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회
43.공작님과 암흑가의 악마 (9)
"그건 그렇고, 제국의 영지들은 모두 신성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잖아요. 그거 다 신성석으로 유지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도난 사고 같은 건 없어요?"
"모든 신성 결계가 신성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성석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으로 사용하겠지만, 보통은 성수를 매개로 유지되고 있지."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한 영지를 보호하는 결계이니만큼 경비가 삼엄할 것이다.
그런 곳에 목숨 걸고 숨어들었더니, 신성석은 어디에도 없고 성수만 찰랑거리고 있으면 무진장 허탈하겠지.
운 좋게 신성석이 있더라도 탁하고 흐릿해서 상품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그 또한 손해다.
그래도 시도할 놈은 시도하겠지만, 웬만한 놈들은 다 철컹철컹 당할 거다.
'그런데 신성석은 그냥 신성력을 불어넣어 충전하면 된다지만, 성수는 어떻게 관리하는 거지?'
어항 물갈이하듯 조금씩 성수를 교체할 모습을 상상하니, 신성함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벨론 영지도 상황은 비슷할 텐데, 어지간히도 영지 일에 관심이 없었나 보군."
세르펜스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사족을 덧붙였다.
머릿속을 뒤져보면 나오는 정보를 굳이 입에 담아서 의심을 사지 말라는 경고다.
"그건 아버지와 카론 형이 알아서 하겠죠. 아! 비비가 리벨론 백작령 전용 신성석을 만들어 내려나?"
"···그럴 수도 있겠군."
내 말에 세르펜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비비의 내용물이 사실은 시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성립된 대화다.
그것을 모르는 유지스는 '내 동생/피후견인은 천재야!'라고 말하는 팔불출을 보는 듯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비비가 이제 갓 한 살이 된 아기다 보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리는가 보다.
'잠깐만? 해가 바뀌면 나이를 먹는 건 내가 살던 곳이랑 똑같은데···.'
나는 그만 간과하고야 말았다.
이곳은 나이를 0부터 세기 시작하고, 내가 살던 나라는 태어난 즉시 1살을 먹고 시작한다는 사실을.
'이곳 나이 세는 법 기준으로 따지면···. 나, 세르펜스랑 동갑이야···?'
나는 곰곰이 [성검의 주인] 내용을 되짚어봤다.
그러고 보니 성검이 내려온 지 25년'째' 되는 해가 아니라, 성검이 내려오고 25년이 '흐르고'. 혹은 '지나서' 주인을 택한다고 표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좀 아리까리한데?'
읽은 지 오래된 건 둘째치고, 그딴 세세한 표현 같은 걸 기억할 리 만무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었나 싶은 느낌적인 느낌일 뿐.
옆에 앉아있는 세르펜스를 흘깃 곁눈질했다.
시선을 받은 녀석이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맑고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순수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좋아, 모르는 척하자!'
어차피 녀석은 (스물) 여섯 살이었다.
내 나이를 이곳 기준으로 세어도 내가 스무 살이나 연상인 것이다.
생일도 내가 더 빠르고, 지금 들어와 있는 시온의 육체는 확실한 스물일곱이다.
여러모로 따져 봤을 때.
내가 세르펜스보다 형이라는 것은 신 룩스메아가 와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다른 건 좀 그렇고, 세르펜스가 싫어하는 계피맛 사탕 정도는 걸 수 있다.
"프라시더스 영지는 어떤가요? 역시 세르펜스가 만든 신성석을 사용하나요?"
유지스가 손을 들며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질문을 받은 녀석의 어깨가 움찔 들썩이더니, 아래로 축 처졌다.
"아닙니다. 몇 번이고 시도는 해 봤지만···. 이미 비치된 신성석이 두 개나 있는 탓인지, 간절함이 부족하여 실패했습니다."
"두 개나요?!"
세르펜스의 답에 유지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한 신성석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보다, 그쪽에 더 신경이 쏠리나 보다.
방금까지 신성석이 없는 영지가 더 많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행한 일이다.
"백부님께서 소가주 시절에 만드셨던 것과 영지에 있는 교단 소속 보육원 원장님께서 기증해주신 것입니다."
그의 말에 푸근하게 미소 짓던 아멜리아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육원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바람이 담겨있는 것일까?
그리고 에일리히는···. 앞으로 갓일리히 님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신성력 충전하러 정기적으로 프라시더스 령에 들렸다는 거잖아?'
세르펜스 이 자식은 '큰아빠,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를 외치며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며 애교 부리지 못할망정.
백부님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너무 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매섭게 쏘아 보았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프라시더스 영지의 신성석이 아닙니다."
"앗, 그렇네요. 죄송해요."
녀석은 내 눈길을 외면하며, 유지스에게 본론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얘기가 옆길로 빠진 원흉은 따로 있었으나, 유지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사과하였다.
"내일 열리는 경매에 신성석이 올라오는 건 확실한 건가요?"
"아까 낮에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왔지만, 여전히 목록에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경매장에 참석하긴 해야겠네요."
세르펜스의 답변을 들은 유지스는 골똘히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 분명한 신성석을 노리고 오는 사람들이라면,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일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성석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어 온 사람들도 많겠지.
악숭이 놈들은 그때를 노릴 거다.
암흑가 따위에 드나드는 놈들이야 뻔할 뻔 자지만,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만도 없었다.
[성검의 주인]에서 암흑가와 엮인 귀족들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제국이 휘청거리다가, 결국에는 망해버리지 않았던가.
'악숭이 놈들, 머리 썼네···.'
이게 다 사람들 마음이 구릿구릿해서 그렇다.
서로서로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신성력을 가진 자들끼리 신성석을 만들어서 교환하면 될 일 아닌가.
신성석을 가지려는 욕심만 그득하니, 그게 안 되어서 모두가 불행한 거다.
인정 없고 각박한 세상 탓에 그 예쁜 신성석이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물론, 난 신성석이 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다들 신성석 없는데 나만 있어!
'암흑가 밖으로 나가는 대로 유지스랑 같이 감상해야지. 제온에게도 한 번쯤 구경시켜 줄까? 그리고 휴마누스를 만나면 반드시 자랑해야지!'
괜히 뿌듯해져서 아공간 주머니가 있는 가슴 쪽을 손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애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
"시온, 듣고 있는가?"
세르펜스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붙였다. 내가 딴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나 보다.
"예? 아, 예. 듣고 있고 말고요. 그러니까, 저기, 음···. 제가 뭘 하면 된다고요?"
"시온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여러분께서 경매에 참석해 계시는 동안, 저는 비밀 출입구와 게이트 쪽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대화 중이었어요."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세르펜스 대신, 유지스가 친절하게 오갔던 대화를 설명해 주었다.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매장 쪽으로 몰릴 테니, 추가로 들어오는 인원을 체크 하겠다는 얘기였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하면 구체적인 의사도 전달 가능한 그녀에게 적격인 임무다.
"동굴과 게이트가 있는 건물 사이에 거리가 꽤 될 텐데요?"
"그래서 동굴 쪽은 티에라에게 부탁하려고요. 아! 티에라는 제 친구인 흙의 정령이에요."
[성검의 주인]에 나와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처음 들은 것처럼 '아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람의 정령은 아이레, 불의 정령은 볼칸, 물의 정령은 마르. 그런 이름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유지스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고, 각자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이름이다.
"거리가 떨어진 만큼 감지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어차피 악마 숭배자들이 들어 오는 걸 확인하려는 목적이 크니까요."
"그런 거면 양쪽 다 정령들에게 부탁하고 유지스는 저희와 함께 있는 편이 낫지 않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악마 숭배자들이 꾸미는 일 중, 제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막아야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선연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혼자서도 괜찮겠습니까?"
세르펜스가 유지스를 확실히 받아들이긴 한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그러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불안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슬쩍 윈스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호위로 데려가는 건 어떠냐고 눈빛으로 묻고 있는 거다.
"제가 윈스톤 님을 데려가 버리면, 전투가 발생했을 때 시온은 누가 지키게 하려고요?"
"검을 휘두르는 건 한쪽 팔로도 충분합니다."
다른 팔로 나를 들고 싸우겠다는 의미다.
당연하게도 내 의견은 반영돼 있지 않았다.
적의 공격으로부터는 안전하겠지만, 내 반고리관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 테고, 결과적으로 나는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사태가 발생하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구조 요청도 하고, 도망도 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숨거나 도망칠 땐 혼자인 편이 더 나아요."
유지스가 세르펜스에게 안심하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세르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윈스톤 떠넘기기가 되어버린 것 같지 않아? 이거 괜찮은 건가?'
아니나 다를까. 윈스톤의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크게 침울해 한다거나 낙담하는 느낌은 아닌데, 그래서 더 좋지 않았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얼굴이다.
"그럼 저는 여차하면 윈스톤 경 옆에 붙어있으면 되겠네요?"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하자, 윈스톤이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겠소."
"감사합니다!"
윈스톤이 결의에 찬 눈으로 다짐하듯 말하였다. 무척이나 믿음직했다.
'그런데···. 어째 옆 통수가 조금 따끔거리네?'
훈훈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 할 유지스의 얼굴에도 난감함이 서려 있었다.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슬그머니 눈을 떴다.
예상대로다. 시무룩함과 배신감이 버무려진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 들고 싸우면 세르펜스도 불편하잖아요. 나쁜 놈들이 저만 노리고 공격하면 어떡하려고요? 저도 위험하지만, 세르펜스도 그거 막느라 다칠지도 모르잖습니까?"
"으음···."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은 그게 잘 안 되는가 보다.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두 눈은 여전히 울멍울멍했다.
"아니, 잘 생각해봐요! 세르펜스가 격하게 움직이면 저도 멀미 날 거 아닙니까? 한창 싸우고 있는데 제가 토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러운 것도 더러운 건데, 만약 세르펜스가 그걸 밟, 으읍!"
"아, 알았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말해라."
밟고 넘어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을 설명하는 것 보다, 녀석이 내 입을 틀어막는 것이 더 빨랐다.
역시 충격 요법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