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16화 (216/925)

216회

41. 공작가의 사람들 (4)

나도 안다. 이건 내 실수가 맞다.

악숭이야 내가 곤경에 처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놈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래, 뭘 기대하겠어?'

이단 심문관이 바로 코앞에 흉흉한 고문 도구를 들이밀며 형형한 눈빛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시켰을 테니.

겁에 질려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줄줄이 떠들어댔겠지.

그걸 알면서도 다른 주제에 꽂혀서 정작 중요한 단어를 흘려들은 내 잘못이다.

'넌지시 떠본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말했는데, 그걸 넘어가?!'

에일리히, 이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치사한 사람이다.

우리 집 고양이 칭찬에 기뻐서 신나게 자랑을 했더니, 한창 맞장구를 쳐주다가 은근슬쩍 지금 고양이를 보러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을 끼워 넣은 셈이다.

그리고 나는 청소가 안 되어 엉망진창인 집 상태를 망각한 채, 그러자고 대답한 거고.

세르펜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일리히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불신의 눈초리로 흘겨보고 있는 거다.

마치 '역시 어른들은 다 똑같아.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거지? 이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듯한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눈이라서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의 말로는 악마 숭배자가 시온 님을 '룩스메아의 사자'라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에일리히는 자신의 조카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까마득히 모른 채, 심문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말하였다.

듣기만 해도 세르펜스에게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서, 그 사람들의 신변을 깡그리 넘겨받아 귀족 능멸 죄로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하자고 제의하고 싶어지는 소리다.

"세상에 저 같은 신의 사자가 어딨답니까?"

"확실히, 신의 사자라고 하기에는 신성력이 없으시죠."

내 말에 에일리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편견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신성력이라면 세르펜스에게 차고 넘치는데, 나까지 가질 필요가 있나?'

휴마누스만 봐도 성검의 주인이면서 공격 기술 외에는 신성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어차피 같이 다니는 리에나가 다 해주니까!

바로 옆에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보조 인재가 있으니, 신성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갈고 닦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선택과 집중, 혹은 기회비용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내게 신성력이 있었다고 한들, 세르펜스가 다 해줄 테니 제대로 배울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냥 묵혀뒀을 거다.

뭐, 어쨌거나.

"그쵸? 그렇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문제랄 게 있나요? 그냥 아닌 거지."

가볍게 던진 내 말에 에일리히는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악마 숭배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라는 사람은 '신의 사자'라는 명칭이 가진 특유의 중2스러움···이 아니라 중압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 같았으면 악숭이 놈이 멍청하게 헛다리를 짚었다고 믿고 싶었을 텐데, 어째 에일리히는 내가 신의 사자이길 바라는 것 같다.

'세르펜스쯤 되면 신이 알아서 굽어살필 거라는 믿음이라도 있는 건가?'

상당히 팔불출적인 사고였다. 하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귀담아들을 필요도···."

"그렇기에 시온 님께서 정말 신의 사자가 아니라면, 악마 숭배자들과 손을 잡고 왜곡된 정보를 신의 뜻이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한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말이 달라진다.

이런 걸 대놓고 말해줘도 되는 건가, 따위를 고민해 볼 겨를 따윈 없다.

교단을 나오기로 마음도 먹었겠다, 내가 세르펜스와 친해 보이니까 덮어놓고 옹호해주고 있는 거겠지.

"제가 바로 신의 사자입니다! 룩스메아 님의 충실한 따까리죠."

"······."

아무래도 단어 선택을 잘못했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에일리히와 알타르의 눈빛에 의심이 서렸다.

"이래 봬도 시온은 진짜 신 룩스메아님의 사자가 맞아요!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세계수의 맹세라도 해 보이겠어요!"

유지스가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였다.

너무 적극적이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내게 신뢰성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시온 경의 언행이 가벼워서 여러 오해를 사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속이 깊은 분입니다."

세르펜스도 나서서 나를 변호하였다.

그놈의 언행. 내 말투가 그렇게 가볍나?

나름 20대 중반 남성의 평균적인 언어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지? 솔까말 내가 한창때의 반항기 청소년처럼 욕을 하고 다녔어, 뭘 했어?! 이 정도면 완전 어른스럽잖아? 평균 이상이잖아?'

이곳 기준은 많이 다른가 보다.

"그는 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는 시온 경이···."

내가 속으로 불평불만을 토해내고 있는 동안에도 세르펜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녀석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무언가 벅차오른다는 듯이 잠시 말을 끊었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호흡을 골랐다.

"저는 시온이 그 누구보다도 신의 사자에 걸맞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세르펜스가 더욱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았던 눈을 뜨며.

그리고 일부러 붙였던 경이라는 호칭어를 떼며 말했다.

'이야, 호소력 장난 아니네!'

하마터면 '네, 맞아요. 제가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신의 사자입니다!'라고 선언할 뻔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말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이었던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촛불처럼 가녀리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 진심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 그게 무슨···?"

당연하게도 에일리히가 바로 낚였다.

세르펜스를 긴 시간 홀로 방치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에일리히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그러나 세르펜스는 눈앞에 놓인 먹이를 토끼가 아닌 곰으로 착각하여, 사활을 걸고 있었다.

'유지스가 세계수의 맹세를 운운한 이상, 저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텐데···.'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맹세의 위험성 때문에 그녀가 그것을 남발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지 않을까 한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흐뭇한 일이다.

"이젠 아시잖습니까? 긴 시간 동안 제 존재의 의의는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뿐이었고···."

녀석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질 말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검이 다른 사람에게로 간 순간, 자신의 존재 의의도 사라졌다. 그러니 더는 살아갈 의미 또한 잃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에일리히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한스가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자살했다는 말도 했으니, 더욱 쉽게 그 단어를 연상할 것이다.

'···그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하얗게 질린 에일리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다.

심지어는 피아 구분 없는 광역기라서 유지스는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 유지스에게 반드시 해명하고, 사과하라고 해야겠다.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의 말을 부정했다.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만이 세르펜스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한스에게는 쉽게 반말을 해댔으면서, 세르펜스에겐 아직 존댓말을 쓰네?'

조카님을 대하기가 많이 어려운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그를 철저하게 남으로 취급하는 중이기도 하고, 정식으로 교단을 나오기 위한 절차도 밟지 않은 상태다.

무엇보다 가주인 세르펜스에게 가문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도 받지 못하였으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제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시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신 룩스메아시여···."

세르펜스의 말에 에일리히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충격을 받은 것은 알타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택의 날 이전까지 교단에서도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지 깨달은 얼굴이다.

"물론 그런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가 신의 사자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제게 충분히 증명해 주었습니다."

감정적으로 흔들어 놨으니, 그 틈을 파고들어 확실한 굳히기에 들어갈 생각인가 보다.

"그는 성검의 주인으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택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에게 끊임없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알려주려 애를 썼고, 성검과는 무관하게 저의 삶을 살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성검이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 때, 저는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가냘픈 얼굴로. 하지만 두 눈동자에는 강인한 빛을 띠며.

세르펜스는 그렇게 말하였다.

상반되는 느낌을 한 얼굴에 담아내는 그 기술이 실로 놀랍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가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던 저의 세례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기펜스가 뻔뻔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럼 선택의 날, 내 눈을 가리고 아도르라는 세례명을 말해준 게 신이게? 님이 룩스메아세요?'

눈 가리고 야옹해도 유분수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아···, 그래서 시온이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알고 있었던 거로군요!"

유지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외쳤다.

훌쩍거리면서도 추임새를 기가 막히게 넣는다.

'와, 진짜 너무 억울하네!'

얼마나 억울하냐면, 잠꼬대 한 번 잘못 했다고 일주일 내내 호두를 먹은 것보다 더 억울하다.

내가 자신의 세례명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낸 것이 그렇게도 고까웠나?

'여러분! 세르펜스의 세례명 뜻은 사랑이랍니다! 앞으로 그를 부를 때 사랑을 담아서 사랑펜스라고 불러주세요!'

···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까 보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제 세례명도 알고 계십니까?"

알타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마땅히 나올 만한 질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쪽은 담당 영역 밖이라서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제 주요 업무는 성검 관련 파트라서요. 성검의 주인인 황태자 전하나, 그분의 약혼녀이신 오풀렌스 백작 영애라거나, 성검 일행 중 한 명이신 리에나 님의 세례명은 압니다."

내 대답을 듣고, 알타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종이와 펜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뭐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적으라는 뜻이다.

세례명은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유겠지.

"그런데 알아서 얻다 쓰시게요?"

"내일 오풀렌스 백작가를 찾아가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내가 세례명들을 적은 종이를 돌려주며 질문하자, 알타르가 그것을 확인하며 답했다.

그리고 그 종이는 응접실 한쪽에서 타오르고 있던 벽난로 속으로 들어갔다.

'말하는 건 안 되고, 태우는 건 되는 건가?'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저, 생면 부지의 이단 심문관이 찾아와서 대뜸 세례명을 맞춰버리는 상황을 맞닥뜨릴 레니에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을 뿐.

"그리고 또 한 가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하세요."

"그래서 그···, 시온 님께서 신의 사자로서 부여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래, 이런 질문도 할 만하지.

악숭이들이 나를 적대하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결국 세르펜스에게 들은 내용은 내가 자신을 우쭈쭈해줬다는 얘기뿐이었다.

놈들의 계획을 알려서 그것을 무산시켰다거나, 그러기 위해 준비 중이라거나 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건···."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시온의 정체도 최대한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지스와 세르펜스가 만들어준 설정값을 토대로 설명하려 했으나, 세르펜스가 그런 나를 저지하며 말을 끊어 먹었다.

"그의 사명은 대륙의 앞날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행동에 제약을 받거나 변수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세르펜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을러대듯 말했다.

평소의 대외펜스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고, 그렇기에 알타르와 에일리히 또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예,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알타르가 더는 캐묻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고 나서야, 세르펜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목소리에도 상냥함이 돌아왔다.

"에일리히 님도 가셔야 합니다."

"알타르 님, 저는···."

"그래도 성하께는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에일리히가 끄응 소리를 내며 세르펜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라는 듯했다.

교단을 나오기로 결심했으니 더는 거리낄 것도 없겠다, 세르펜스와 좀 더 이것저것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 가고 싶은 거겠지.

그러나 세르펜스가 그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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