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회
42. 공작님의 연말 정산 (5)
"아무튼, 됐으니까 빨리 그거나 풀어요. 어휴, 피 안 통하는 것 좀 봐."
내 말에 세르펜스가 대놓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멋대로 손목에 이런 걸 달아놓고 뭐라고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거겠지.
"제 얼굴은 그만 보고요."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 나서야 녀석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리자 손목과 손목을 잇는 쇠사슬이 철그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세르펜스의 눈빛도 흔들렸다.
녀석의 호흡이 얕고 빨라졌다. 그리고 일순간. 그것이 완전히 멈췄다.
- 콰드득
세르펜스의 오른손에서 은빛의 신성력이 맺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왼손목을 결박한 것의 잠금장치를 우그러뜨렸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로 콰득 소리를 내며 간단하게 부서졌다.
녀석은 망가진 고철을 손에 들고, 의혹에 찬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너무···, 간단해서···?"
"그게 놀랄 일입니까? 신성력을 제약할 수 있는 물품은 교단에서 엄격히 통제하고 있으니 공작도 구할 수 없었을 테고. 그렇다고 마력 구속구를 쓰자니, 그건 신성력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너도 알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느냐는 의미를 듬뿍 담아 말하며,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껏 내던지고 싶었지만, 바닥에 먼지가 너무 쌓여서 후폭풍이 두려웠다.
내 기관지는 소중하니까.
"처음부터, 세르펜스에게 이딴 것은 한낱 쇳덩이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런 거로는 세르펜스를 제한할 수 없어요."
족쇄도, 수갑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쇳덩이, 고철. 그딴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건 당시의 세르펜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붉어진 자신의 손목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세르펜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나라면 신성력으로 바로 치료했을 텐데, 그걸 왜 그냥 보고만 있는지···.
하얀 손목에 남은 자국이 선명했다. 안타까움에 그의 두 손을 잡고 아래로 내리자,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 당시, 세르펜스를 억압했던 건 이딴 고철 덩어리가 아닙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어리고, 그래서 무력했을 때.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공포심이 세르펜스를 얽어매고 행동을 제약했던 거겠죠."
"······."
"두렵고 무서웠겠죠. 반항이라는 선택지도 떠올리지 못하고 순응했겠죠.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행동을 제한당하고, 폭력으로 인해 사고가 마비되어서···.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겠죠."
"······."
"제 말에 틀린 점이 있거나, 제멋대로 떠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세르펜스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르펜스를 묶어둘 수 있는 건, 오로지 세르펜스 본인의 의지뿐입니다. 저런 하찮은 쇳덩어리를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이 지하실도 그냥 먼지만 날리는 공간일 뿐이고, 여기에 있는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집니다."
이번에는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가볍게 미소를 짓자, 녀석도 따라서 미숙하게나마 미소를 그렸다.
"그럼 이딴 먼지투성이 공간은 빨리 벗어나죠.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얼른 하시고, 그런 게 아니라면 집무실에 돌아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합시다. 아, 손목 그것도 빨리 치료하시고."
"···선우."
세르펜스가 나를 직시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허공에 떠 있는 신성력 구체가 발하는 빛에 의해, 그의 녹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맑은 눈빛은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먼지 속에 파묻혀서는 안 될, 고귀한 빛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고맙다, 함께 와 주어서. 혼자였다면 나는 결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다."
그의 말에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무척이나 긴 시간 동안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발밑에 쌓인 먼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공기가 제대로 통하기는 할까 의문스러운 이곳에 이렇게나 많은 먼지가 쌓이려면 고작 한두 해로는 어림도 없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녀석이 두 번째 열쇠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한스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청소는커녕 고문 도구도 버려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된 걸 테다.
치워버리라는 명령도 하지 못할 정도로 두렵고 끔찍한 장소라는 것을 의미했다.
"저도 같이 와 달라고 말 해줘서 고마워요."
"선우가 어째서···, 아···. 그렇군."
그는 내 감사의 인사에 의문을 표하려다가, 무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을 바꾸었다.
언젠가 자신에게 내가 기대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 한 적이 있는 만큼. 어째서 도움을 준 내가 감사를 표하는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듯하다.
"그럼 나가죠!"
"그래."
세르펜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도 확실히 잠갔고, 잠시 치워뒀던 잡동사니도 제 위치를 찾았다.
지하의 공기가 탁했던 만큼, 바깥의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먼저 집무실로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맑은 공기를 즐기며 본관 계단을 오르던 도중, 세르펜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엥? 왜요?"
내 반문에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새하얀 그의 재킷 소매에 새카만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먼지가 잔뜩 쌓인 것을 만진 손으로 내가 그의 소매를 걷어붙이다가 묻은 거다.
"저런! 조심 좀 하시지."
"너무 웃는 것 아닙니까?"
"웃다뇨? 제가? 공작님께서 착각하신 겁니다."
"······."
녀석이 삐졌는지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팩하니 5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4층의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집무실로 돌아와 얌전히 세르펜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걱정되는 마음에 그의 방을 찾아가 볼까 생각하는 찰나.
세르펜스가 머리카락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모습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만 갈아입고 올 줄 알았는데, 아예 씻고 왔어요?"
"···어쩔 수 없었다."
그 먼지통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찝찝할 만도 했다.
게다가 어린아이는 면역력이 약하니까 꼬박꼬박 잘 씻는 버릇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래도 세르펜스는 너무 깔끔 떠는 경향이 있어요."
"선우는···. 씻는 걸 싫어하나?"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맨날 맨날 꼬박꼬박 씻고 있으니까, 더럽다는 시선은 거둬주실래요?"
"농담이었다."
농담은 개뿔. 완전히 질겁하는 눈을 하고 날 위아래로 훑어본 주제에.
그딴 말 퍽이나 믿겠다.
"혹시 세르펜스가 청결에 너무 신경 쓰는 것도 뭔가···, 완벽에 대한 강박 관념 같은 것 때문인가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그건···."
녀석이 자신의 자리로 가다 말고 멈춰 서서 진중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듣고 고민해 주는 것은 기쁘고 고마웠다.
하지만 동시에, 멈춰선 그 걸음이 마치 내가 그의 두 다리를 묶어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과도한 애착으로 이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억지로 끊어내려 한다면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될 테니 그럴 수도 없다.
분리불안 문제도 있으니, 당장은 그가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는 수밖에.
조금 전에 자신을 속박하겠다는데도 순순히 손을 내민 것도 그렇다.
그 행동은 모두 한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서.'
분리불안이라는 것이 애초에 왜 생기겠는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서. 이대로 영영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물론 분리불안의 원인이 그것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혼자서 낯선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불안감을 내비치는 예도 있다.
그러나 단연컨대 세르펜스의 경우는 나를 영영 잃는 것이 두려워서 생긴 분리불안이다.
혼자서 해나가는 건, 녀석에겐 너무 익숙한 일이니까.
'시간이 해결···, 해 주려나?'
확신하기가 어렵다.
"잘 모르겠군. 선우가 보기에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나?"
"조금만 더 있으면 매일 삼시 세끼 먹고 나서, 양치질 잘했는지 입안 검사 맡으러 오겠네요."
"···그건 무슨 소리지?"
"그냥 세르펜스가 편한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세르펜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 성의 없이 대답한다고 느낀 거겠지.
"제가 다 큰 성인의 위생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멋대로 어린애 취급을 하더니, 자기 편할 때만 성인 취급이군."
저 얘기는 앞으로도 쭉 어린애 취급을 해 달라는 얘길까, 아니면 앞으로는 성인으로 대해달라는 얘기일까.
살짝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깨끗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본인이 그것으로 인해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이상 고칠 필요는 없어요. 아까 제가 세르펜스의 옷을 더럽혔는데, 혹시 기분 나빴어요?"
"그냥 옷을 갈아입으면 그만인데, 그것이 기분 상할 일인가?"
"만약에 바로 옷을 갈아입지 못할 상황이라면? 막 화가 나서 주체할 수 없고 불안하고 초조해질 것 같아요?"
세르펜스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럼 그냥 세르펜스의 천성이 깔끔한 걸 좋아하는 건가 보네요."
"그 말은 안 고쳐도 된다는 소린가?"
"제가 고치라고 말해도 세르펜스가 고치기 싫으면 안 고쳐도 상관없어요."
나야말로 언제까지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멀뚱멀뚱한 녀석의 표정을 봐서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로 하고, 그 창고 지하실은 어떻게 할 겁니까?"
"물건들은 버리면 그만이라지만···. 벽과 바닥의 얼룩은 새로 도색을 하지 않는 이상 창고로 사용하긴 힘들 것 같다."
이제 보니 이 녀석은 엄청난 효율주의자인 모양이다.
돈도 많으니 그냥 건물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짓는다거나, 그냥 내버려 둔다거나 하는 답이 나올 줄 알았지.
어떻게 하면 써먹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 나올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 집사에게 열쇠를 맡겨둘 걸 그랬나···."
녀석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곳을 향하기 전, 정확한 언급조차 꺼리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색칠했으면 진작에 깨끗해져 있었겠네! 잠깐 불러서 청소 용역 겸 도색공으로 채용할까요?"
"창고 건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방치뿐이다.
그래도 주변에 그런 흉흉한 고문 도구가 있는 건 좀 신경 쓰인다. 언제 한 번 들려서 거기 있는 물건들을 싹 다 치워버리기는 해야 할 성싶다.
'아까 올라가기 전에 아공간 주머니에 싹 담아와서 처분할 걸 그랬나?'
이것도 좀 아니다. 그런 건 버리는 게 더 골치다.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내놓으면 알아서 치워가는 것도 아니고, 버릴 기회가 올 때까지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는 건 더 찝찝하다.
'뭐, 언젠가는 버릴 기회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