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회
40. 공작님과 실종 사건 (13)
"뭐? 서언~물?!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어처구니가 긴급 탈출해서 나만 두고 지구로 귀환해 버린 것만 같다.
"진정해라."
"세르펜스는 또 왜 이렇게 침착합니까?! 저 안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 들었잖아요? 근데 그딴 걸 두고, 뭐? 선물? 누가 마왕 개새끼의 따까리 아니랄까 봐 개소리를 아주 기똥차게 해대네!"
세르펜스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붙들었다.
가만히 두면 내가 튀어 나가서 악숭이 놈의 멱살이라도 잡아채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방금 그 목소리 들었어?"
"세르펜스라면 분명···."
지하실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스 그 양반은 싫지만, 내가 세르펜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그가 왜 그리도 기분 나빠했는지 이해가 간다.
'자기들이 뭔데, 주제도 모르고 세르펜스의 이름을 입에 담아? 감히?!'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인데 늦어도 한참 늦었다.
"키, 킬킬킬···.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군."
악숭이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놈의 기분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왕 개새끼의 따까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면전에서 숭배 대상을 모욕했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하지만 놈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어?"
이상한 일이다.
기분이 상하고 말고를 떠나서.
'왜 나타난 거지? 우리가 왔다는 걸 알았으면 이 계획은 포기하고, 꽁무니를 빼고 목숨이라도 보전해야 하는 거 아냐?'
하다못해, 우리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선빵이라도 날렸어야 했다.
어차피 악숭이 놈들에게 이 뒤에 있는 사람은 도구일 뿐이고, 우리는 놈들에게 있어 커다란 장해물이니까.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분명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오해가 있었나 본데, 내가 말한 선물이라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 쓰레기들을 치우기 좋게 한데 모아주었다는 얘기지."
친근한 척 구는 말투가 되레 역겹다.
지금, 놈은 세르펜스에게 저들을 죽이라고 종용하고 있다.
세르펜스에게 타락하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마왕 그 새끼도 참 어지간하네.'
세르펜스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할 텐데도, 자꾸만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안달이다.
반대로, 그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여 똑같이 뒤통수를 후리기 위한 준비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왜, 있잖은가.
추진력을 얻은 것은 무릎을 꿇기 위함이라고. ···반댄가?
'어느 쪽이건 거절한다, 이 새끼야.'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 삶 속에서, 그가 얼마나 허망함을 느끼며 무너져내렸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읽었다. 분명히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삶에서 그가 타락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죄다 죽여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라고?"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군."
"이상한 노릇일세? 난 전혀 안 통하는데. 그딴 거보다 너희 악숭이들이 사라지는 편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지 않아? 세계평화를 위해 대륙에서 꺼져 줄래?"
저 안에 있는 자들이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극악무도한 놈들이라는 것은 아까 들었던 대화로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세르펜스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면 안 하느니 못하다.
저들은 그대로 죽으면 그만이라지만.
'그럼 세르펜스는 어떻게 되는데?'
고통스러워 할 것이 뻔하다.
죄악감에 짓눌려 제 발로 깊은 무저갱 속으로 걸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붙잡으라고? 그의 부모처럼 필요악이라도 운운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결단코,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참 거지 같은 문제를 가져왔네.'
정당한 방식으로 처분을 내리고자 이번 일을 공론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세르펜스에게 그들을 직접 처단하라 할 수도 없다.
어떤 방법을 취하던 세르펜스는 상처를 받을 테니까.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그래, 그랬었지. 그들로 하여금 프라시더스 공작의 치부를 들추고, 그의 명성을 실추시키려 했지. 어디 그뿐인가? 당시의 일을 속에 담아두고, 복수를 위해 납치까지 자행했다는 말도 하기로 했었는데···. 그 얘기도 들었나?"
"이, 미친···!"
이놈들에게는 정도라는 것도 없는 건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끔찍하다. 더는 듣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위치가 너무 좋지 않다.
좁은 층계.
이래서는 세르펜스가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유지스가 화살을 날린다 해도, 놈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을까?
더군다나 우리는 아래에 있고 놈은 위에 있다.
'어쩌면 놈이 하는 말에 사로잡혀 버린 걸지도.'
놈이 하는 말은 전부 개소리다.
그러나 우리는 놈이 나타나기 전, 가해자 주제에 자신을 약자라 칭하며 피해자에게 죗값을 전가하려는 무리를 마주했다.
그 누가 저들이 사는 세상을 지켜야겠다는 말을 선뜻할 수 있을까?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세르펜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유지스는 놈에게 활을 겨누고 있기는 했으나, 시위를 당긴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손에 납치됐었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럼 다들 우리가 꾸며낸 거짓말이라 오해할 것 같아서 말이지. 우리는 그저 진실을 밝히는 것뿐인데, 그러면 우리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놈은 그렇게 말하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혼자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이제는 무산된 계획이지만."
그 한마디에 아득하게 멀어져가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처음부터 대륙의 존재들은 지킬 필요가 없는, 추악한 자들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으니까. 정말 지긋지긋하고 신물 나지 않나?"
굳이 이딴 방식으로 알려주려 하지 않아도, 세상이 혹독하다는 것을 세르펜스는 이미 알고 있다.
견디기 힘겨울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것 또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이딴 건 노땡큐다.
"지금의 대륙은 정말 환멸 나는 세상 아닌가?"
"뭐래? 지금 님이 하는 짓거리가 더 환멸 나거든요?"
"킬킬, 그건 사과하지."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다.
얄밉다 정도가 아니라, 한 대 후려치고 싶어지는 웃음이다.
"간악한 룩스메아의 사자여. 이 대륙이 정녕···."
"아닌데?"
"···뭐?"
놈이 사이비 교주처럼 양팔을 들어 올리며 무게감을 잡고 입을 열었다가, 내 답변에 순간 멈칫했다.
"간악한 룩스메아 아니라고. 걔가 좀 얼빠진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간악하고 뭐 그런 애는 아니야."
아마도.
"······뭐?"
"댁네 테네뭐시기보다는 낫다고. 어디서 제대로 신격도 갖추지 못한 덜떨어진 머저리가 대륙을 넘봐? 신이 어디 쉬워 보여?"
"대, 체···, 당신은···?"
갑자기 악숭이 놈이 주춤하며 반 보 뒤로 물러났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상대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분위기다.
흐름이 끊겼다.
저렇게 쪼는 모습을 보였으니, 놈이 하는 말은 공포를 잃었다.
"하···, 하하, 크큭, 크크크크키키킬킬킬, 낄낄낄!"
기괴한 웃음소리.
기름칠 안 한 오래되고 녹슨 기계를 억지로 움직이려 할 때 들리는 쇳소리 같다.
소름 끼치고 끔찍하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래, 어떤 존재든 간에, 지금은 무력한 인간의 신체에 갇혔으니."
내뱉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껏 웃음소리로 다시 만들어낸 음산한 분위기가 도로 깨져버렸다.
"우리의 신이 신격도 갖추지 못한 머저리라고? 그러는 신격을 제대로 갖춘 네놈은 어떻지?!"
어쩌고 자시고, 그딴 거 갖춘 기억은 없다.
오해다.
"제약에 묶여,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아니다, 원래 아무런 힘도 없다.
"마왕님은. 우리의 테네브리오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꿰뚫고, 완전한 신이 되는 것을 억누르고 계심이 분명하다! 이 땅에 직접 강림하여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것도 완전한 오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그 자식은 신이 못 돼서 안달 난 놈이다.
신이 될 수만 있다면, 대륙이고 마계고 몽땅 제물로 바쳐야 한대도 좋다고 수락할 놈이다.
'잠깐만, 신이 대륙에 개입하려면 제약 같은 게 있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룩스메아는 툭하면 대륙에 성검을 내렸다.
어디 그뿐이랴?
나를 세르펜스에게 던져준다거나, 심지어는 시간까지 만지작거렸다.
'···이 악숭이 놈, 이제 보니 완전 허당이잖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놈이다.
아니면 뜻밖에 룩스메아가 열일 중이었다거나?
'열일메아라니, 어째 영 느낌이 안 오는데···.'
그냥 저 악숭이 놈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라 생각하자.
애초에 내가 신이라는 오해를 한 것만 봐도 엉터리다.
엉터리라는 단어를 빚어 만든 존재가 바로 저놈인 거다.
"룩스메아가 해 준 것이 대체 뭐가 있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
음···, 시간 조작?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고, 입이 험할 뿐인 존재를 신의 사자랍시고 내린 것이 전부 아닌가?"
성검의 존재는 아예 없는 셈 치기로 한 모양이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충분하긴 개···, 응?
속으로 열심히 토를 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앞이 아니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르펜스였다.
그는 내 어깨를 힘있게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힘이 없어도, 그는 제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자주 말을 이상하게 하여도, 그 속에는 저를 향한 걱정과 따스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그는 존재만으로도 제게 있어 구원이며 신의 선물입니다."
입이 험하다는 얘기를 말을 이상하게 한다고 바꿨을 뿐이지 부정할 의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보다는.
'구원이라든가, 신의 선물이라든가, 그건 너무···.'
살면서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이다.
너무 민망한 얘기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를 지경이다.
'얘가 진짜! 남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나이 (스물) 다섯. 보호자가 한창 커 보일 나이다.
아빠가 회사에서 잘리고 집에서 놀고 있어도, '우리 아빠는 맨날 맨날 저랑 놀아줘요!'라며 뿌듯해하며 자랑하고 다닐 때다.
어쩔 수 없으니,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섰다.
"제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신 룩스메아님을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돈이며 능력이며 얼굴이며. 나보다 모자란 것이 하나 없는 놈이 과분은 무슨 놈의 과분?
저 바닥을 기는 자존감은 대체 어떻게 해야 끌어올릴 수 있을는지···.
돌아가자마자 아주 따끔하게 혼내줘야겠다.
"들었냐? 그쪽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간에 우리 공작님께선 대륙을 등질 생각은 없으니까, 마왕 새끼는 꿈 깨라고 전해 달란다!"
내 말이 무슨 자기네를 위하는 소리로 들리기라도 한 걸까?
세르펜스가 와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말을 아끼며 침묵을 지키던 놈들이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대륙을 위해 하는 것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숭이가 하는 말을 따르려 했던 주제에.
어째서 아직도 자신들이 대륙의 일원이라 생각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천박한···!"
"그러는 네놈들은 고풍스러워서 사람들을 납치해서 가둬놓고 사상 주입을 시키냐?"
"저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놈들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 그래? 그럼 처음부터 자진해서 악마 숭배하는 놈들의 편에 섰다는 거네? 이야,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뭐?"
"원래부터 악숭하던 놈들이라, 세르펜스가 자신들을 납치했다던가 어린 시절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려 했다는 얘기잖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악숭하는 놈들뿐이었네!"
뒤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개중에는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느니, 협박을 받았다느니, 고문당할 것이 무서웠다느니, 그런 소리를 해댔다.
죄송하다는 말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래, 무서울 수도 있지. 눈앞에서 사람이 고문당하는 광경을 보았을 테니, 두려웠겠지.'
하지만.
"···반성을 했다면, 지금 그렇게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조용히 닥치고 있어야지.
지금도 누가 더 잘못했네, 자기는 하지 않았네 하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우리가 서 있는 층계 복도까지 윙윙 울려 퍼졌다.
내가 뱉은 말도 그 속에 묻혀, 저들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