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20화 (220/925)

220회

41. 공작가의 사람들 (8)

아니나 다를까 에일리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표정을 본 세르펜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에일리히가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나 보다.

'너한테 미안한 감정이야 있겠지만, 어디 그것뿐이겠어?'

미안하기만 할 뿐이라면 굳이 교단을 나올 필요조차 없다. 그냥 사과하고 말지.

애초에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에게 미안해하는 것 자체가 그를 안쓰럽게 생각해서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곁에서 그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앞둔 세르펜스의 반응은 어땠는가.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거랑 뭐가 달라?'

원망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곧 기댈 생각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이유라면 공작가의 사람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자신과 엮일 생각이라면 거절하겠다는 뜻이었다.

"홀로 남은 조카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는 받아주실 수 없습니까?"

에일리히가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간청하듯이 말하였다.

그는 눈앞의 문제를 회피하며, 일단 가문으로 돌아온 후에 해결하자는 안이한 선택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돌아온 세르펜스의 대답은 냉소적이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마저 담겨있었다.

'혼자라는 말을 부정한 건 기쁘긴 한데···.'

억장이 무너진 듯한 에일리히의 표정을 보면 마냥 기뻐하기도 어렵다.

세르펜스야 자신을 혼자라고 말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으나, 에일리히가 듣기에는 그게 아니겠지.

듣기에 따라선, '내가 진짜 혼자였을 때는 없는 사람처럼 지내더니,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거라고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슬쩍 눈길을 주며 다정하게 눈웃음 짓는 세르펜스의 행동만 아니었더라면,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혼자라는 말을 진심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현실이.

누군가는 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녀석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기쁘면 더 늘려도 되잖아···.'

아직 그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받아들인 존재는 나와 유지스뿐이다.

단 두 명이 그의 울타리 안을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그러기엔 그 울타리 안쪽은 너무 휑했고, 오랫동안 텅 비어있었으니까.

조금씩 물건을 들여와 겨우겨우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원래 커다란 가구 하나보다 사람 한 명이 더 많은 공간을 채워주는 법이다.

작은 촛불 하나가 방 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그런 빛과 따스함이 좀 더 필요하다.

"···미안하다. 혼자 두어서."

"말을 놓는 것을 허락한 적 없습니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가족이라며 다가오면 혼란스러울 뿐이겠지. 특히나 네게는 더욱 그러할 거야."

세르펜스의 까칠한 반응에도 에일리히는 굴하지 않고 상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친근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에 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한 번만 내게 기회를 다오."

"저, 저는···."

같은 색을 띤 두 쌍의 눈이 서로를 향했다.

굳건한 눈빛과 불안정하게 일렁거리는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세르펜스는 그 언젠가, 기차 안에서 내가 그를 돕고 싶다고 말했을 때처럼.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갈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에일리히의 시선을 회피했을지언정. 무릎 위에 포개고 있던 자신의 손을 꽉 맞잡고 버텨냈다.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는 계속 이유를 찾고 있다.

가족이라서. 그 말은 그에게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베풀어지는 애정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의심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밀어내기엔 그는 너무 정에 굶주렸다.

'경계하며 거리를 두려 하겠지만···.'

동요한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우연인지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일리히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이해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세르펜스의 말에 에일리히는 그런 너를 이해한다고 답하였다.

"···교단은 가문과 다르게 한 번 나오면 다시 이름을 올릴 수 없습니다."

녀석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며, 입속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다시 공작가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정말 가문으로 돌아와도 후회하지 않겠냐는 마지막 확인이다.

"고맙다."

에일리히는 알고 있다는 말 대신, 감사를 표했다.

동문서답이었으나 우문현답이기도 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서류를 들고 일어섰다. 지금 바로 처리해 주겠다는 뜻이다.

그는 집무실로 향했고, 그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에일리히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 또한 깊이 안도하며 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오늘따라 홍차의 향이 향긋하게 느껴졌다.

"저 아이가 사자님을 많이 의지하나 봅니다."

"커흡, 큽···!"

갑자기 훅 들어온 기괴한 호칭에 하마터면 찻물을 코로 뿜을 뻔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 예. 일단 괜찮고요, 그다음으로 세르펜스가 절 의지하는 것도 맞고요, 마지막으로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주세요."

"그쪽이 편하시다면야···."

"아! 취소, 취소! 세르펜스의 삼촌이 되시는 건데 보좌관인 저를 시온 님이라 부르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

나를 바라보는 에일리히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그 얼굴은 세르펜스가 나를 볼 때 간혹 짓는 표정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참고로 세르펜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9할 8푼의 확률로 '그래서 뭐, 나더러 어쩌라고?'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다.

"···그럼 시온 경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로써 나를 시온 경이라 부르는 사람이 한 명 늘었다.

"그나저나 저를 그렇게 부르신 거로 봐서, 교단 측에서 제가 신의 사자라는 것을 믿어준 건가 봐요?"

"예.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악숭이로 안 몰려서 참 다행이다.

"그보다 저 아이는···."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에 대해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집무실과 연결된 문이 열리며 세르펜스가 다시 돌아왔다.

"언제든 들어 오실 수 있도록, 미리 방을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고맙구나."

데면데면하게 말하며 서류를 내미는 세르펜스를 바라보며 에일리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세르펜스는 그가 서류를 받아 들자마자 손을 거두었다.

"그럼···."

"······."

세르펜스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에일리히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볼일은 끝났을 텐데, 어째서 일어나지 않느냐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에일리히도 눈을 끔벅이며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과 얘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이 틀림없다.

"저건···, 먹지 않는 것이냐?"

에일리히의 눈동자가 주위를 훑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보며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기는 한데, 마땅히 떠오르는 주제가 없었나 보다.

흡사 낯가림이 심한 조카와 친해지고는 싶은데, 어색한 마음에 뻘한 질문이나 던지는 삼촌의 모습···.

'아, 흡사한 게 아니라 그냥 그거 맞지?'

세르펜스의 행동을 풀이하기 위해 매일 이런저런 비유를 들다 보니, 잠깐 착각했다.

"···돌아가시면 먹겠습니다."

"혹시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냐?"

에일리히의 질문에 녀석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아닙니다. 꽤나···,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치고는 어색한 대답이었으나, 에일리히는 흐뭇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세르펜스가 초콜릿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단 것들을 전반적으로 다 좋아한다고 반드시 말해야지.'

제국의 기후상 카카오나무가 정원에 심어질 일은 없겠지만, 일주일 내내 초콜릿이 들어간 디저트를 먹는 일은 피하고 싶다.

"좀 더 이야기하자꾸나."

"······."

"내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단다."

"으음···. 알겠습니다."

녀석은 망설이는 듯했으나, 결국 자리에 앉았다.

"어어···,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해드릴···."

"앉아라."

"옙."

슬그머니 궁둥이를 떼고 일어나려다 세르펜스에게 바로 잡혀버렸다.

일단 앉으라니 도로 앉긴 했으나, 너무너무 어색하다.

이것은 마치 라잌,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는데 야근하신다던 친구네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밥 먹고 가라며 식탁 앞에 앉혀 놓은 상황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심각한 가족회의를 시작하는 거지.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해!'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하나뿐이다.

그냥 닥치고 먹는 것.

나는 왼손으로 수플레 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숟가락을 쥐고, 퐁당 쇼콜라를 크게 한술 떠서 입에 가져다 넣었다.

'녹진녹진한 초콜릿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이 느낌···. 으음~!'

따뜻하게 데워 먹으면 더 맛있었겠지만, 식어서 쫀득한 느낌이 드는 찐득함도 나쁘지 않다.

세르펜스도 나를 힐끔거리다가 숟가락을 들어 퐁당 쇼콜라에 살그머니 찔러넣었다.

"시온 경과는 매우 친한가 보구나."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에일리히가 나를 발견하고는 괜찮은 주제라 생각했는지, 나를 걸고넘어졌다.

안일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을까?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눈앞에 있던 미트볼 토마토 리조또라 대답하던 누군가와 겹쳐 보인다.

"예, 그렇습니다."

세르펜스가 대답했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감이 안 오는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그와는··· 친구입니다."

그대로 말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짧게 호흡을 고른 세르펜스가 말을 좀 더 덧붙였다.

혹여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닌지, 어두워졌던 에일리히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친구라 하니, 소문에 의하면 황태···."

"아닙니다."

"그, 그렇구나···."

졸지에 황태자 휴마누스는 황태가 되었고, 세르펜스의 친구 자리도 부정당했다.

그러나 휴마누스는 그런 것도 모르고 지금쯤 마지막 시련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지스와는 친구입니다."

"그, 그렇구나···!"

유지스가 들었다면 무척이나 기뻐할 만한 말이었다.

그리고 기뻐한 것은 에일리히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르펜스가 먼저 무언가를 말해준 것이 퍽 반가운 모양이다. 에일리히는 머릿속에서 황태 친구를 지우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시온 경은 신의 사자이자 보좌관이니 그렇다 치고···. 그녀와는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건지 물어봐도 괜찮겠니?"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민하신 조카님이 놀랄까 봐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은 너무 조심스러운 탓에 세르펜스에게 대답을 거절할 여지를 주었다.

'뭐, 유지스와 친해진 과정은 첫 만남부터 설명하기 모호하긴 해.'

나는 빈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세르펜스와 에일리히는 이제야 본격적인 디저트 타임에 들어갔다.

어색한 마음에 닥치고 먹기만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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