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회
42. 공작님의 연말 정산 (4)
평소라면 쉬지 않고 열심히 펜을 놀리고 있을 세르펜스의 손이 자꾸만 멈칫거렸다.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가 저럴만한 이유라면 한 가지뿐이다.
"세르펜스, 어젯밤에 저에게 어디 같이 가자고 한 거. 반쯤 충동적으로 말한 거죠?"
"···언젠가는 같이 가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녀석은 내 말에 반발했으나,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긴 한가 보다.
"그러니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게 튀어나왔다는 얘기잖아요."
"하지만 후회하거나 하진 않는다."
"알아요, 그냥 긴장하느라 그런 거겠죠."
"으음···."
세르펜스가 낮게 침음을 흘렸다.
도대체 그곳이 어디길래 저토록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것인지. 보는 나까지 괜히 조마조마해졌다.
어차피 어디를 가느냐 물어도 대답은 안 해 줄 것 같고···.
"언제 출발할 겁니까?"
"그건···."
세르펜스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자연히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녀석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고, 그런다고 줄곧 집중하지 못했던 서류의 내용이 머릿속에 박힐 리가 없었다.
"세르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탁 소리 나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으로 녀석이 무언가 결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예···?"
내가 벙벙하게 반문하자, 녀석이 왜 그런 멍청한 얼굴을 하느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 가도 되는 겁니까?"
"말했잖은가.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여기에서 뭉개고 있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집중력은 이미 출타한 지 오래요, 그의 마음은 애먼 곳에 가 있었으니.
이대로는 시간 낭비일 뿐,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휴, 이럴 거면 그냥 아침 먹고 바로 출발했으면 좋았잖아요? 괜히 계단만 올랐네."
가벼운 농담 투로 불만 사항을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아주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가 하더니, 이내 인상을 펴고 입을 열었다.
"이미 올라온 건 어쩔 수 없으나, 내려가는 것은 생략할 수 있다."
"그 말은 마치 세르펜스가 저를 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데요?"
내가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자, 녀석이 슬쩍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미소는 전혀 자연스럽지 못했고, 어딘가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긴장을 풀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대가 원한다면."
"집어치워요!"
"처음도 아니잖은가?"
"뭐, 그렇긴 한데···."
편리의 추구는 세상을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세르베이터 이용에 익숙해져서, 매일 본관을 오르내릴 때 세르펜스를 타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
아무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세계라 한들, 사람을 엘리베이터 대용으로 쓰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혹시 몰래 빠져나가야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다."
"그럼 그냥 계단으로 갑시다, 계단으로!"
나는 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난 창문이 아닌 복도와 연결된 일반적인 문을 열었다.
세르펜스가 내 뒤를 따랐고, 우리는 평범하게 계단을 내려가 본관 1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현관 쪽으로 향하려던 나를 세르펜스가 저지했다.
"어? 왜요?"
"그쪽이 아닙니다."
그렇게 답하며 세르펜스는 현관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평소에는 잘 쓰이지 않는 뒷문이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이번에는 세르펜스가 앞장서 걸었다.
녀석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 본관의 뒤쪽, 외진 곳에 있는 창고였다.
그 앞에 멈춰선 세르펜스는 열쇠를 꺼내 들며, 문에 걸린 묵직한 통 자물쇠를 다른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가까운 곳이라더니, 진짜 가까운 곳이었잖아?"
녀석이 내게 함께 가주었으면 한다는 장소가 어디인지, 이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 줘봐요. 제가 열어줄 테니까."
자꾸만 헛손질하며 애꿎은 열쇠 구멍 주위만 긁고 있는 녀석에게서 열쇠를 빼앗고 그를 옆으로 밀쳐냈다.
맞지 않는 열쇠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새도 없이, 자물쇠는 철컥 소리를 내며 손쉽게 풀려버렸다.
나는 걸쇠에서 자물쇠를 풀어, 그것을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불안하게 고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문을 열자, 드러난 풍경은 여지없이 평범한 창고의 모습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모습에 긴장의 끈이 턱하고 풀릴 뻔했다.
그러나 세르펜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곳이 아니다."
"예? 아니라고요?"
"···아래."
녀석은 짤막한 단어 하나를 내뱉은 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 것도 없이 세르펜스는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벽을 따라 죽 걸었다.
그는 모퉁이에 쌓여있는 잡다한 물건들을 치워내고 벽면 어딘가를 눌렀다.
- 달칵.
그가 누른 곳 바로 옆에 있는 벽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안쪽에 또 다른 열쇠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녀석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또 다른 열쇠를 건네주었다.
'저택 부지 내의 외진 건물과 그 아래 존재하는 은밀한 공간이라니···.'
정말이지, 너무 뻔했다.
그와 자리를 바꾸어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고 그것을 돌렸다. 벽 너머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세르펜스, 이다음에는···."
뒤를 돌아보며 물으려는데, 세르펜스가 성큼 다가와 벽을 힘있게 짚었다.
- 그그긍···.
지그재그로 쌓인 벽돌 모양을 따라 벽면의 일부가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녀석은 벽돌이 빠진 자리를 미닫이문의 손잡이처럼 잡고 옆으로 밀어내자, 벽 안쪽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살짝 고개를 안에 넣어 왼쪽을 바라보니,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숨겨져 있던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단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주제에 뤼클레턴 영지에서 보았던 지하실에 비하면 얕은 축에 속했다.
'여기가 수도라서인가?'
이런 데 쓸 준법정신의 반의반만이라도 도덕심에 투자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뭐, 전대 공작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잠깐만. 이 녀석, 지하실 자체에 대한 공포심은 없는 건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번 레클뤼턴 영지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암흑가에서도 숨겨진 길을 이용하기 위해 지하 통로를 몇 번이고 들락날락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겠지.
'애초에 암흑가 자체가 지하에 있잖아.'
괜찮았던 거냐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돌아올 답은 뻔하니까.
무뎌지지 않으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던 그에게 참고 견디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이제 내려가면 된다."
세르펜스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건너뛴 주제에 그냥 보면 아는 부분을 설명했다.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저도 보면 압니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거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곳 지하실뿐이든 아니든. 오늘 이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우면 그만이다.
세르펜스가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구체를 띄워 발밑을 밝혀주었기에 발을 헛디딜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비좁은 통로를 따라 죽 이어진 계단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압박감 때문에, 나는 양쪽 벽을 짚으며 한 칸씩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엄청나게 썰렁한데 무지하게 살벌하네요."
지하는 지상 창고의 넓이와 엇비슷한 것 같았으나,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지 않아서 훨씬 더 넓고 휑해 보였다.
케케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면은 깨끗이 씻어낸다고 씻어낸 것 같지만, 여기저기 검은 무언가로 얼룩져있었다.
얼마나 방치되었는지 바닥에는 먼지가 그득하게 쌓여있다.
아마도 저 먼지들을 모두 걷어내면 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저 얼룩들 설마···."
"대부분 마물들의 것이다."
"아···."
벽 깊숙이 스며들어 닦이지도 않는 그것들이 전부 세르펜스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음에도 순수하게 안도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서 세르펜스의 고문 말고도 잡아 온 마수들의 처치도 함께 이루어졌었나 보다.
'그렇다기보다는 마수들을 죽였던 장소에서 세르펜스를···.'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러지 않아도 세르펜스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까지 이곳에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된다.
"저기 안쪽이죠? 이상한 의자랑 쇳덩이들이 굴러다니는."
"···그래."
대답이 한 호흡 늦게 돌아왔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파악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힘없이 늘어진 그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바로 앞에서 본 의자는 무척이나 작았다.
성인의 시점에서 본 어린아이는 머문 자리조차 이렇게나 작았다.
그 주변 바닥을 발로 슥슥 문대자 검은 얼룩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우."
"저 걱정하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지금 걱정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니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쇠뭉치들을 살펴보았다. 세세한 도구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 아마도 어린 세르펜스의 두 다리를 묶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쇳덩이를 찾아냈다.
"그건 어쩔 셈이지?"
"이 정도면 손목에 들어갈까요?"
"···그런 건 왜 묻는 건가?"
"세르펜스에게 채우려고?"
녀석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주제에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번 농담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니까요."
난 정말로 진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것을 잡고 있던 세르펜스의 손목에 채웠다.
그의 손목이 두꺼운 편은 아닌데도 겨우 들어갔다. 피부가 눌린 것으로 봐선 빨리 끝내야 할 것 같다.
"반대쪽 손도 줘봐요."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저 못 믿어요?"
"······."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녀석은 결국 반대쪽 손목도 얌전히 내주었다.
"이제 내게 무슨 짓을 할 셈이지?"
"아무 짓도 안 할 건데요?"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방치되는 건가?"
나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순순히 내 말에 따르길래 내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한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는가 보다.
"제발 좀 상식적으로 생각합시다!"
"···선우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녀석이 얼굴을 굳히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헛소리하지 말고요! 세르펜스가 이 장소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제가 여기서 그런 것을 하자고···. 아니, 저 그런 취향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것보다 그쪽 지식은 또 어디서 배운 건데?!"
아주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에게 그런 걸 가르친 적은 없다. 그전에, 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그는 이미 그런 오해를 한 차례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은 전대 공작 놈이 가르칠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암흑가···.
"이전에 황태자가 멋대로 떠들어댄 잡담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 그 자식은 우리 순수한 세르펜스에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하여간 휴마누스 이 자식은 도움이 되는 구석이 눈곱만치도 없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째서 내게 이런 것을 채운 거지?"
내가 혼자서 씩씩대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긴 왜겠습니까?! 혼자서 벗어나 보라고 그런 거지!"
"아···!"
녀석이 뒤늦게 내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장담하건대, 내가 그린 그림은 결코 이딴 상황이 아니다.
어렸을 적 자신을 억압했던 것이 사실은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눈곱 미만 휴마누스때문에 다 망쳤다.
"그, 그러게 항상 말했잖은가. 말을 확실히 해 달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선우는 종종 상식 밖의 행동을 해서 정확하게 짚어주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내 탓도 조금 있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