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13화 (213/925)

213회

41. 공작가의 사람들 (1)

"보좌관님, 감사합니다! 참말로 감사합니다!!"

잭이 조촐한 짐가방을 들고 내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휴, 대체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시는 겁니까? 휴가를 받았으면 빨리 아버지를 뵈러 가야지, 왜 또 저를 찾아오고 그래요?"

레클뤼턴 영지에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교단에 구금된 상태였지만, 웨인을 비롯해 악숭이들의 뜻에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은 먼저 풀려났다.

고문을 당하느라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기절해 있을 때가 많아 들은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그들의 무고함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웨인 말고도 더 있을 줄은 몰랐네.'

그래 봤자 그를 포함해서 세 명뿐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수에 비해 너무 적은 숫자라 허무하기도 하고, 이게 어디냐 싶어 감지덕지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웨인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세르펜스는 한스로 하여금 잭에게 특별 휴가를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날, 웨인이 무사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그렇게 감사 인사를 하더니 그걸로는 부족했었나 보다.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정말 마지막으로, 공작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럼 저는 휴가 끝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또다시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서야 잭은 뒤를 돌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고맙다는 말도 너무 많이 들으면 지겹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지겨워진 것이 하나 더 있었지···.'

그것은 바로 '호두'다.

지금 누가 나에게 가장 싫어하는 견과류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호두'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돌아가는 대로 호두가 들어간 과자를 사주겠다던, 나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그 약속은 정말로 지켜졌다.

그러나 문제는 세르펜스가 그걸 과도하게 지켰다는 점이다.

'일주일 내내 호두를 먹는 건 너무 하잖아!'

저택에 돌아와 오랜만에 하는 서류 작업을 끝낸 후.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 그는 호두가 들어간 쿠키를 사 들고 왔다.

그때, 당신이 찾던 호두과자가 이것이 맞느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야 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지?!'

그날 이후 오늘 이때까지 호두 퍼레이드가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식탁에 호두가 알알이 박힌 고소한 잡곡빵이 올라왔을 때까지는 눈치채지 못하였다.

간식으로 호두 타르트가 나왔을 땐 '어랍쇼?'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녀석을 멈췄어야 했어.'

사흘째 되던 날.

호두가 섞인 생크림이 중간에 샌드되어 있는 크루아상을 입에 넣으며 불길함을 느꼈고.

나흗날.

크림치즈와 호두가 가득 채워진 단과자 빵을 마주했을 때는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원 한복판에 호두나무가 심어졌으며···.

'호두까기 인형은 대체 왜 준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

닷샛날부터는 유지스가 다이어트를 한다는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티타임 멤버에서 자진 하차했다.

그리고 나는 호두 분태가 섞여 들어간 무스 케이크를 먹었다.

바로 어제인 엿샛날에는 제발 그만해 달라고 세르펜스에게 빌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내 입에 호두가 들어간 피낭시에를 욱여넣었다.

그렇게 일주일째가 되는 오늘.

'야, 이건 좀 심하지 않냐?'

교단으로부터 오늘 오후 세 시쯤 저택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오늘 하루는 호두를 먹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건만.

테이블 위에 버젓이 호두가 들어간 초코 머핀이 올라와 있었다.

'얘 사전에는 적당히라는 단어가 없는 건가?!'

최소한 향수병에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워지는 것이 생기면 녀석이 비슷한 거라도 구해와서 물리도록 내게 권할 테니까.

하지만 슬슬 악의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만큼, 손님이 떠나는 대로 대체 뭐가 불만인 것인지 녀석을 붙잡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두 분께서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르펜스가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고 두 명의 이단 심문관을 향해 여상하게 물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알타르의 옆에 앉은 에일리히에게 '너는 관련도 없는데 왜 왔냐?'라고 물은 것이다.

"이번에 잡힌 악마 숭배자의 말과 작년 6월경에 제가 심문을 담당했던 악마 숭배자의 말 중에 일정 부분 겹치는 내용이 있어, 다시 한 번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오게 되었습니다."

에일리히가 대답했다.

대충 속세에 관한 미련으로 교단의 규율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었다.

'잠깐만. 그걸 에일리히가 담당했다고?'

그렇다는 건, 당시 교단이 그토록 자랑했던 고문의 스페셜리스트가 에일리히라는 소리가 된다.

대체 이 집안은 뭐 하는 곳이지?

"겹치는 부분이라 하심은···?"

세르펜스가 에일리히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 속에서 나는 그의 불안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도 알타르 님께서 해 주실 겁니다. 저는 확인차 따라온 것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스가 서 있었다.

"집사는 나가지 않는 겁니까?"

테이블 세팅이 모두 끝나고, 시녀들이 물러난 이후에도 어째서인지 계속 남아있는 한스에게 세르펜스가 어서 꺼져 달라고 말하였다.

평소라면 여기에 남아있지도 않았겠지만, 세르펜스의 축객령까지 받았으니 조용히 물러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스의 이상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늘 교단의 이단 심문관님들께서 공작저를 찾아오신 건, 과거 이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라고 생각됩니다."

주인이 내리는 명이라면 그 무엇이든 따르는 것을 집사의 도리라 여기는 그가, 나가라는 간단한 명령을 알아먹지 못한 척하며 딴소리를 해댔다.

사실상 명령 거부다.

"···집사?"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신경 써 주라는 세르펜스의 명령에도, 짧게 불만을 표했을지언정 결국에는 그 말을 따랐던 한스가 아니던가.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세르펜스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는 과거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기억하시지 못하는 아주 어릴 때 일은 물론, 태어나시기 전에 있었던 일들도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곳에 남는 편이 더 도움 될 것이라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더 이상 그를 쫓아낼 명분이 없다.

자기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까지 확실하니 필요 없다고 하기에도 뭐하다.

"알겠습니다. 그런 이유라면야···."

하는 수 없이 세르펜스는 그렇게 답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알타르를 바라보았다.

"그 불미스러운 이야기들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요."

확신이 깔린 알타르의 말에 세르펜스는 마치 본인이 죄를 지은 것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잡아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하나 읊어가며 확인 작업을 하는 것 보다, 차라리 이게 낫겠지.

"악마 숭배자가 하는 말은 그다지 믿고 싶지 않지만, 놈이 말하길 자신들은 전 프라시더스 공작 내외에게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세미타 거리에서 만난 악숭이도 같은 얘기를 했던 만큼, 에일리히가 함께 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유지스는 지금 그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해 봤는데, 잘 됐을는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친족만큼 좋은 인질이 없으니, 그런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알타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너무 악마 숭배자들과 걸맞은 쓰레기 같은 이유라, 설득력이 수직 상승하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사망한 전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를 살해한 범인은 끝내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 공작님께서는···."

"제가 심문한 악마 숭배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주장하였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한 짓이란 것을 실토했잖습니까!"

갑자기 에일리히가 알타르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대체 고문을 얼마나 스페셜하게 한 거야?!'

세르펜스가 직접 그의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은 [성검의 주인]뿐만 아니라, 그의 입으로도 직접 확인한 바다.

그렇다는 것은 고문에 시달리던 악숭이 놈이 결국 거짓 자백을 한 후,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에일리히 님! 이러시려고 따라오신 겁니까?"

"알타르 님이야말로 적당히 하십시오. 그런 힘든 일을 겪으신 분에게 그런 얘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욱더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떠보는 듯한 말투가 직업병이라던 에일리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만 증명되는 대화였다.

"알타르 님께서는 교단에 들어오시기 전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당시 사건 현장 주변에서 마기(魔氣)와 흑마력의 잔흔까지 발견됐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는 무용합니다."

"그 정도는 마물의 피에서도 추출할 수 있으며, 마물이라면 볼타 산맥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에일리히 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세르펜스가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는 것은 아주 잘 알았다.

정작 지금은 반쯤 얼이 나간 상태로 눈만 끔벅거리고 있지만.

어째서 에일리히가 자신을 옹호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전 사용인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결국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말다툼을 하고 있던 두 이단 심문관을 비롯하여 응접실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 한스에게로 향했다.

"저는 돌아가신 주인님과 주인마님을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스가 폭탄선언을 하였다.

얼굴을 봐도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중하게 말씀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설프게 악마 숭배자가 한 짓이라는 막연한 답을 하신다면, 오히려 당신의 주인이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어쭙잖게 나서려거든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다는 알타르의 충고에도 한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세르펜스가 그랬다는 걸 알고 이러는 건가? 그래서, 어차피 버릴 주인이니까 명령을 거부했던 거라든지···.'

차라리 이단 심문관이 치고받는 것이 낫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고 심장이 조마조마하다.

세르펜스는 지금 숨을 쉬고 있기나 한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당장 한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내가 범인이오.'하고 자백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녀석은 떨리는 두 손을 다잡으며 자신을 스스로 억제하고,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돌아가신 주인 내외분을 살해한 자는···. 돌아가신 주인님입니다."

돌아가신 이라는 말을 실수로 두 번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발언이다.

"지, 집사? 그게, 무슨···."

세르펜스는 숨을 흐읍 들이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한스를 올려다보았다.

"전 프라시더스 공작님께서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쓱 둘러 본 한스가 다시 입을 열어, 자신의 발언을 정리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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