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21화 (221/925)

221회

42. 공작님의 연말 정산 (1)

벌써 연말이다.

이는 즉, 세르펜스의 생일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작년에는 선택의 날이 코앞이라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으나, 이번 생일은 완전히 마음을 놓고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저번에 있었던 실종 사건의 뒤처리도 잘 해결됐고!'

사람들이 대거 납치되었다.

그들이 프라시더스 공작가에서 일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 당연히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그것은 제아무리 룩스메아 교단이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교단은 그 사건이 악숭이가 벌인 일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교단 측에서는 이래저래 장황하게 떠들어댔지만, 결론을 정리하면 악숭 세력이 납치한 사람들의 입을 빌려 유언비어를 퍼트리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악숭이 놈들이 늘 하던 짓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그냥 악숭이가 악숭했을 뿐이지, 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악숭이 놈들에겐 프라시더스 공작이 성검의 주인이 아니라도 어지간히 위협이 되는가 보다.'하고 받아들였다.

그 또한 특별할 거 없는 이야기였고, 그 대신 사람들은 에일리히의 파문에 관한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었다.

에일리히는 저번에 방문했을 때, 돌아가면서 납치되었던 사람들의 처분이 내려지는 걸 확인한 후 교단을 나올 예정이라 말했었다.

‘자신의 창을 이어받을 이단 심문관에게 인수인계를 핑계로 수련을 봐주다 오겠다나?’

그리고 세르펜스의 생일인 오늘.

프라시더스라는 성을 되찾은 에일리히가 저택에 방문이 아닌 귀가를 하였다.

세르펜스는 에일리히를 맞이한다는 구실로 올해 생일도 공작저에서 보내게 되었다.

롤링 페이퍼와 속엣말 대잔치는 세르펜스가 부끄럽다고 뜯어말렸지만.

'하긴, 작년엔 다들 좀 과하긴 했어.'

오죽했으면 우윳빛깔 공작님이라는 멘트조차 평범하게 들렸을까.

그래도 지인들과 함께하는 생일 파티까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린 세르펜스의 생일 파티이자 에일리히의 환영회는 주역인 프라시더스 두 명과 나, 유지스. 그리고 세르펜스의 개인 호위 직함을 달고 있는 윈스톤이 함께 했다.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 온 새하얀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세르펜스가 소원을 빌고, 후우 입바람을 불어 그것을 껐다.

간단한 선물 증정식도 끝났으니,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

"저기, 그게, 어···.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죠? 세르펜스의 큰아버님?"

내 부름에 윈스톤의 실력을 가늠하려 그를 꼼꼼히 살펴보던 에일리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제복 아래에서 팽팽하게 부풀어있던 윈스톤의 근육들이 누그러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진장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그냥 이전처럼 불러주십시오."

"아, 예. 그럼 에일리히님. 세르펜스와 관련해서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운을 떼기 무섭게, 에일리히는 진중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우며 나의 입술 언저리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바람직함을 넘어 부담스러움에 가까운 경청의 자세다.

'이번엔 내 근육이 부풀어 오를 차례인가?'

의식해서 힘을 빡 주었으나, 나는 윈스톤이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세르펜스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이 맞긴 맞는데, 달달한 건 전반적으로 다 좋아하는 편입니다. 영양학적 이야기는 제쳐두더라도 매일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잖아요. 우리는 간식의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는 나도 예상치 못한 변화구였다.

그래도 초콜릿은 초콜릿.

기껏 사 온 음식을 두고 이런 말을 하긴 미안했으나,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고 말해둬야 한다.

"그런···, 겁니까?"

"예, 그런 겁니다!"

에일리히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고, 세르펜스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관심이 불편한 모양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새로운 케이크를···."

당장 근처에 있는 케이크 가게로 달려갈 셈인지, 에일리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초콜릿 케이크를 사 오실 줄 알고, 최근 초콜릿이 들어간 디저트는 피해왔거든요."

나는 그를 뜯어말리기 위해 속사포로 말하였다.

세르펜스와 에일리히가 나란히,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서···!"

자각해야 할 사람들은 안 하고, 유지스 혼자 깨달음을 얻었다.

"뭐···, 그건 그렇고. 에일리히님, 괜찮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에일리히가 자리에 앉으며, 그게 대뜸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시온, 또 목적어를 빠트렸잖은가."

"아차! 깜박했다!"

"네에?!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한 고도의 화법이 아니었나요?"

세르펜스가 내 실수를 지적했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들은 유지스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로 하자.

"그 소문 말입니다. 되게 좀···, 흉흉하게 났잖아요?"

"저에 관한 소문이라면 듣긴 했지만, 어떤 점이 흉흉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에일리히에게 다시 한 번 질문했으나, 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내가 이해를 못 할 차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요! 에일리히 님께서 빡쳐서···가 아니라 몹시 화가 나셔서 자신이 맡은 일이 아님에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끼어들어, 심문을 빙자하여 의미 없는 폭력을 행사하다 사망자가 나오는 바람에 교단에서 쫓겨났다는 얘기 전부! 전반적으로 다!"

"쉽게 죽이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다른 이단 심문관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겁니다."

"······."

교단이 자랑하던 고문의 스페셜리스트를 너무 얕보았다.

그의 기준에서는 흉흉한 것이 아니라 귀여운 수준이었나 보다.

역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뜬소문은 믿을 게 하나 없다.

"그보다, 그 납치 사건의 관계자들에 관한 처우가 결정되었습니다."

에일리히가 그들을 납치당한 피해자가 아닌 사건 관계자라 칭하며 운을 뗐다.

"그들이 악마 숭배자들의 일에 동조하려 하였으나, 납치 및 감금으로 인하여 생존권이 위협받았다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교단은 그들이 악마 숭배자들에 의해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고 보람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로 하였습니다."

"···그게 뭔 소리죠?"

"사회봉사 처분을 내렸다는 소리다."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종교인의 표현에 내가 의문을 표하자, 세르펜스가 친절하게 에일리히의 말을 번역해서 들려주었다.

"그들의 남은 일생은 교단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일꾼으로 쓰이며 교단의 감시하에 두겠다는 뜻이다."

"아, 이번 건 저도 알아들었어요."

무능메아의 부하들치고 일 처리가 똑 부러지는 게 아주 마음에 든다.

"다만 악마 숭배자들의 사상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건 해석 안 해주셔도 돼요."

"그럴 생각이었다."

에일리히는 자신의 말이 끝날 때마다 세르펜스와 내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유지스는 사형을 입에 담으며 미소 짓는 에일리히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내용에만 집중한 듯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윈스톤은···.

"윈스톤 경? 왜 그렇게 벙쪄있어요?"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아! 아무것도 아니오이다."

절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말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숨어버렸다.

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말을 붙이는 바람에 얼결에 속내가 흘러나온 모양이다.

"그게 말입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소이다. 주군의 일에 아랫사람이 일일이 나서고 간섭하는 것도 이상하잖소? 주군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다.

사람인지라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으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사실 그것 말고도 걸리는 점이 있소."

"어떤 거요?"

이번에는 그게 무슨 질문이든 확실하게 대답해 주고야 말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세르펜스의 속눈썹 개수가 궁금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세어 줄 용의도 있다.

그런 결의를 담아 윈스톤을 똑바로 바라보자,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몸을 뒤로 뺐다.

"어째서 주군께선 선배님에게 하대를 하는 거요?"

"아···."

듣고 보니 윈스톤이 하대펜스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슬며시 세르펜스를 바라보자, 그가 넌지시 에일리히를 눈짓했다.

에일리히가 납치 사건 관계자들로부터 세르펜스가 나에게 반말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테니, 이제 와서 존댓말을 쓰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반말을 했다는 뜻이다.

'반말에 익숙해져서 실수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윈스톤이 물은 것은 세르펜스가 지금 반말을 쓰는 이유가 아니라, 내게 반말을 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그럼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해 줘야지.

"별건 아니고, 친구 먹은 김에 말도 놔 달라고 했어요."

"그 전부터 내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었나?"

윈스톤에게 대답해 주는 나의 말에 세르펜스가 새치름하게 토를 달았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은데, 그냥 넘어가 줘도 되는 부분 아닌가?"

그리고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내 전략이 주효했는지,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어 자신의 앞 접시에 놓인 케이크를 자르는 그 모습이 우아하기 짝이 없다.

왠지 느낌이 좋다.

지금이라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은근슬쩍 반말해도 넘어가 주는 것 같은데, 아예 놔 버려도 되는 각 아닌가?"

"그건 아니다."

아니었나 보다.

녀석이 입가에 머금었던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하며 답했다.

"아, 왜에!"

"시온이라면 분명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실수를 할 거다."

"와, 진짜. 나 못 믿어요? 우리 사이의 믿음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됩니까?"

"내가 어찌하여 그대를 믿지 못하겠는가? 실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건 좀 의심해 주면 좋으련만.

이런 똑 부러진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호칭 문제는 실수한 적 없잖아요!"

"······."

"시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내 외침에 할 말을 잃어버린 세르펜스를 대신하여 유지스가 그것을 완강히 부정해 주었다.

"세례명을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 저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

"···세르펜스, 어째서 시온에게 이름으로 부르는 걸 허락해 준 거죠?"

"이렇게까지 조심성이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유지스와 세르펜스가 사이좋게 수군거렸다.

친근해 보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으나, 대화 주제가 주제인지라 순수하게 기뻐하기가 어렵다.

'둘이 친해지길 바라며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옆 반 친구가 나와 놀려고 내 반을 찾았다가, 어느 날부터 내가 아니라 내 짝꿍과 더 친해져서 나만 쏙 빼놓고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삐졌는가?"

세르펜스가 내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내게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는 귀신펜스라 불러줘야지, 안 되겠다.

"안 삐졌거든요?"

"누가 뭐라 하여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이다."

"참나, 알고 있거든요?"

"알면 되었다."

녀석이 만족스레 웃으며, 아까 잘라 놓고 미처 먹지 못했던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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