을 때까지 혼자 멍하니 서 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런 나를 세르펜스가 불러, 도로 자리에 앉혔다.
"이번 일에 협조해 주신 세 분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단 심문관이 나와 제온과 유지스를 돌아보며 하얀 벨벳으로 감싸인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나와 제온은 말할 것도 없고, 유지스도 일단 공작저에 의탁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대표로 그에게 건넨 듯하다.
"당장은 나눠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 세 분께는 제가 나중에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르펜스는 그것을 바로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선물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뜯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열어 보기라도 하지.'
벨벳 상자에 대한 미련으로 그것에 눈길을 주고 있을 때, 시녀가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차를 내어놓았다.
그러잖아도 달달함 콤보를 먹고 난 직후라 입안이 달았는데 마침 잘 되었다.
덕분에 상자의 내용물에 관한 관심이 한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