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38화 (238/925)

238회

43.공작님과 암흑가의 악마 (13)

'저렇게 바로 악마를 소환할 거면 혈옥은 대체 왜 전시했대?'

자랑하기 위함은 아닐 테니, 악마가 바쁘다고 말했던 것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시했던 혈옥은 다른 용도고, 이곳의 사람들을 제물로 저 악마가 소환되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왜 바쁜 거지?'

악마가 소환되면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음에도, 유지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 또한 신경 쓰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마냥 좌시하기는 어렵다.

잠시 멈춰 섰던 세르펜스가 다시 움직였다.

흩어지는 사람들 틈으로 파고든 그가 악마의 앞에 도달한 것은 일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악마를 베어버릴 듯 달려나갔던 그는 또다시 멈춰 섰다.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악마가 도망치던 사람의 모가지를 낚아채서 방패처럼 내밀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람을 못 죽이는 건가?"

세르펜스가 공격하길 주저하자, 악마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마치 '네 주제에?'라고 묻는 듯한 조롱이 담겨있었다.

헛소리라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걸렸다.

'아까 마인이 된 스콜피온을 죽이지 않고 머뭇거리던 이유가, 설마···.'

내가 보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녀석은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상한데? 분명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악마가 주절대는 틈을 노려 세르펜스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찼다.

인질을 피해서 그 너머의 악마에게 검을 찔러넣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악마는 세르펜스의 검이 도달할 장소에 인간 방패를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인질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멈춰선 검을 보며, 퍼렇게 질린 얼굴로 몸부림쳤다.

그래 봤자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 안개에 의해 묶여있는 탓에, 대롱대롱 흔들리며 끅끅 괴로운 숨을 겨우 삼킬 뿐이다.

'안개를 사용하는 악마라···.'

[성검의 주인]에 나온 암흑가의 악마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특징도 뭣도 없는 '쩌리' 그 자체였다.

처음 등장한 악마가 너무 맥없이 당한 탓에 당시 독자들이 얼마나 어리둥절해 했던가.

그러는 와중에 암흑가의 진정한 주인이 세르펜스였다는 것이 밝혀졌고, 휴마누스는 그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악숭이네가 세르펜스를 스카우트해서 데려가는 거로 1부가 끝났었지?'

즉, 암흑가에 나타난 악마는 1부 보스인 타락펜스의 임팩트를 강화하기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세르펜스와 대치하는 저놈은 다른 악마다.

악마는 인질이 죽지 않을 정도로 손아귀 힘을 조절했고, 그럴수록 공중에 매달린 사람은 더욱 크게 버둥거렸다.

손아귀에서 벗어내려는 그 몸부림은 오히려 악마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인질이 불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통에 세르펜스가 그를 피해 검을 찔러 넣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악마는 세르펜스가 멈칫한 순간을 노리고 그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듯한 가벼운 동작. 하지만 단검은 마치 탄환처럼 쏘아져 녀석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갔다.

세르펜스는 고개를 살짝 꺾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하지만 이미 내구도가 바닥난 단검에 억지로 마기를 밀어 넣은 탓일까?

별안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터져버렸다.

녀석은 그 또한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신성력을 몸에 둘러 비산하는 쇳조각을 막아냈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잘 보이냐···?'

재작년 프그누토 백작과 세르펜스가 대련할 때만 해도 뭐가 뭔지 하나도 안 보였었는데.

아무리 동체 시력 훈련을 열심히 했다지만, 세르펜스가 멈칫거리고 있는 것을 참작하더라도 그 동작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몸이 가볍고 활력도 넘쳤다.

'아까 머리를 눌렀을 때, 버프도 같이 걸어 준 건가?'

신성석의 효능일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아직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으니 그건 아닐 거다.

아공간 주머니 특성상. 그 안에 있는 성수가 흑마력을 흡수하는 것은 가능해도, 신성력이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확한 원리는 나도 모르겠다. 삼투압 같은 거려나?

아무튼 애먼 공격에 맞지 말고 여차하면 보고 피하라는 의도인 것 같다.

마음은 고맙지만, 신성력 낭비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차피 보호 결계 안에 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지금으로선 싸움 구경이 원활해지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생각난 김에 신성석도 꺼내 놓고 있을까? ···아니다, 그만두자.'

신성석을 노리고 온 놈들이 천지 삐까리다.

괜히 꺼냈다가 악숭이가 그들의 욕심을 자극하기라도 한다면, 그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윈스톤이 바로 앞에서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섣불리 허튼수작을 부릴 사람은 없을 테지만, 흑마법에 걸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왜지? 이깟 놈들은 죽어도 아무 상관 없는 것 아니었나?"

세르펜스의 무시에도 악마는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바쁘다던 놈이 왜 저렇게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누가 소문이라도 낼까 봐 그러나? 그런 거라면 이곳에 있는 이들을 싹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나는 개소리라 생각하고 넘겼으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히익, 겁에 질려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출구로 나가는 것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단상 쪽에 떼거리로 몰려든 사람들이 기겁하며 벽을 쾅쾅 두드려 댔다.

오러까지 동원되었음에도 벽에는 작은 생채기만 남을 뿐. 무너지거나 부서질 징조는 없었다.

악숭이 놈들이 뭔가 수를 쓴 것이 틀림없다.

이번에도 세르펜스는 악마의 말을 무시했다.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피하고, 날아오는 검은 구체를 베어냈다.

악마의 말에 힌트를 얻어 방어를 도외시하며 달려드는 경비원을 기절시켰다.

악마의 난입으로 기사들이 우르르 몸을 뺀 탓에 세르펜스 혼자 놈들을 상대하게 생겼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이 자존심도 없는 악마놈아! 일대일은 쫄리냐? 응?!"

"당연히 쫄리지!"

"···어, 그, 그래?"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악마의 태도에 당황인지 황당인지 모를 감정이 솟아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공사장을 방불케 하던 쾅쾅거리던 소음이 잠시 멈췄다.

"시온 경···!"

악마 등장 이후, 세르펜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경이라는 호칭까지 붙인 거로 봐서, '날 빡치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라는 뜻이 분명했다.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악마의 시선을 끌어서 위험에 노출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래, 네가 있었구나?"

악마가 히쭉 웃었다. 평범한 웃음일 뿐인데, 왠지 모를 섬찟함이 느껴졌다.

이것은 불행일까, 다행일까?

놈의 관심을 잡아끈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거기 너···, 원래는 우리 쪽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지?"

무의식중에 시선이 윈스톤을 향했다. 그리고 악마의 말에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대던 윈스톤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실수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척 시선을 회피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우리는 널 해치려던 게 아니었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단련을 시키려 했을 뿐. 그 과정에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건 사과하마.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주려던 것이었는데···."

악마 놈이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나 할 법한 거지 같은 합리화 발언이다.

'스카우트에 환장한 놈들 같으니!'

악숭 세력이 흑마법사가 주류라서 실력 있는 전위가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구질구질하다.

세르펜스가 악마의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느닷없이 발밑에서 솟아오른 창날 때문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세르펜스! 일단 쫄보 악마랑 경비원들은 무시하고 흑마법사들부터 해결하세요!"

"하지만···."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녀석의 머릿속은 이미 악마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설득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악마의 말에서 무슨 가능성을 본 것인지···.

"네 잘난 주군이 진심으로 너를 기사로 여기고 있다 생각하는가? 틀렸다! 어디까지나 네가 우리의 편에 붙을 것을 우려하여 감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 이거구나.

이건 많이 걱정할 만했다. 그러길래 진작 좀 친해질 것이지.

'하다못해 나한테 오는 공격들을 윈스톤에게 맡겨주기라도 했으면, 악마 놈이 이렇게 쉽게 눈치채지는 못했을 거 아냐!'

녀석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심지어 그 재앙은 실시간으로 커지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세르펜스는 동요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일격을 가할 수도 없으면서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무시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되는지 자꾸만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행동까지 굼떠졌다.

'야, 인마, 너···! 이쪽 보지 마, 눈 안 돌려?'

열심히 표정과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소용이 없다.

악마의 말보다 세르펜스의 그런 행동이 윈스톤을 흔들어 놓았다. 멍해진 표정으로 윈스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악마는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보아라, 너를 향한 저 불신을! 우리는 그렇지 않다. 너를 믿는 주군의 앞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주군의 적을 베어 넘기는 날카로운 검이 되고 싶지 않으냐?"

전부 개소리다.

고기 방패로 내세워 검과 화살받이로 쓰고,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하도록 내몰겠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우리 집에 오면 매일 산책도 시켜주고, 같이 공놀이도 해줄게.'라고 꼬시는 편이 더 혹할 것 같다.

"그분께서는 너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 네 진정한 주군이 되어주실 것이다!"

"아까부터 너너거리는데, 이름은 알고 스카우트하는 거야?"

"···뭐?"

"스카우트의 기본이 안 되어 있네, 기본이! 모르면 알아오기라도 했어야지?"

[성검의 주인]에서도 다들 흑기사라 불러대던 것이 떠올라 살짝 찔러봤더니.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놈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마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윈스톤 경, 악마 따위가 하는 말은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놈들 주특기가 이간질인 거 아시잖습니까? 다 우리 사이를 틀어 놓으려는 수작입니다."

"윈스톤 경이라 했는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은 것은 그분께서 네게 새로운 이름을 내려주실 예정이라, 이전의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다!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 따윈 없다. 그저 세 치 혀로 논점을 흐리고 있을 뿐이지 않으냐?"

뭐 이런 상도덕 없는 악마 새끼가 다 있나 싶다.

마왕에게 보고도 안 하고 멋대로 그런 공략 내걸어도 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자, 흑기사여! 우리는 너와 같은 충실한 기사를 간절하게 바란다! 당장 저 결계를 부수고 그자를 우리에게 넘겨라!"

악마 놈이 말하는 '그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쩐지 24롤 두루마리 화장지에 붙어있는 행사용 키친타올이 된 것 같다.

윈스톤과 세르펜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로 모자라 나까지 챙기려 하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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