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회
43.공작님과 암흑가의 악마 (2)
계속 넋 놓고 있게 놔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쳤지만···.
'그런데 뭐, 세르펜스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나쁜 놈들을 혼내줬으면 혼내 줬지, 잘못은 하나도 안 했다.
거리낄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풀어야지! 대답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궁금증을 오래 묵혀두면 이상하게 꼬이고 오해로 변모하여, 언젠가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을 깨워서 물어보길 잘 한 것 같다.
"그게 그러니까···. 일단 배경 설명부터 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우려나요?"
"그래 준다면 감사하겠소."
"외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흑가는 제국의 오랜 골칫거리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에 짱박혀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그 조사를 담당하게 된 게 세르펜스인데, 여차여차해서 찾고 보니 아주 가관이었던 겁니다. 악숭이가 기생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느낌인지 팍! 감이 오시죠?"
"아, 알 것도 같소."
대답과는 달리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본인이 안다고 말했으니 붙잡고 설명하기도 뭐 하다.
그리 중요한 대목도 아니니 대충 넘어가자.
"어차피 악마 숭배자들은 악마를 소환하려 할 테고, 범죄자들보다 일반인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판단이 선거죠. 그렇다고 그냥 암흑가를 내버려 두자니, 아까 말이 나왔던 노예라든가 마약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에 암흑가와 상관없는 이들이 피해를 보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세르펜스가 나서게 된 겁니···."
"시온은요?"
윈스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유지스가 또다시 손을 들어 올리며 나를 찾았다.
"네? 저요? 제가 왜요?"
"암흑가에 악마가 소환되리라 추측하고, 그곳을 관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은 시온이잖아요?"
"···예?"
갑자기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다 말고,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세르펜스를 향했다.
'지금 유지스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거지?'
내 눈빛을 받은 세르펜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신이 대신 설명할 테니, 유지스에게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 거다.
그렇게 일루미나티 회의에서 '손들기'가 공식 의사 표현으로 채택되었다.
"당시에는 시온이 신의 사자라는 것을 밝히기 전이었잖습니까. 시온이 자신이 한 추리라 말했던 것은 제가 했던 추측이었습니다."
"그랬던 건가요?"
"네, 제가 암흑가를 발견한 것은 시온이 저의 보좌관이 되기 전 일입니다."
어째서 유지스가 세르펜스의 암흑가 평정기 속에서 내 존재를 찾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가 암흑가에 악마가 소환될 것이라 말했기 때문에 세르펜스가 그곳을 접수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마터면 설정 오류가 생길 뻔했네!'
하도 여기저기 찔끔찔끔 말하고 다녀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얘기해 놨는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여러 설정이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더 복잡하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정리하든가 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실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밝히며 확언해주기 전까지는 제 추측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했으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 않습니까?"
세르펜스가 특유의 처연한 표정을 연기하며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 설정을 지켜주느라 구멍 난 자신의 설정을 메꾸기 위해 약을 치고 있는 거다.
"폐하의 명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죄스러웠으며, 과연 제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항상 의문스러웠습니다. 혹여 대의를 명분 삼아 범죄를 눈감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가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가 전혀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 거다. 실제로 그는 모순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황명을 어긴 것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구라겠지.'
장담할 수 있다.
기사인 윈스톤을 의식해서 황제를 향한 충성심을 꾸며내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사실 그 뒤에 덧붙인 말들도 그것을 꾸며주기 위한 보조 용언이라 봐도 무방했다.
"세르펜스는 자신의 결정에 좀 더 자신을 가져도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도 충분했는걸요. 암흑가를 통해서 세르펜스는 그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제가 여기 있잖아요?"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다독이듯 말하였다.
그녀가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는지, 세르펜스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그러게 자기비하 좀 작작하라고 말했을 때 들었어야지.'
그런 얘기는 하는 본인 마음도 슬프게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아끼는 이가 듣는다면 억장이 무너진다.
녀석은 오늘 좋은 교훈을 배워간 거다.
"저뿐만 아니라 세르펜스의 그 판단으로 많은 사람이 빼앗겼던 자신의 삶을 되찾았어요. 그러니···."
"아, 알겠습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세르펜스가 황급히 유지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무안함과 쑥스러움으로 붉어진 자신의 얼굴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그 얼굴을 마주한 유지스가 쿡쿡 소리 내 웃었고, 녀석은 열없이 차를 마시는 체했다.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다.
"···이건 무슨 상황이오?"
윈스톤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내게 조용히 귓속말로 질문했다.
"저희가 유지스를 처음 만났던 장소가 암흑가였거든요. 노예로 팔릴 뻔한 걸 세르펜스가 구해줬습니다."
나의 부가 설명을 듣고 나서야 윈스톤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참고로 대외적으로는 일루미나티가 암흑가의 지배자를 스카우트하고, 스카우트 된 암흑가의 지배자가 세르펜스를 일루미나티의 대변인으로 스카우트했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요?"
내가 반복 단어를 남발한 탓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윈스톤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같은 내용을 최대한 간추려서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암흑가는 진작에 일루미나티가 접수했고, 세르펜스는 7월쯤 일루미나티의 대변인으로서 스카우트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왜 그런···."
"복잡한 짓을 하느냐고요?"
"그, 렇소."
"비밀 결사 집단이잖습니까? 어느 정도 신비성은 갖춰야죠!"
내 대답에 유지스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세르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덧붙여 윈스톤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은 표정이었다.
"일루미나티는 제국의 공작인 제가 아닌 신의 사자인 시온을 중심으로 한 단체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어느 한 국가에 소속된 단체가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일루미나티의 핵심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자연히 일루미나티의 행보도 제국에 얽매이게 될 겁니다."
언제나 나서는 것은 아쉬운 사람의 몫이다.
세르펜스가 어째서 그런 설정을 만들어 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언젠가 소통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제가 대변인을 자처한 겁니다. 그저 말을 전달할 뿐이라면, 혹여 있을지 모를 불합리한 요구도 거절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차분하게 완급을 조절하며 말하는 목소리가 아주 귀에 쏙쏙 박힌다.
윈스톤도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군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를 표했다.
"그 외에도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그···, 크흠."
세르펜스가 자상한 주군의 모습을 연기하며 윈스톤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혔는지 헛기침을 해댔다.
그 모습에 세르펜스의 고개가 갸웃 기울여졌다.
"레드포드 경?"
"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쩜 저렇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는 티가 팍팍 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미심쩍긴 하지만 상대가 숨기려 함에도 캐묻는 것은 자신의 설정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걸까?
세르펜스는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암흑가에 가는 것은 저희 네 명뿐입니까?"
윈스톤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급히 질문을 던졌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말을 돌리려는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다지 궁금해 보이지도 않았다.
"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는 겁니까?"
잠깐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가 싶었으나,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금방 나왔다.
"아무래도 그곳이 과거 룩스메아 교단의 성지다 보니, 백부님께서 현재 그곳의 모습을 보게 되신다면 충격이 크실 듯하여···. 그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저택을 지켜야 하잖습니까."
세르펜스의 말대로, 전직 이단 심문관에게 그런 광경을 보여줬다가는 눈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공작저 사람들의 신변뿐 아니라 에일리히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두고 가는 것이 옳다.
'이런 생각도 할 줄 알고, 기특하네.'
물론 자신이 타락한 성지를 그냥 두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거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자신의 행동에 에일리히가 충격받고 실망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르펜스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어쨌거나 에일리히가 저택을 지켜준다면 여러모로 다행한 일이다.
적어도 '악마를 처리하고 왔더니, 집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같은 전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저도 질문이 하나 있는 데요."
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하자, 세르펜스가 말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언제 악마를 소환할 예정인지, 뭐라도 주워들은 거 있어요?"
"곧 악마가 소환될 테니 올해가 가기 전에 회의해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시온이잖은가?"
"대략적인 시기는 알긴 아는데 정확한 결행일은 모릅니다. 그 시기마저도 변수가 껴서 어떻게 될지 확실치 않고요. 그래서 그 얘기를 나누자고 회의를 제안했던 겁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가 그런 거였느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그런 거였다는 눈빛으로 화답했다.
"성검의 주인 일행이 합류하는 것은 그들로서도 달갑지 않을 테니, 시기 자체가 변하지는 않을 거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소환하려 하겠지."
"아, 그것도 그렇네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실상은 세르펜스에게 이상한 지식이나 주입하고 다니는 놈팡이에 불과할지라도, 성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마를 비롯해 그 일행의 무력도 상당하고.
여러모로 악숭이네 측에서는 성검 일행과 우리가 힘을 합치는 것을 막고 싶을 만도 했다.
"그럼 시기는 대략 1월 초에서 중반까지로 잡으면 되겠네요. 그런데 그래서요?"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암흑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예?! 뭐라고요?"
"···죄송하지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그런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와 유지스가 두 귀를 의심하며 세르펜스에게 되물었으나···.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들으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