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회
42. 공작님의 연말 정산 (3)
내가 비록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예시로 들기는 했지만, 그게 교관 선생님도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 시간에 올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문 쪽을 보았다가, 다시 세르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놀란 기색 없이 천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기척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즉 나와 함께 가고 싶다는 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문이나 열어라."
세르펜스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야말로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그에게 묻고 싶다.
- 똑똑똑.
밖에 있는 누군가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아까보다 박자가 조금 빨라졌다. 누군지 몰라도 성질 한 번 급한 사람이다.
"예이, 예이~. 나갑니다, 나가요!"
막상 일어나려니 이불 밖을 떠나기가 아쉽다.
짧은 고민 끝에 이불을 몸에 두른 채, 근처에 벗어놨던 슬리퍼를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방에서 신세를 지면서 이런 것쯤은 대신해주면 좀 좋아?'
세르펜스를 다시 한 번 흘겨주고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세르펜스와 같은 청은발에 녹색 눈을 가진 남성이 서 있었다.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복도의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내려앉았다.
"에일리히 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그건 저도 묻고 싶습니다."
"예?"
자기가 찾아와 놓고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다.
"갑자기 그 아이의 기척이 사라져서, 시온 경이라면 행선지를 알고 있을까 싶어 찾아와 봤더니···."
"사라졌던 세르펜스의 기척이 여기서 느껴졌다고요?"
"···예."
에일리히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세르펜스가 여기서 자는 것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유지스와 한스의 경우가 특이한 거다.
척 봐도 당황스러워하는 그에게 '세르펜스는 앞으로도 여기서 잘 테니까, 신경 끄쇼.'라고 말할 수도 없고···.
"우선 들어오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에일리히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 옆에 서 있는 세르펜스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일단 문을 닫고 불을 다시 켰다.
"서서 얘기하기도 뭐하니, 앉아서 대화합시다."
"어디에 말입니까?"
이불을 까느라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져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보며 에일리히가 반문했다.
이럴 땐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나는 몸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슬리퍼를 벗고 바닥에 깐 이불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르펜스도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고, 에일리히는 고민하다가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 거기에 앉았다.
"세르펜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제가 불편해서겠지요."
에일리히가 내 말을 끊으며, 자조적으로 말하였다.
바닥에 깔린 이불과 잠옷 차림의 세르펜스를 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가 보다.
그리고 내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아서, 자신이 먼저 그것을 말해버린 게 아닐까 한다.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예요!"
"아니라면 어째서 저 아이가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돈하긴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머리칼은 풀어져 있었고 잠옷은 여기저기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는 자다 일어난 사람의 것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침대에서 몇 번 뒹굴뒹굴 한 것 같다.
"자려고 온 건 맞는데···. 아무튼 에일리히 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애초에 세르펜스가 여기서 자기 시작한 게 거의 두 달쯤 되어가니까, 전혀 관련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를 올려다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했다.
에일리히는 내가 한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그저 하얀 거짓말인지 구분하기 위해 내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나는 떳떳했으므로, 당당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니까 그러시네!"
다행히도 그는 내 말을 믿어주었다.
세르펜스가 자신을 피해 도망 온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는지, 에일리히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아이는 이곳에서 잠을 청하는 겁니까?"
"에일리히 님도 대강의 사정은 다 아시니까, 대답해드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어째서 당사자를 앞에다 두고 저에게 물으시는 건데요?"
"······."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힌 에일리히가 슬쩍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을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하였으며, 나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조카가 낯을 많이 가리면, 그럴수록 더 대화를 시도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해야죠! 그걸 피해버리면 어떡합니까?"
"······."
"아니, 뭐···. 어색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더 조심스러워지는 건 알죠, 아는데···."
세르펜스와 닮은 얼굴로 기운 없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도 저번에는 말씀 잘하셨잖아요. 이제 들어와 사니까 가만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주겠거니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요?"
에일리히가 또다시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눈치를 안 봐도 휴마누스 꼴이 날 테니 문제지만, 너무 눈치를 보아도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세르펜스도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을 파야지.'
내가 먼저 우물을 파 두니까, 세르펜스가 기웃거리며 물을 마셔보고 그것에 매료되어 수질관리에 열심히 힘쓰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세르펜스도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배워야겠지만, 그것이 당장은 아니다.
특히나 그 상대가 전대 공작의 형제인 에일리히라면 더더욱.
세르펜스는 그를 공작가로 받아들인 것만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문득, 제 욕심으로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저를 가족으로 인정해 달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다면 가문에 들어오는 걸 허락도 안 했겠죠.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뭉뚱그려서라도 말하거든요. 저래 봬도 에일리히 님을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에일리히는 또다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고, 세르펜스는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보는 앞에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정말···, 그런 것이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불편하고, 그···, 으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싫은 것은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에일리히의 눈빛을 피하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와 닮은 얼굴이 낯선 탓인지, 세르펜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에일리히 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대요."
"시, 시온?"
녀석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녀석이 내뱉은 문장의 어색함에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하였고, 지금 보인 반응으로 그것이 확실해졌다.
"크흠···! 호칭이라면 큰아···버지라던가, 삼촌 이라던가···. 아무거나 네가 편한 방식으로 불러 다오."
에일리히가 쑥스러움과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며 세르펜스에게 말하였다.
큰아버지 대신 큰아빠라고 하려던 것 같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 주자.
'그보다, 이건 나도 많이 궁금한데?'
일단 성으로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기대감을 듬뿍 담아 세르펜스의 입이 열리기를 고대하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럼···. 배, 백부님···?"
이윽고 세르펜스의 입이 열렸고, 에일리히의 얼굴에 작은 실망감이 스쳤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
'백부님이 뭐야, 백부님이?! 삭막하게스리!'
삼촌이라는 단어가 너무 깜찍해서 부담스러운 거면 큰아버지라 부르면 되고, 아버지라는 단어가 껄끄러우면 삼촌을 쓰면 될 텐데.
보좌관은 공작님에게 실망했다.
그것도 많이.
이제 그만 본론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뭐···. 아무튼 그런 거니까 겁먹지 마시고, 세르펜스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 그건 곤란하다."
갑자기 세르펜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곤혹스럽다는 듯 말하였다.
"곤란하다니, 뭐가요?"
"···시온이 대신 말해주면 안 되는 건가?"
"왜요?"
세르펜스는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는 대신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매번 저런 표정에 넘어가 주면 한도 끝도 없다.
가끔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세르펜스도 이제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이런 것까지 저에게 일일이 의지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녀석이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다.
어째서인가 민망해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 그러네요.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친구랑 같이 잔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많이 부끄러울 만도 하죠.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니까."
"윽···."
세르펜스가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조심스럽게 돌려서 말해주면 어디 덧나느냐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그러게 세르펜스가 직접 말했으면 좋았잖아요."
"······."
"아니, 너무한 건 제가 아니라 세르펜스죠."
"······."
"알았어요, 알았어! 거 참 까탈스럽긴."
아무래도 다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섬세한 직장 상사 때문에 내가 고생이 많다.
"흠, 흠! 그럼 다시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운을 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르펜스와 나를 번갈아 보던 에일리히가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세르펜스가 어릴 때부터 줄곧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저번 납치 사건으로 그게 더 극심해지는 바람에 제 방에서 재워주고 있는 겁니다."
"아직도··· 말인가?"
에일리히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내게 질문하는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아직도'라는 게, 납치 사건이 종결된 지금까지를 일컫는 말인지.
아니면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가 사망한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를 일컫는 말인지.
정확히 어느 쪽을 지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태여 그것을 묻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같았으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예전에는···."
"시온."
세르펜스가 내 입에서 토닥토닥 이라는 말이 나올 것을 짐작하였는지, 나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다.
그 모습에 무언가 오해한 것이 확실한 에일리히의 안색이 더욱 비탄에 잠기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르펜스의 인권 보호 차원에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무튼, 예전보단 훨씬 나아요. 아직 혼자 자면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 같긴 한데, 사건 전과 비교하면 좀 낫대요."
"하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잔다는 건···."
"지금은 그냥 저랑 놀다가 자는 게 재밌어서 눌러앉은 것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이 나잇대 애들은 괜히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려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겁니까?"
내 대답에 에일리히가 긴가민가해하며 질문했다.
과연 허구한 날 이단 놈들이나 때려잡으며 살아와서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보이는 행동 유형을 잘 모르는가 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숙련자인 내가 도와줘야지.
"네, 그런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부모님께 땡깡 부리고 그랬어요."
"실례지만, 시온 경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스물여섯인데요? 아, 곧 있으면 스물일곱이네요."
"······."
에일리히가 어딘가 미묘한 눈빛으로 나와 세르펜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녀석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세르펜스는 아늑하고 폭신한 곳에서 재울 테니까, 녀석의 잠자리 문제는 그냥 제게 맡겨주세요."
"아, 예···."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추가 질문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불까지 끄고 조용히 문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