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회
43.공작님과 암흑가의 악마 (4)
새해가 밝았다.
연초부터 햇빛 한 점 안 드는 지하 도시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 갑갑해진다.
일루미나티의 첫 합숙이 암흑가 따위에서 이뤄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은 햇볕을 쬐어야 하는데···.'
마지막 짐을 아공간 주머니에 담은 후, 무심코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그쪽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창문이 열리는 줄도 모를 뻔했다.
누가 기름칠이라도 해 놓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세르펜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태연하게 방 안에 발을 디뎠다.
"설마 제가 짐을 잘 챙겼나 감독하러 온 겁니까?"
"그런 건 아니다. 출발하기 전에···, 잠깐. 침대는 어디 갔지?"
창문을 닫은 후, 몸을 돌린 녀석이 뒤늦게 침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공간 주머니 안에요."
"···어째서?"
"어째서냐뇨? 사람이 잠을 자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세르펜스가 갸웃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도 그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침낭을 사는 걸 잊어서 그런 건가? 걱정하지 마라, 그럴 줄 알고 내가 선우의 것까지 챙겨뒀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침낭? 침나앙~?!"
"···어째서 반응이 그따위지?"
그러는 세르펜스야말로 어째서 말투가 저따위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저렇지 않았었는데.
"아공간의 주머니가 있는데, 침대같이 편한 잠자리를 두고 침낭을 가져간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당연하죠! 커다란 물건을 입구에 가져다 대기만 해도 호로록 빨려 들어갔다가, 후루룩 밖으로 튀어나오는 이 마법의 주머니는 이사 업계의 혁신이고 혁명입니다! 그러면서 사람 손은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해도 상관이 없다니! 이거 정말 물건이지 않습니까? 왜 이런 기술을 복원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복원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그들의 최후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이어질 말은 뻔했다.
빨려 들어간 자를 꺼내기 위해 무심코 손을 넣었다가는 똑같이 호로록 당해버릴 테니.
갑자기 손에 들려있는 주머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수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질문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어, 어쨌거나!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생물이며, 인간의 발전은 도구의 발전과 함께해 왔습니다. 이런 유용한 도구가 있으면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세르펜스가 '개소리지만, 신빙성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펜스가 잠자리 욕심이 없어서 그러시나 본데, 다른 사람들은 다 침대를 챙겨갈 겁니다."
"그건 아니다."
"아니지 않습니다! 내기해요? 효도권빵?"
"···빵?"
처음 들어보는 빵 이름에 녀석이 깊은 고찰에 빠져들었다.
설명해줄까 했지만, 어떻게든 맞춰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 기다림은 무척이나 짧았다.
이내 나의 평소 언행 패턴을 분석하여, '선우가 말하는 것이니만큼, 빵 이름이 아닐지도 몰라!'라는 결론을 도출해낸 세르펜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두 장 걸라는 뜻이다.
"오케이, 콜!"
이긴 거나 다름없는 내기를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 그럼 세르펜스도 얼른 가서 침대 챙겨 오세···앗! 잠깐만, 이런 방식이면 제 방에 침대를 하나 더 들여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가구가 꽉 들어차면 답답해서 놓지 않은 것 아니었나?"
"아닌데요?"
"······."
"와, 이 생각을 왜 이제서야 했지? 나 바본가?"
내 기똥찬 발상에 감탄하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진 눈꼬리 탓에 언뜻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침대를 가지러 가기 전에 선우에게 줄 것이 있다."
"줄 거요? 그냥 가는 길이나 도착해서 주시지, 뭐 하러 방까지 찾아오셨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뭔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을 줄 것 같은 예감에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세르펜스가 직접 찾아와서 줄 정도라면 보통 물건은 아니겠지!'
나는 녀석이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어 입구를 벌리고 손을 집어넣는 모습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다행히도 세르펜스는 호로록 당하지 않고 무사히 원하던 물건을 꺼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 물건은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크기의 맑고 투명한 보석이었다.
"헐, 대박, 쩔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서 그것이 가공된 게 아니라 원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 아름다움이 퇴색되었다는 건 아니다.
울퉁불퉁 각이 진 표면에 빛이 산란(散亂)하며 오색찬란하게 반짝였다.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방 안이 밝아진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가히 세르펜스급의 반짝임이다.
"마음 같아서는 가공을 해서 주고 싶었으나, 이것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드워프뿐인지라···."
"당연하죠! 이런 걸 드워프 장인이 아닌 인간의 손에 맡긴다면 그건 신성 모독입니다!"
나는 행여 지문이라도 묻을까 걱정되어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 위에 펼쳤다.
갑부펜스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맨손으로 보석을 만지작댔지만, 소시민인 나로서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성 모독이다.
"여기 올려주세요, 여기!"
"흐음···."
당장에라도 줄 것처럼 굴더니.
녀석은 나와 제 손에 든 보석을 번갈아 보며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거 치사하게! 제가 잃어버릴까 봐 그럽니까? 그럼 그냥 구경만이라도 시켜줘요!"
아무리 갑부펜스라도 선뜻 선물하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고가의 물건인가 보다.
하긴 저런 보석이 저만한 크기면 당연히 비싸겠지.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걸 왜 주는 거지? 사망 플래그인가?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이려는데, 세르펜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녀석이 보석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이 상태로도 작동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몸에 지니고 있는 편이 좋을 거다."
"예? 작동하다뇨?"
녀석이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옥 장판이나 게르마늄 팔찌 같은 건가?'
조금 전까지 신성해 보이던 보석이 사이비 점쟁이의 수정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수건 너머로 전해져오는 온기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그렇다고 믿을 뻔했다.
"오, 오오! 따뜻해! 과연 판타지 세계라 그런가? 손난로도 판타스틱하네요!"
추위를 잘 타는 시온의 육체를 걱정해서 이런 걸 구해왔는가 보다.
감탄하며 자체발열 보석을 손수건으로 감싸 볼을 비비고 있으려니, 녀석이 기괴한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본 것 아니었나?"
"시온도 귀족이랍시고 어디 가서 창피당하지 않게 보석 종류를 외워둔 것 같긴 한데,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시골 출신 귀족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볼 정도로 비싸고 귀한 사치품?"
내 답변이 글러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세르펜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신성 모독이라는 말은 대체 왜 한 건가?"
"그냥 신성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예뻐서?"
"······."
"근데 그게 왜···, 어···. 어! 잠깐만요, 이거 설마 신성석입니까?!"
녀석이 나를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발열석이 나았나?"
"아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사과를 해 보았지만, 불퉁하게 튀어나온 녀석의 입술은 안으로 들어갈 기미가 없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고개를 팩하고 돌려버렸다.
'그럴 만도 하지···.'
자연의 마력이 뭉쳐 자연 발생이 가능한 마석과 달리 신성석은 오로지 사람이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스턴트 마석처럼 마구 찍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못해도 6개월 이상···. 보통은 1년 정도 걸리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의지를 담아 신성력을 응축시킨 결과물이 바로 신성석이다.
또한 그 목적은 순수하고 선한 것이어야 하고,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만들어지지 않고, 도중에 그 의지가 흔들려도 신성석이 깨져서 그 안에 든 신성력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나 어쩐다나···.'
심지어는 기도 중에 잡생각을 조금만 해도 그 색이 뿌예지고 기능도 떨어진다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잘 만드는 건 더 어렵다는 뜻이다.
게다가 만드는 과정에서 의지가 반영되는 만큼 딱 그 목적으로만 기능하므로, 돌려막기 따위는 불가능하다.
충전하는 것도 제작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저번 납치 사건 때는 주지 않은 거로 봐서는 최근까지 만들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리고 나에게 줬다는 건, 그가 내 안전을 빌었다는 의미다.
무조건 싹싹 빌어야 한다. 이건 내가 다 잘못한 거다.
아이고, 내가 나쁜 놈이네!
"와, 어쩐지 신성하게 생겼다 했더니! 이야~, 정말 신성한 물건이었잖아?"
"······."
"세르펜스의 마음이 담겨서 그런가, 정말 따뜻하네요! 이렇게 쥐고 있으려니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난로의 기능이 마음에 드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거듭된 사과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세르펜스가 나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 용서를 받고 싶은가?"
"물론이죠!"
"용서를 받고 싶다면···."
"네, 네! 말씀하시죠!!"
"개처럼 짖어보든가."
"당연히 그렇게···, 네?"
내가 방금 대체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다.
양손으로 곱게 들고 있던 신성석을 한 손으로 옮겨 들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었죠?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용서를 받고 싶다면 개처럼 짖어보라 하였다."
나는 반대쪽 귀도 마저 후볐고, 세르펜스는 자신의 발언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무구한 표정 때문에 괴리감이 더욱 커졌다.
'휴마누스 이 자식! 대체 세르펜스에게 뭘 가르쳐 놨길래, 애가 저런 말을 하게 만들어?!'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지고 주사(朱砂)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게 되니, 나처럼 이로운 친구를 가까이하며 휴마누스 같은 방탕한 놈은 멀리함이 옳다.
"뭔가 이상한가?"
"당연히 이상하죠!"
"어째서지? 선우는 내게 고양이처럼 울게 시켰잖은가."
"······."
나 또한 세르펜스에게 있어 휴마누스처럼 붉은색 친구였는가 보다.
마치 붉은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날 베고 잔 베개처럼.
그렇게, 나는 세르펜스를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그, 그게···. 시키기는 했지만···!"
"그럼 뭐가 문제지?"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걱정되는 마음에 당부의 말을 건넸으나, 녀석은 되려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한껏 내려다보았다.
그냥 내가 개처럼 짖는 것이 부끄러워서 빼고 있다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용서는 안 받을 텐가?"
"왕! 왕왕! 멍멍멍!!"
"옳지, 옳지."
나는 최선을 다해 짖었고, 세르펜스는 나의 소울이 담긴 개소리에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버킷 리스트에 적어둔 일을 마침내 이뤄낸 듯.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줄곧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