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05화 (205/925)

205회

40. 공작님과 실종 사건 (10)

우리가 도착한 레클뤼턴 령은 수도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려면 꼬박 12시간은 족히 걸린다.

왕복으로 따지면 최소 24시간이다.

한시가 바쁜 지금, 그렇게나 긴 시간을 길바닥에 내버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거' 쓰면 쓸수록 정말 편리하고 좋네요."

유지스가 옷 가게로 위장한, 암흑가와 연결된 게이트가 있는 건물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녀가 말한 '이거'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년에 '그곳'을 정리하고 나면 더는 이용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일시적인 편리함에 불과하니까, 너무 익숙해지진 마세요."

없어도 잘 살았으면서,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나면 없이는 못 산다.

나는 아직도 엘리베이터와 스마트 폰이 그립다.

"알다마다요. 단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마법이 침략 따위에 이용되는 바람에 그대로 사장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에요."

"그러게나 말입···, 어라? 그게 300여 년 전 일이니까···. 유, 리디아라면 예전에 이용해 보셨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나는 오랜만에 바스툴 왕국용으로 썼던 그녀의 가명을 꺼내 들며 그것을 질문했다.

"당시에는 인간 국가 전반에 걸쳐 전쟁이 활발했던 시기라서요. 저를 포함한 모두가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을 최대한 지양했고, 국가적으로도 외부와의 교류 자체를 최소한으로 제한했었거든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법진을 구동하려면 마법사가 필요하잖아요."

"아, 그런 문제가···."

이 세계에서 정령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엘프와 혼혈 엘프뿐이다. 혼혈이라고 해 봐야 고작 1세대까지가 한계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엘프가 선천적으로 세계수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계수의 영향력이 미치는 아르케 숲에서 그냥 숨만 쉬어도 그 기운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몸에 스며든다.

'그게 정령을 이 대륙에 소환해 낼 수 있는 전제 조건이지.'

엘프들은 세계수의 기운이 가득한 자신의 육체를 매개 삼아, 정령을 불러들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세계수의 맹세를 어겼을 때, 더는 정령을 소환해 낼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이유였다.

아무튼 결론은 이거다.

엘프들은 몸 안에 자리한 세계수의 기운 덕분에 정령들과 소통을 할 수 있어졌지만, 그 외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그게 엘프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다크 엘프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지만···.'

마나를 담을 그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린 나이에 세계수의 맹세를 남발하고, 기어코 그것을 어길 만큼 싹수가 노란 엘프는 없다.

자식을 마법사로 만들기 위해, 아르케 숲 밖으로 원정 출산 및 육아를 감행하는 엘프도 없다.

사실상 엘프가 마법을 익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크 엘프가 된 뒤 악마와 계약하여 그들에게 실시간으로 마기를 공급받으며, 그것을 흑마력으로 치환하여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

그깟 마법 좀 쓰자고 영혼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악마와 계약하는 건 미친 짓이다.

심지어 넝마 쪼가리나 다름없게 된 영혼은 계약을 극도로 불리하게 만든다.

보통의 계약자가 '을(乙)'입장이라면, 다크 엘프의 경우 '병(丙)' 정도가 아니라 '계(癸)'까지 추락한다고 보면 된다.

"저기, 그런데···. 있잖아요?"

"네, 말씀하세요."

"두 분께서는 대체 언제쯤 화해하실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요?"

유지스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어투로, 어색해 죽겠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글쎄요? 저는 화 안 났는데요? 그건 저 말고 리디아의 왼쪽에 있는 페르센트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지스와 마찬가지로 가명을 사용 중인 세르펜스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에게 시선을 주자, 녀석은 고개를 휙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저거 봐요."

"어련히 시온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따라오겠다 하신 거려니 생각하고, 제가 그 뜻에 동의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시온이 잘못 했어요. 페르센트가 시온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걱정을 덜 하도록 따라온 거 아닙니까? 보이는 곳에서 공격당하면 막아주면 되고, 다치면 바로 치료할 수도 있고. 저 녀석이 바란 거라니까요?"

"지금은 별로 바라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다.

깊숙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고집스럽게 꽉 다물린 세르펜스의 입술이 보였다.

불만이 가득한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나를 데리고 다닐 계획을 세웠던 건 틀림 없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날이 잔뜩 서 있는 거지?'

슬슬 악마가 나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긴 해도 지금보다는 앞으로가 더 심각하다.

악숭이가 당장 억지로 악마를 소환해 내려 한들, 제물만 더럽게 많이 소모될 뿐.

악마가 기르는 애완동물이나 겨우 소환해 낼 정도려나?

'설마 이 자식, 나 몰래 준비해 둔 게 더 있나?'

그거 말고는 없다.

이 녀석, 분명 뭔가 있다. 나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음이 확실하다.

유지스도 세르펜스를 미심쩍다는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근데 우리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지 않아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정령에게 부탁해서 주변을 수색하는 중이긴 하지만, 이런 식이면 효율이 떨어지죠. 그런데 두 분이 이러고 계시니···."

그녀가 좌우에 있는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대로 된 효율을 내려면 그녀의 말마따나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내 기준에서는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유지스와 세르펜스는 나름의 방식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범위가 겹쳐져 있는 상태.

꼼꼼하게 살피기 위함이라면 나쁘지 않은 방식이지만, 넓은 범위를 수색할 때는 좋다고 말하긴 힘들다.

"페르센트도 이제 그만 시온을 용서해 주세요. 반성···하는 기미는 없지만, 따지고 보면 페르센트의 잘못도 있어요.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어떻게 그런···."

세르펜스를 따끔하게 혼내며, 그와 동시에 나를 까는 듯했던 그녀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말만 멈춘 게 아니라 발걸음까지 멈추고 느닷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오해 거리를 만드신 건가요?"

글쎄다. 뭐가 되었건 유지스가 만든 오해만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녀석이 내게 붙인 설정은 그냥 귀여운 수준이다.

다만, 내 동의 없이 그런 계획을 꾸몄다는 사실이 괘씸할 뿐.

같이 가달라고 부탁만 했어도 기꺼이 응했을 텐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어딜 가든 반드시 데리고 다녀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처럼 보이게끔···."

"시온은 그분의 사자이니, 맞는 얘기잖아요."

남들 앞에서 신의 사자라는 말을 떠들어 시선을 집중시키는 대신에, 그녀는 신 룩스메아를 '그분'이라 칭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요, 저 녀석은 저를 좀 더···.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제게 자꾸 고결한 성자 같은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다고 해야 하나?"

"페르센트가 보는 시온이 그런 사람인가 보죠."

"······."

그것도 크게 틀린 말 같지 않아서 무섭다.

"아무튼요! 녀석은 저를 여행에 동행해도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포장하고, 제가 그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있다, 이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따라오신 것만 봐도, 사실과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은걸요?"

유지스의 말이 끝날 때마다, 세르펜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내가 앓느니 죽지.

"결론은 서로서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거잖아요. 어서 상대방의 뜻을 헤아려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과하시고, 화해하세요."

그녀가 가운데에서 나와 세르펜스의 손을 잡아당겨 악수를 시켰다.

세르펜스는 내키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내 손을 맞잡았다.

친구와 이런 식으로 싸운 것이 처음이다 보니, 먼저 화해를 청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까 자격이 없다느니, 그런 소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세, 페르센트를 비난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 저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뒤에서 그런 모략을 꾸미니까···."

"······."

"그렇다고 탓하려는 게 아니라···. 오늘 이렇게 따라온 것도 그거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정말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알잖아요?"

그에게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녀석은 조금 쭈뼛거리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미안하다. 당신의 뜻을 무시하고 멋대로 함께 다닐 계획을 세우거나, 무작정 따라오지 말라고 얘기해서···. 내가 잘못 했다."

"알면 됐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줄게요. 그래도 앞으로는 미리 얘기라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리 말한다면, 나와 함께 해 줄 텐가?"

"당연하죠!"

내가 시원시원하게 답하자, 녀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도 제멋대로였던 자신을 반성하는 걸 테다.

"화해하니까, 보기 좋네요. 그럼 저는 다른 곳을 돌아보고 올 테니까, 그동안 사이좋은 친구 사이로 돌아와 있어야 해요?"

악수를 한 채 서로에게 사과하고 용서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유지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넵!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잘 돌아다니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페르센트는요?"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우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찾거든 먼저 들어가지 말고, 다시 여기에서 모이기로 해요."

유지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 몸을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건물 위로 사라져 버렸다.

"그럼 우리도 일단 이동하죠. 솔직히 지금 창피해서 자리를 빨리 옮기고 싶어요."

"···동감한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길 한복판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세르펜스가 나를 챙겨 들고 가까운 골목으로 휙 몸을 던졌다.

마치 달리는 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것처럼 주변 건물과 사람들이 시야 뒤편으로 빠르게 지나쳤다.

좁은 길을 지나, 다시 큰 대로변에 도착하고 나서야 녀석은 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시온이 먼저 내게 요청한 사항이다."

"누가 뭐래요? 지레 찔려서 변명하긴?"

녀석이 끄응 소리를 내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바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쭉 걸어 다닐 겁니까?"

"마차를 대여할 거다."

내 질문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정확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달려달라고 하면 마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마차만 빌리고, 내가 몰면 되니 상관없다."

"마차도 몰 줄 압니까?!"

내 질문에 만능펜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공작씩이나 되어서, 그런 건 왜 배운 거지?

내가 살던 세계에서 대기업 회장님이 비싼 외제차나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취미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마차를 몰고 다니는 공작님은 좀···. 이상하잖아?

"마차라는 게 아무리 싸구려라도 기본적으로 비싼 물건인데, 마부도 없이 선뜻 빌려주려 할까요?"

"그럼 그냥 사면 될 것 아닌가?"

세르펜스의 입에서 어째서 그게 고민거리가 되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이래서 돈 많고 잘 사는 놈들이란!

'옆에 꼭 붙어서 같이 누려야지,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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