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회
38. 공작님과 평화롭지 못한 일상 (1)
지금이 위기의 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공작령도 내려갔다 왔지.'
이번에는 유지스도 관광을 겸해서 따라왔었는데, 암흑가에서 써먹지 못한 칵테일 제조 기술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유감없이 뽐냈다.
윈스톤은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고, 세르펜스는 내 잔에 든 알코올을 정화해버렸다.
세르펜스가 아직 윈스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일은 안 하고 뭘 그리 빤히 보는 거지?"
다시 수도로 돌아와, 오늘도 어김없이 공작저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세르펜스가 뭘 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르펜스는 유지스 앞에서 제게 애 취급당해도 상관없어요?"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할 생각이지?"
"아니, 그렇잖아요. 술 자체의 알코올을 정화할 수 있었으면 유지스가 칵테일 기술을 갈고 닦을 때···."
"일을 안 할 생각이라면 괜히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낮잠이나 자라."
···일은 안 해도 되는 건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일' 하니까 생각난 건데, 재상 자리는 왜 거절하셨어요?"
"잠시 보류한 거다."
"그거나 저거나."
이전에 말했던 대로 아르젠토 공작은 은퇴 선언을 하였다.
그의 나이가 있다 보니 아무도 그의 은퇴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았지.'
그러나 문제는 인수인계 과정에서 발생했다.
자문회 수장이야 재상직에 딸려오는 거라지만, 재상은 두 공작가가 번갈아 가며 맡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다.
그런데 그것을 세르펜스가 걷어차 버린 거다.
'일 중독자 세르펜스가 일거리를 마다하다니!'
나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왔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당대의 재상직을 수행했어야 할 전 프라시더스 공작이 단명한 탓에, 아르젠토 공작가에서는 안 그래도 2대째 재상직을 맡고 있던 판국이었다.
관례도 관례지만, 3대 연속으로 한 공작 가문이 권력을 쥐는 것은 권력을 고이게 하고, 그렇기에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자문회가 아주 뒤집혔었지···.'
어쩔 수 없이 현 아르젠토 공작이 좀 더 수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공작위를 계승 받기 위해 수도로 올라왔던, 아르젠토 소공작(48세)는 다시 조용히 아르젠토 령으로 내려갔다.
"자문회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제국의 힘은 강대하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도 있고, 대륙이 있기에 제국이 존재하며, 어딘가 한 축이 무너진다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으니. 언제 어디서 내 무력이 필요할지 모르기에, 아직은 그 위치에 설 수 없다고···."
"정말 그게 답니까? 그런 대외적인 말 말고요."
"내가 놀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바로 그겁니다!"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지."
세르펜스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막 던진 말에 원하던 대답이 돌아오니 어째 좀 낯설다.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재상이 된다면 낮 시간 대부분은 황궁에서 보내게 될 테고, 업무는 지금처럼 개인 집무실이 아니라 재상부에서 이루어질 거다."
그러니까 지금 세르펜스가 하는 말은 근무지에 사람이 많아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싫어서 거절했다는 소리였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렇게 되면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제가 뭘 어떻게 봤다···고···. 잠깐만요, 세르펜스. 방금 뭐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당신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그···. 신발을 벗고 양다리를 의자에 올려, 포개어 앉는 이상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게 될 것 아닌가?"
나는 양반다리를 풀고 신발을 신고 바른 자세로 앉아 보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내 몸은 불편함을 호소하였고, 불가항력의 본능에 의해 도로 양반다리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와 골반의 건강을 위협하는 자세지만 알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세르펜스가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신성력 만만세다.
"그것도 큰 문제긴 한데, 그거 말고요. 저 말고, 세르펜스 말입니다, 세르펜스!"
"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 줬으면 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설명을 생략해버렸다.
"세르펜스, 이제 연기하는 게 불편···. 아니지? 이제는 연기 안 하는 게 편해진 겁니까? 완전히?"
"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녀석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드디어 내 노력이 빛을 발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말하던 녀석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실실거리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만 웃어라."
세르펜스가 무안해졌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거리듯 말했다.
"기뻐서 그래요, 기뻐서. 예전 같았으면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어떻게든 재상 일까지 소화하려고 아득바득 굴었을 거 아녜요? 자신이 떠안을 수 있는 짐은 모조리 떠안으면서."
"그랬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미뤘죠! 그 이유가 비록 대인관계 측면에서는 올바르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게 저는 정말···."
"그만하지?"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보다.
큼큼, 헛기침하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성검의 주인]에서 타···, 세르펜스는 재상직을 받아들였겠죠?"
"아르젠토 공작을 죽여서라도 빼앗았겠지."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요."
"아르젠토 공작을 죽여서 빼앗았을 거다."
"더 악화됐잖습니까!"
하나,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많이 변하지 않았나. 선우, 당신 덕분이다. ···고맙다."
"갑자기 뭡니까? 낯 간지럽게."
"그냥. 내가 선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있나 싶어서."
"아마 없을걸요? 비꼬는 식으로 사용한 적은 있어도."
그런 얘기를 꼭 지금 꺼내야 했느냐고 힐난하는 눈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애가 유치원에 들어가 처음 맞이한 어버이날.
그 작디작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겨우 접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며, 키워주셔서 감사하다 말해주는 듯한 감동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이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면,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어 재끼고 '우리 애가 이 만큼 자랐어요!'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고로, 세르펜스는 내게 좀 더 감사해야 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
"효도 받고 싶다는 생각?"
"······."
세르펜스의 눈이 냉정함을 되찾았고, 차가워진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향했다.
감상적인 기분을 한 호흡 만에 날려 보낸 그는 검을 휘둘러 적을 처치하듯, 펜을 휘갈겨 서류를 처리해 나갔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졸음이 찾아왔다.
"지금쯤 황태자 전하는 무진장 구르고 있을 텐데, 제국은 평화로워서 좋네요."
나는 일을 하지 않을 거라면 잠이나 자라는 상관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책상에 뺨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음···, 그래. 며칠 전, 선우가 말했던 그 도적단을 해치웠다는 모양이고."
"그래요? 그게 두 번째 무구를 얻기 위해 테라룸 왕국으로 향하는 도중 있었던 일이니까···. 너무 늦잖아!"
잠기운이 싹 달아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 8월입니다, 8월! 그런데 이제야 뭘 어쨌다고?"
"그걸 어째서 나에게 따지는 건가?"
"대체 뭐가 문제죠? 제국에서 지원 빵빵하게 잘 넣어주고 있는데!"
시기상으로 진작 테라룸 왕국에 도착해서 두 번째 시련을 받고 있든, 끝냈든 해야 했다.
절박함이 부족해서 첫 번째 시련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나?
아니면 악숭이들이 뭔가 저지른 건가?
"게다가 시련받으러 다니는 동안에는 모든 여정이 시련이라는 개똥 같은 이유로, 기차 같은 날로 먹는 이동 수단은 금지잖습니까?! 지금 나랑 장난해?"
"음···."
"가뜩이나 두 번째 시련은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노가다 시련인데···!"
드워프 사도들은 지혜의 시련이라 칭하였지만, [성검의 주인]을 읽는 독자들은 그것을 인내 혹은 육체의 시련이라 불렀었다.
그 시련은 시련을 받기 위한 장소를 찾는 것부터 시작되는데, 드워프 사도가 내준 힌트를 바탕으로 단서를 찾고, 그 단서를 통해 또 다른 단서를 찾아서···.
'뺑뺑이지, 뺑뺑이.'
더군다나 사실 최종 목적지가 출발지점이었다는 뻔한 클리셰로, 복장을 뒤집어놓는 전개가 이어졌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그 덕분에 라드라바의 유물을 찾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얻는 것 하나 없이 고생만 주야장천 할 게 분명하다.
"올해 안에 모든 시련을 끝낼 수 있긴 하려나? 것보다 푸로르는? 푸로르가 합류한 건 두 번째 시련 이후였는데? 안 늦었으려나?"
"안 늦었다."
"세르펜스가 어떻게 확신합니까?"
"이미 합류했으니까."
"···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멀뚱멀뚱 세르펜스를 바라보자 그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진정하고 앉으면 얘기해 주겠다는 뜻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태자가 큰 도시에 들릴 때마다 자신의 가족들과 약혼녀. 그리고··· 나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마 도적단에 관한 일도 다음 편지에 적혀 있겠지."
[성검의 주인]에서도 휴마누스가 편지를 부치던 장면이 나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친우의 자리를 자신이 뺏은 것 같아서, 차마 세르펜스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못했던 거로 기억한다.
"악마 숭배 세력에게 홀로 쫓기는 사람을 구했다고 하였다. 그자를 구할 당시, 일시적으로 신체 일부를 짐승의 것으로 바꾸는 기묘한 능력을 사용했다고 쓰여 있었으니 아마 확실할 거다."
마왕이 [성검의 주인]에 해당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 합류할 동료인 그녀를 습격했고, 그게 또 어찌어찌 흘러가 휴마누스 일행과 만나서 예정보다 일찍 합류하게 된 건가?
이런 걸 보면 인연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만약 유지스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으면 그녀도 위험했으려나?'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인제야 하는 겁니까?!"
"편지에 의하면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 자신의 동료가 며칠째 돌보고 있는 중이라 적혀 있길래."
"네?"
"하지만 이번 도적단 일을 해결할 때,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일행의 수가 넷이었다는 얘기가 있었으니 말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녀가 죽을까 봐, 내게 말을 안 했다는 소리였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지, 지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러지 않아도 마왕 또한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잖은가. 그래서···, 으음···. 야, 야옹?"
변명펜스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자진 납세를 해왔다.
"고양이 소리만 낸다고 제가 다 용서해 주리라 생각하신다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미야옹···?"
녀석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더욱 사실적인 고양이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인간의 존엄성과 당연히 가져야 할 자존감은 어디에다 팔아먹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대모사의 문제도 아니거든요? 무릎 꿇고 손들어도 소용없으니까, 신발 도로 신어요!"
양심이 출타한 세르펜스는 그럼 대체 자신이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탓이니, 어디 가서 얘기도 못 하겠고, 아주 환장하겠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엄청나게 훈훈하지 않았어?!'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일이라더니. 그것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이야!
"편지!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내 놓았다. 드워프 사도들에게 그자가 오면 전해달라고 하였으니, 무사히 전달될 거다."
"······."
녀석이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무슨 편지를 보냈는지 궁금하긴 해도,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사과를 듣지 않고서는 절대로···.
"선우···.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다 얘기할 테니, 화 풀어라. 제발···."
"···알았어요. 약속 꼭 지켜요?"
사과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