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35화 (235/925)

235회

43.공작님과 암흑가의 악마 (10)

암흑가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경매가 열리는 것은 늦은 저녁이었건만, 내가 일어났을 땐 이미 유지스가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좁은 비밀 통로에서 악숭이들을 조우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숨겨진 출입구 쪽에 흙의 정령을 땅에 심으러 간 것이리라.

그리고 바로 게이트 쪽에서 잠복하겠지.

"식사는 어떻게 한대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세르펜스가 어째서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나에게 뭔가를 던졌다.

고개를 내려 무릎 위에 안착한 물건을 확인했다. 매우 익숙하게 생긴 가죽 주머니다.

나는 잽싸게 가슴팍을 더듬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쩐지 팔 움직임이 자유롭다 했더니만, 침낭 지퍼도 배꼽 언저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러니까···. 유지스가 나가기 전에 오늘치 도시락을 챙겨 줬으니, 칭찬해달라고 하신 거죠?"

막 잠에서 깬 직후였으나, 세르펜스 행동 분석 회로는 완벽하게 작동했다.

녀석의 턱 끝이 약 1.5도가량 치켜 올라갔다.

- 툭.

그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윈스톤이 새파란 예기를 발하는 거검을 손에 들고, 놀란 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있을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검을 닦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던 걸까?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옆에는 속이 빈 검집이 놓여 있었고, 발치에는 웬 헝겊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는 저게 떨어지는 소리였는가 보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건가? 지상이었다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이다."

내 해석이 완벽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했던 세르펜스가 시치미 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서둘러 머리맡에 던져뒀던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정말로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다.

"내가···, 이렇게나 나태해 졌다고?"

믿을 수 없었다.

오전 중 밖에 나갔다 오는 유지스와 세르펜스의 식사를 챙기고 배웅해 주기 위해, 낮잠을 잘지언정 늦잠은 자지 않았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그 기록이 깨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안 씻은 사람은 당신뿐이다. 경매가 열리기 전에 암흑가를 한 번 돌아볼 생각이니, 어서 씻고 와라."

허탈감에 잠겨서 시곗바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세르펜스가 자식 등교시키는 부모 같은 소리를 했다.

"어···, 저도요?"

"그래. 순찰이 끝나고 나면 곧장 경매장으로 향할 생각이다."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세르펜스 혼자 후다닥 돌고 오면 금방일 텐데.

이런 곳에 나와 윈스톤만 두고 나갔다 오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다.

"에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나는 반쯤 걸쳐진 침낭을 완전히 벗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어째서 다시 앉는 거지?"

"어차피 식사하고 나면 양치하러 갈 텐데, 한 번에 하려고요."

"······."

"제가 원래 좀 효율적인 사람이거든요."

거들먹거리는 내 말에 녀석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이 자리에 윈스톤만 없었다면, 조금만 효율적인 사람을 잘못 말한 게 아니냐며 비꼬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녀석은 2주가 넘는 시간을 동고동락했으면서, 여전히 윈스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 * *

전당포를 나서기 전,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확인했다.

침대는 물론이고 욕실에 늘어놨던 내 세면도구까지,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오는 일은 없겠지···?'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가 남았지만, 나름의 추억도 쌓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범죄자들의 도시는 사라짐이 옳다.

다음번엔 제대로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완벽한 호캉스를 즐기겠노라 다짐하며, 전당포를 빠져나왔다.

세르펜스의 말대로라면 거리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패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조용했다.

어떤 자는 몸을 사리며 시선을 피했고, 또 누군가는 먹잇감을 찾는 짐승처럼 눈을 부라렸다.

서로를 경계하며 조심조심 다니는 모습이 마치 폭풍 전야 같다.

"오늘 경매에 올라온다는 물건 때문일 거다."

세르펜스가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짤막하게 말하였다.

신성석은 상한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물품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막대한 금액의 돈이나 재화를 챙겨 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형성된 분위기라는 뜻이다.

우리를 노리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자도 있었으나, 그들은 이내 포기하고 새로운 먹잇감을 노리러 자리를 옮겼다.

내 양옆에서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는 두 사람 덕분이다.

우리는 암흑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없고···. 완전 허탕이네."

주워들은 얘기라고 해 봤자, 암흑가의 패권 다툼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누구네랑 누구네가 어디에 있는 무슨 사업장을 가지고 눈치 게임 중이라더라.

어제 전투로 큰 형님이 죽었는데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냐.

'그' 또라이가 아직 세력을 만들지 않았다던데, 그 밑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떠냐.

아서라, 그런 놈 밑으로 들어가면 고생문이 활짝 열릴 거다.

기타 등등.

'어차피 오늘이면 모두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될 텐데···.'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나는 이럴 바엔 경매장에 미리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고, 세르펜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에 응하였다.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경매장으로 향했다.

재작년에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던 것과 달리, 오늘은 정식 손님으로 입장했다.

"네, 티켓 여기 있으세요. 그럼 바로 자리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미리 끊어뒀던 티켓을 건네주자, 확인을 마친 직원이 그것을 돌려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어째서 한낱 종잇조각에 저토록 예우를 갖추는 거지?"

티켓을 돌려받은 세르펜스가 이상한 사람을 다 봤다며 내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당황이 묻어났다.

"그냥 서비스직의 고충이라고 생각하세요."

"···힘들겠군."

아직 경매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있었음에도, 집회장에는 선객이 꽤 있었다.

괜히 싸돌아다니다가 소매치기를 당하느니,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슬쩍슬쩍 그들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며 직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얼굴을 꼭꼭 숨긴 우리의 모습이 튀지 않을까 했으나, 다른 이들의 차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좌석들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시선이 하나둘 따라붙었다.

경쟁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맨 앞줄에 도착했다.

지정된 좌석은 중앙이 아닌 오른쪽 끄트머리였다.

'어차피 악숭이들이 나타나면 도망칠 게 아니라 싸워야 하니까, 앞쪽 가장자리의 표를 구한 건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었다가는 미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미아는 내가 될 것이다.

"원하시는 물건을 꼭 얻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직원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헛소리와 함께 떠나갔다.

오늘 참석한 손님 대부분이 신성석을 노리고 찾아온 사람들이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경매장에 올라오는 물품은 무조건 한 점씩이다.

경매장에서 모든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거 우리에게만 해주는 말도 아닐 거 아냐.'

즉, 피 터지게 가격 경쟁을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뱉어내고 가라는 소리였다.

돈독 오른 놈들 같으니.

나는 멀어지는 직원의 뒷모습을 노려봐 주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린 저녁이나 먹죠."

"···먹고 들어올 걸 그랬나?"

"······."

세르펜스는 후회스럽다는 듯 말하면서도, 내가 건넨 도시락을 얌전히 넘겨받았다.

윈스톤은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으나 세르펜스도 받은 것을 거절하기 뭣했는지, 결국 받아 들었다.

공공장소에서 음식 냄새 풍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만, 뭐 어쩌랴.

무법지대인 암흑가에서 공중도덕을 따지는 게 더 웃기는 짓이다.

'사람도 거침없이 죽이는 놈들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이 정도쯤이야.'

즉석에서 요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시락 까먹는 것 정도는 애교다, 애교.

하지만 내 옆에 앉은 두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달랐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도시락을 공격적으로 해치워 나갔다.

특히 윈스톤은 몇 입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텅 비어버린 통을 내게 돌려주었다. 굉장한 속도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저 정도 속도는 내지 못했었다.

"큽···, 쿨럭, 쿨럭!"

윈스톤의 빈 도시락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속도가 느린 세르펜스가 급하게 먹다 사레들린 것이 틀림없다.

"물 드세요, 물!"

나는 얼른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을 꺼내서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세르펜스는 그것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내게 반절 이상 남은 도시락과 함께 빈 물통을 반납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억지로 먹이면 체할 것 같아서 대신에 버터 쿠키가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녀석은 그것조차 눈치가 보였는지, 소리 없이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커험···!"

한창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윈스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세르펜스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호, 혹시···. 도시락 더 있습니까? 저희 주인님께서 허기가 지신다기에···. 물론 돈은 드리겠습니다."

취식 행위를 막으러 온 직원인가 했더니 그냥 배고픈 주인을 둔 시종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경쟁자에게 돈을 넘겨주는 꼴인데,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가 보다.

마침 잘 됐다.

어차피 오늘이면 암흑가 생활도 끝날 것 같고 도시락도 슬슬 물려가던 차였다.

나는 우선 윈스톤을 자리에 앉힌 후,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가격 선 제시요."

"예, 예?! 그게···, 일단 메뉴를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되고 말고요!"

나는 새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어 보여줬고, 요리조리 상체를 움직이며 음식을 살펴본 시종은 12만 아스를 주고 도시락 세 개를 사 갔다.

어느 귀족가 시종인지는 몰라도 질 좋은 재료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 시종을 시작으로 도시락은 정가 4만 아스에 불티나게 팔려 매진되었고, 여기저기서 음식 냄새가 폴폴 풍겼다.

"이게 무슨 맛있는 냄새지?"

모두의 식사가 끝나고 뒤늦게 입장한 이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허기진 배를 감싸 쥐었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세르펜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전보다 배가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살찐 것 아닌가?"

"착각하신 겁니다. 방금 밥 먹어서 그래요."

"그런가···?"

세르펜스가 갸웃거리며 내 손바닥 위에 버터 쿠키를 올려 주었다.

"크, 크흠···!"

"왜요? 같이 드실래요?"

"···아니오. 괜찮소."

헛기침 소리를 내길래 자신에게도 군것질거리를 달라는 신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는가 보다.

윈스톤은 내가 주는 솔트 비스킷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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