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11화 (211/925)

211회

40. 공작님과 실종 사건 (16)

"으, 으으···."

저 안쪽에서 메마른 신음이 들려왔다.

힘겹게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듯한 그 소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누구네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안타까움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감도 들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다친 사람부터···."

"잠깐."

앞장서 나가려던 나를 세르펜스가 제지했다.

팔을 잡아당기는 가벼운 동작에 절로 뒷걸음질이 쳐지며, 나는 다시 그의 뒤에 서게 되었다.

"왜요?"

"안쪽은 내가 맡을 테니, 시온은 위···, 유지스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풀어주고 목소리를 확인해주었으면 한다."

"그렇네요. 이 정도 크기의 결계를 유지하려면 신성력 소모도 상당하고, 다친 사람도 치료해야 하니까.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의 고개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보니, 검붉은 자국이 안쪽의 철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본보기를 위해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고문한 건가?'

정말 잔혹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얘, 괜찮은 건가? 고문당한 사람의 모습을 혼자 보아도?'

정황상 암흑가에서 노예 매매에 관한 정보를 캐낼 때 직접 손을 쓴 것 같기는 한데, 고문을 했는지 협박만 한 건지 확실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는 다르다.

'갑각류의 탈피 직후. 그렇게 봐야겠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그동안 그를 지켜왔던. 동시에, 그를 제한하고 있던 단단한 껍데기를 벗어 던졌다.

분명 더 성숙해진 것은 확실하다.

더욱 크고 강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외골격은 아직 말랑말랑했다.

철갑을 뒤집어씀으로써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왔던 과거와는 다르다.

탈피 직후, 이전보다 연약해지는 것은 비단 갑각류만이 아니다.

'탈피를 하는 모든 생물이 갖는 태생적인 문제지.'

단단한 껍데기 대신 말랑거리는 껍질을 뒤집어쓴 지금.

세르펜스는 그 어느 때보다 외부의 충격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조금만 스쳐도 쉽게 상처가 날 거다. 적에게 잡아먹히기에 십상이다.

"방해하는 자가 없다면 결계를 유지하면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까도 보았잖은가?"

그딴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와중에, 왼손으로는 별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육각형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돌을 피하라는 주문은 제아무리 세르펜스라 해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날아오는 돌과 간지럼을 태우는 방해 공작만 없다면 얘기가 다르다.

육각형이 뭐야? 정팔각형을 그리래도 너끈히 해낼 녀석이다.

'아까 보긴 뭘 봐? 님이 제 눈 가리셨잖아요?'

녀석은 지금 알면서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었다.

저렇게 잡아떼면 내가 이러이러해서 신경 쓰인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는 대외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자신은 괜찮노라 나를 안심시켰다.

'지금 누가 누구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각오하고 왔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이런다.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눈 뜨고 볼 걸 그랬다.

불쌍하지도 않은 악숭이 새끼, 비위를 키운다 생각하며 계단에서 굴러 나자빠진 꼴을 두 눈으로 확인해 줄 걸 그랬다.

"어서."

녀석이 아예 나를 돌려세우며 유지스에게 떠넘기듯이 내 등을 밀었다.

여기서 버티면 상황만 이상해진다.

'어쩔 수 없나···.'

오늘 밤에 녀석을 재울 때는 특히나 신경을 써 줘야겠다.

자장가라도 불러줘야 하나?

"우리도 빨리 할 일 하죠."

앓는 소리가 들렸던 철창의 잠금쇠를 부수고 들어가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흘깃 보고, 유지스에게 말을 붙였다.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세르펜스가 유지스와 함께···라고 하였으나, 그를 따라가나 유지스를 따라가나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 철창의 잠금장치를 부수는 일도, 그들의 목소리를 판별하는 일도 그녀가 척척 해냈으니까.

나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바람잡이로 의심되는 놈들을 그녀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네준 밧줄로 꽁꽁 묶었다.

'군대에서 포박 요령을 배웠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냥 손 놓고 놀 뻔했다.

사람들을 절반 정도 구분해내고, 부상자의 치료를 끝마친 세르펜스가 잠시 정신을 차린 악숭이를 다시 한 번 기절시켰을 즈음.

"이건 대체···."

교단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다 무너진 저택과 악숭이를 비롯해 밧줄에 묶인 사람들.

그리고 제국의 유명 인사인 세르펜스와 엘프인 유지스를 보며, 그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정반대 위치에 있는 교단에서 보낸 사람이 먼저 왔으니, 레클뤼턴 영주는 이제 황제에게 혼나는 일만 남았네.'

악숭이들이 판치는 세상에 안전 불감증이라도 생긴 건지, 치안 관리가 이따위여서야.

하긴. 이러니까 악숭이가 떡 하니 사람들을 납치해 놓고 임시 거처로 삼았지.

'아니면 악숭이 놈들이 뭔가 손을 써 둔 걸까?'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자기네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우선 사람들 좀 밖으로 대피시켜 주실래요? 그리고 저 위쪽에 잔해에 깔린 사람들도 많을 텐데, 죄다 악숭이니까 알아서···. 아! 악숭이 뭐냐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표격으로 보이는, 이단 심문관 복장을 하고 등에 거대한 할버드를 비껴 멘 남자가 내 말을 잘라먹었다.

"예···?"

줄임말을 흔하게 쓰는 세계도 아닌데, 바로 알아챈 것을 보면 악숭이의 뜻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모양이다.

교단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주 활발한가 보다.

내가 멀뚱멀뚱하는 동안, 그는 함께 온 성기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한 명의 성기사가 지하에 남아 우리가 구분해둔 사람들을 인솔하여 위로 올려보냈고, 나머지는 뭐.

위에서 감시를 하건 악숭이 발굴 작업을 하건, 뭐든 하겠지.

- 우르릉···.

조용했던 천장에서 다시 소음이 발생했다.

나름 조심조심 치우고 있는 건지, 아까처럼 땅이 진동한다거나 쾅쾅거리는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세르펜스에게 부담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닐 테지.

"세르펜스는 일단 결계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좀 쉬고 있어요. 쉰다는 표현은 이상한가? 아무튼요."

녀석은 머뭇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철창에 등을 대고 기대어 섰다.

가끔 그를 돌아볼 때마다 시선이 마주치는 거로 보아,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사람을 풀어주고 난 후에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지하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오니까 더 가관이네."

분명 지하실 계단만 벗어났을 뿐인데, 천장은 온데간데없고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이 우릴 반겼다.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돌무더기들은 또 어떻고.

평범한 사람이 헤치고 나가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성기사들이 와줘서 망정이지. 사람들을 세르펜스와 유지스 둘이 옮겼으면 날이 다 샐 뻔했다.

"세르펜스, 괜찮아요?"

안에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한 저택의 모습에, 이런 하중을 견뎌내고 있는 녀석이 또다시 걱정되었다.

"···그럭저럭."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그래."

"아닌 것 같은데?"

"······."

계속 신성력을 유지하며 이래저래 심력을 소모한 탓일까?

차가운 달빛을 받은 녀석의 얼굴이 유난히도 하얗고, 부쩍 지쳐 보였다.

"프라시더스 공작님?"

"네, 말씀하십시오."

안쓰러움과 미심쩍음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막 지하실 밖으로 나온 우리를 발견한 성기사 한 명이 다가와 세르펜스에게 말을 건넸다.

"잔해에 깔린 악마 숭배자 중 살아있는 자는 없는 것 같으니, 지하를 받치고 있는 결계를 거두셔도 괜찮습니다. 더 찾아보면 시체는 발견할 수 있겠지만, 찾아낸 시체들은 이미 훼손될 대로 훼손된 상태라···. 아마 다른 시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듣던 중 다행인 얘기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들 물러나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가녀린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멀리 떨어지라며 손짓했다.

녀석을 홀로 두고 다 무너진 저택 부지를 벗어나는 것이 못내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내가 남아봐야 그의 부담만 늘어날 뿐.

대신 유지스를 남겨두고, 나는 성기사에게 덜렁 들려서 저택 부지를 벗어났다.

- 쿠르릉!

안전한 곳에 도착하여 땅에 발을 붙일 즈음, 맞춘 듯이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잔해가 폭삭 가라앉았다.

"보좌관님!"

"웨인···? 살아계셨군요!"

먼저 대피해있던 웨인이 날 발견하고는 반갑게 불렀다.

지하에서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그를 확인해 보지 못했다.

세르펜스가 별말을 하지 않았으니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살아있었느냐는 안부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공작님과 보좌관님, 그리고 엘프님 덕분입니다."

나는 그를 볼 겨를이 없었으나 그는 유지스의 모습까지 확인했나 보다.

중간부터는 세르펜스도 나서서 도왔으니, 그도 철창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있었겠지.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미리 편지를 남겨주시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번에 만났을 때, 더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번 일을 겪고, 제가 얼마나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정말···."

"그런 얘기는 저 말고 나중에 세르···, 공작님께 하세요. 아, 저기 오시네!"

이미 부를 대로 불러댄 이름이지만, 이제 업무 모드로 들어갈 때.

호칭을 정정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르펜스를 가리켰다.

"공작···."

"잠깐, 웨인 당신! 공작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실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건가?!"

웨인이 세르펜스를 부르려 하는 순간,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선동에 앞장섰던 라크라는 자다.

"그래서였구먼? 구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버텼던 거였어!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서 착한 척, 깨끗한 척했던 거였구먼?!"

그는 울며불며 사과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자신이 있는 진창으로 끌어들이려 들었다.

'물론 사과해도 용서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어쩌면 그것을 알고 있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에.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그게 무슨!"

"그런다고 정말 깨끗해질 것 같아? 당신도 나와 똑같아!"

"라크, 자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이 배신자! 혼자, 혼자 살겠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철면피 수준이 아니다.

자신이 잘못 한 것이 아니라, 줄을 잘못 선 것에 대한 후회였다. 반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이 정도면 악마를 숭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마 그 자체다.

작년에 은퇴한 사용인들을 찾을 때, 무작정 아무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잭의 아버지인 웨인을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만약 라크, 저 사람을 만났다면···.'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아찔하다.

- 툭.

무언가 어깨에 턱, 걸쳐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세르펜스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마주치자, 녀석이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자기는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신호다.

'괜찮기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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