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회
40. 공작님과 실종 사건 (14)
'거, 되게 시끄럽네! 문을 확 닫아버릴 수도 없고···.'
좁은 통로라는 여건상, 공격이 날아왔을 때 피할 공간이라고는 뒤에 있는 지하실뿐이었다.
지금 저렇게 웅성거리는데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놈이 없는 거로 봐서, 감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척 여론몰이를 할 계획이었으니, 당연한 건가?'
협박하는 놈이 입을 열어 봐야 어디까지나 협박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꺼낸 얘기라면?
자연스레 공감하게 되고, 어느 순간 상대의 말이 곧 자신의 의견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어쩌면 수틀렸을 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걸지도···.'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지금 안쪽에서는 자신들을 선동하던 '라크'라는 자를 매도하며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못난 사람들.'
당장은 난데없이 뒤에서 공격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자.
"이렇게까지 기회를 줬건만···.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권주나 벌주나, 많이 마시면 취하는 똑같은 술이지."
남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기만 하면 고주망태 꼴 못 면한다.
최소한 거부 의사라도 표해 봐야, 그것을 피할 기회라도 생기는 법이다.
"킬킬킬, 후회하게 될 것이다."
와, 어쩜 이렇게 판에 박힌 악역이 다 있담?
웃음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계획을 줄줄이 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의의 편에 타락할 것을 권한 뒤 거부당하고 나서 뱉는 멘트까지!
완벽한 삼위일체를 그리고 있었다.
"누가 할 소리? 이제라도 무릎 꿇고 착하게 살겠다고 싹싹 빌어보는··· 게···."
악숭이 놈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불길한 미소였다.
그것을 감지한 건 유지스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동시에 악숭이 놈이 손가락을 퉁겼다.
화살은 공기를 가르며 눈 깜빡할 새에 긴 층계를 거슬러 올라갔으나, 반투명한 흑색의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유지스는 자신의 공격이 막힐 줄 알았다는 듯, 곧장 새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기며 정령을 소환했다.
'잠깐만, 손가락을 퉁기는 거로 마법이 나올 리가 없잖아?'
나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 벽 뒤에 악숭이 놈이 더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조금 전 손가락을 퉁기던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
- 콰광! 우르릉!
바닥이 흔들리고, 머리 위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지진 마법 같은 건가?"
"화약이다."
세르펜스가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당겨 자신에게 기대게 하며 차분하게 답변했다.
대규모의 마법을 즉석에서 구현하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법진을 미리 설치해 놓았다면 우리가 눈치챘을 거다.
'지금처럼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거나, 해체하고 내려왔겠지.'
원하는 순간, 원하는 범위에 맞게. 원하는 파괴력으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화약을 설치해 둔 모양이다.
설치만으로 돈이 드는 마법진과 다르게 화약은 사용하지 않으면 다시 파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으니, 여러모로 머리를 썼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산 채로 매장당하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침착 합니-···."
- 콰앙!!
"─까악! 왁!"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아까보다 더 큰 진동이 일었다.
이번에는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폭발이다.
악숭이 놈이 만들어 낸 화염구와 유지스가 쏘아낸 물의 기운이 담긴 푸른 화살이 맞부딪히자,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터졌다.
불과 물이 만나며 피어오른 수증기는 거대한 충격파에 옅게 흩어졌다.
만일 세르펜스가 뒤에서 받쳐 주지 않았다면, 그 충격파로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
"괜찮다, 진정해라.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절대로 당신을 죽게 하지 않겠다고."
굉음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진 탓에, 바로 귓가에서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 왔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얘기하듯이. 그렇게 희미하게 들려 왔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는 그의 숨결과 내 어깨를 잡은 그의 굳건한 손. 등에 맞닿은 단단한 신체.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세르펜스와 떨어진 줄 알고 허둥지둥 당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아뇨. 들려요. 잠깐 귀가 좀 먹먹해서···. 그런데 계속 가만히 서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이러는 동안에도 자잘한 진동과 폭음(爆音)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일한 출구는 악숭이가 단단히 틀어막은 상태.
치사하게 두 명이서 번갈아 가며 마법을 캐스팅해대는 통에 유지스가 연거푸 화살을 쏘아대도 좀처럼 뚫릴 기미가 없어 보인다.
"기왕이면 내 노고도 알아줬으면 한다."
"예?"
그러고 보니, 계속해서 진동이 느껴지는 것치고는 처음에 돌가루가 조금 떨어진 것 외에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빛의 장막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보호 결계다.
그리고 결계 너머로는 잔뜩 갈라진 돌무더기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범위가 너무 넓은 데다가, 화약이 떨어지고 나니 마법까지 쏘아대는군."
세르펜스가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넓은 범위라는 건 뒤쪽의 지하실까지 포함한 얘기일 것이다.
그는 방음을 위해 특히 두껍게 만들어 놓은 천장의 무게를 버텨내며, 온갖 마법 공격까지 막아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유지스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연신 활시위를 당기며 물었다.
화살집에 넣어 둔 화살은 이미 다 쓰고,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있는 화살은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여 정령의 힘을 응축시킨 기의 화살을 쏘아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두 다리는 발목까지 바닥에 푹 박혀 있는 상태였다.
엘프 특유의 턱없이 가벼운 체중 탓에 충격파로 밀려나지 않기 위함이리라.
세르펜스에게 기대고 있는 나와 달리, 그녀는 순수 근력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큰 소란이 터졌으니, 기다리면 근처 교단이나 영지 소속 경비대가 도착할 겁니다."
"이대로, 버티···, 자고요?!"
"네. 저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금처럼 계속 붙들어주십시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악숭이 놈이 꽤나 초조해 보인···, 보···.
'하나도 안 보이네!'
눈앞에서 뭔가 펑펑 날아오고, 터지고, 바닥이 진동하며, 몸을 밀어내는 강한 충격파가 엄습했다.
이런 와중에 저 위에 있는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보겠는가.
하지만 세르펜스가 어째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알겠다.
만일 유지스가 맞대응을 하지 않고, 아예 세르펜스의 신성 결계가 정면까지 커버했다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겠지.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몸을 내빼려는 그 순간, 유지스가 바로 뒤를 노릴 테니까.'
지금 천장에 가해지는 공격이 멈춰서 세르펜스에게 가중된 부담이 줄어들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여력이 생긴 그가 나와 유지스를 뛰어넘어 악숭이 놈들에게 검을 휘두를 것이다.
"잠깐만요! 사람들이 몰려오면 세르펜스는···."
"···그렇다고 지하실이 무너져, 저자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잖은가."
세르펜스가 절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숭고한 의지를 드높였다.
마음속 깊은 곳이 숙연해졌다.
저런 비겁한 사람들 때문에···.
"저들을 외면한다면, 그거야말로 악마 숭배자들의 노림수에 걸려드는 거다."
세르펜스가 내 귀에 속삭였다.
온갖 폭음 속에 묻혀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예?"
"이곳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잖은가."
또다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세르펜스어 해석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그의 말을 분석해냈다.
구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과거를 감추기 위해 그들을 외면했다거나 하는 소문이 돌면, 더 큰 문제가 된다는 얘기였다.
차라리 마음의 빚을 만들어 두어 저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거나, 깊이 죄를 뉘우치며 세르펜스를 성자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이롭다는 계산이 깔린 말이었다.
'머리 굴리는 걸 보아하니,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참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고···.
"두 분 다 버티실 수 있겠어요?"
"으음···. 위에서 공격하는 이들은 수가 많다뿐이지, 그렇게 강한 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되다 말았다고 표현해야 하나? 사용하는 마법도 단순한 폭발 마법 한 가지밖에 없고···."
"예?"
"이런 어중간한 실력이라면 제대로 기를 숨기기도 힘들었을 텐데···."
"아! 설마 인스턴트인가?!"
[성검의 주인]에서 중후반부 즈음에 등장하기 시작한 놈들이다.
그들은 본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일반 신도로, 악숭이 놈들이 개발한 시약을 투여받음으로써 일시적이지만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쌓아 온 마나가 없으니, 대신에 피와 생명력을 소모한다는 크나큰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게 단점이지.'
평소에는 극도로 희석된 시약을 투여하여 간단한 한두 가지의 마법만 익히게 한다. 작은 빈혈 정도만 느끼게끔.
그리고 실전에 들어가기 직전, 이성을 마비시키는 흥분제가 섞인 진짜 약을 건넨다.
'그럼 뭐···,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과분한 힘에 도취되어 생명력이 다 하거나 약효가 끝날 때까지 마법을 펑펑 날리다 죽는 거지.'
물론, 그 약효는 무척이나 길다. 보통 사람들의 생명력을 훨씬 웃돌고도 남을 정도로.
"세뇌에 이어서···."
세르펜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당장은 이 정도지만, 지금보다 차원의 궤도가 더 기울어져 본격적으로 악마를 소환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틀어질지 감이 안 온다.
"무슨, 얘기 중이신, 지! 모르겠지만! 제가 상대하는, 자들은···!"
유지스가 한마디씩 끊어가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마 그녀가 상대하는 놈들은 일반적인 흑마법사일 것이다.
"···급하게 마법을 시전하느라 제대로 위력을 갖춘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급박한 것은 유지스 또한 매한가지. 그 뒤에서 세르펜스가 한가롭게 분석 따위를 해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검의 주인]에서, 악숭 세력이 괜히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흑기사'에게 간부직까지 줘 가며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다.
'마법을 구현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야, 활시위를 당기고 정령의 기운을 냅다 응축시킨 후 쏘아 내는 게 훨씬 빠르지.'
원래 마법사라는 자들이 다 그렇다.
앞에 탱커를 세워두고, 다른 것에 신경 안 쓰고 말뚝딜을 넣을 때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직종인 것이다.
물론 평타가 남들 궁극기 수준의 딜이 들어간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그리 대단한 자들은 아닌 듯하니, 위리디아 님이라면 충분히···."
"유지스요!!"
그녀가 세르펜스의 말을 가로채며 날카롭게 외쳤다.
쐐애액-, 화살은 공기를 찢으며 층계를 거슬러 올라갔고, 곧이어 콰앙 하는 폭발음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박력이 장난 아니다.
"유, 유지스···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등 뒤로 세르펜스가 움찔하고 몸을 크게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 놀란 게 아닌지, 내가 무슨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꼬옥 붙들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호칭을 고쳐 불렀다.
'이 자식, 쫄았네.'
얼결에 유지스 '님'이라는 중간 단계까지 건너뛴 것을 보면 확실하다.
'처음 만났을 때 세르펜스 보고 박력이 어쩌고 하더니만, 자기가 제일 박력 넘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