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회
45. 공작님을 훈육하는 방법 (2)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윈스톤에게 고개를 푹 숙이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주군의 사과에 윈스톤은 어쩔 줄 몰라,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제가 선배님이나 위리디아 님···."
"유지스요."
"···유지스 님에 비해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유지스가 호칭 정정을 신청하기 무섭게 그것이 반영되었다.
윈스톤은 말을 수정하면서도 얼떨떨한 기색이다. 그게 지금 중요한 문제인가 의문스러운 거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유지스는 매우 흡족해하였다.
"알고 계셨다면,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 겁니까?"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윈스톤에게 질문했다.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어째서 그동안 묵묵히 따라왔던 것인지. 그것을 묻고 있는 거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경매장에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을 증명하여 주군의 신임을 쟁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그가.
지금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세르펜스의 눈빛이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 차갑게 가라앉을 즈음.
"···두려웠습니다."
윈스톤의 입이 열렸다.
"주군께서는 저 같은 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하신 분이기에, 제가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그래서 저를 내치실까,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기사 윈스톤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었다.
본인의 나약한 마음을 말하는 그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굳건하고 강인해 보였다.
외모가 아닌 표정이.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저는···. 레드포드 경께서 알고 계시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윈스톤에게 강하다고 지칭된 세르펜스가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자격이 없어 내쳐져야 할 사람은 레드포드 경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저에겐 숭고한 의지도, 강인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무력이라 할 수 있으나, 그마저도···.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늘 같은 사태만 야기할 뿐입니다."
윈스톤이 먼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고 밝힌 덕분에. 앞서 울고불고하며 못 볼 꼴을 이미 다 보인 탓에.
세르펜스가 자포자기하듯 말하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누구를 책임질 수 있는지."
녀석은 자신 없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자존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고, 자괴감만이 가득했다.
"그 악마의 말대로, 저는 경을 제 가신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자신에게 확신이 없고 불안정한.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시온을 섬기길 바랐습니다."
세르펜스의 말에 유지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벙긋거리는데, 나는 세르펜스가 아니라 독순술 따위는 익히지 못했다. 그래도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추자면 저 말이 진짜냐고 묻는 걸 테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기비하의 끝을 달리는 세르펜스를 윈스톤이 멈춰 세웠다.
"주군의 검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검을 든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일 겁니다. 주군께서는 자신의 정신이 나약하다 말씀하셨지만,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예로부터 전해져온 기사의 신조(信條)에 따르자면, 검을 익힌다는 것은 곧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의 무력이 강하기 때문에 정신력 또한 강할 거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세르펜스가 마치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윈스톤을 비난한다기보다는.
자신은 그저 강대한 신성력을 타고났을 뿐. 노력을 통해 차근차근 힘을 쌓아온 다른 이들과는 다르노라, 스스로를 폄하하는 말이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급하게 손사래를 쳐 세르펜스의 말을 부정한 윈스톤이 말끝을 흐렸다.
고민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주군께서 종종 제 검을 봐 주셨잖습니까. 그때마다 느껴졌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완벽한 자세라든가, 휘둘러지는 검의 깔끔한 궤적이라든가···. 그리고 제 검의 잘못된 곳을 짚어주시고, 그 개선 방안까지···."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세르펜스가 횡설수설하는 윈스톤의 말을 끊었다.
"그냥, 주군의 검술에서 수많은 노력의 흔적이 느껴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가르칠 수 있는 정도라면, 얼마나 고민을 하며 쌓아간 경지일까···. 검을 든 자로서, 그런 분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강제로 짊어진 책임에 쫓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원하지 않는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을 거듭하여 이런 경지를 이룩하신 분을, 어찌 나약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더니, 말만 잘한다.
말주변이 없다는 말은 그저 변명일 뿐.
사실은 제 뜻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말을 전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이 자기 생각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뜻을 헤아려주지 않는 네가 나빴다며,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이다.
'뭐든 할수록 느는 법이고, 말 또한 마찬가지니까.'
정말로 간절하다면.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리하고, 가다듬어서. 어떻게든 상대에게 제 의사를 전달해내지 않을까?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부족하다면, 책을 읽든 사전을 뒤적이든 알아서 표현력을 기르겠지.
만약 간절함이 있음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말주변이 없다 탓하기 전에.
말을 하고 난 이후의 결과가 두려워서,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말문을 틀어막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 마땅하다.
"정말 주군께서 약하신 분이었다면 그러한 책임을 버리고 도망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것 말고는 배운 것이 없어서···.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해서···."
뼈에 사무친 자기혐오란 이런 것일까?
그냥 '내가 이렇게 대단해!'하고 받아들이면 자신감도 생기고 마음도 편할 텐데. 부득불 그것을 부정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녀석이 못내 안쓰럽다.
세르펜스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윈스톤이 당황한 얼굴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녀석의 손등을 가만가만 토닥이며 말을 걸자, 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암흑가 일은 예전부터 준비해 왔던 거고, 제국 내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계속해서 '이후'의 일을 생각해 왔잖아요. 악마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 외국을 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왔잖아요."
"···그랬, 지."
"이제는 쉬는 법도 알고, 일보다 재밌는 것도 알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아는데도. 다른 이들이 세르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성검의 주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어요. 자신의 주변만 지키면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띵까띵까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잖아요."
"그건···."
세르펜스가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세르펜스, 그거 압니까?"
"···무엇을 말이지?"
"선택의 날. 만약 성검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세르펜스를 비난하고, 당신이 그로 인해 힘들어한다면. 세르펜스의 무력이 뛰어나고, 이 세상에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도망칠 생각이었습니다."
"···뭐?"
내 깜짝 고백에 녀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절로 벌어진 입과 크게 뜨여진 눈.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스와 윈스톤도 적잖이 놀란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 그런 말은 없었잖은가?"
"대륙, 지키고 싶다면서요? 그리고 휴마누스가 그곳을 희생해준 덕분에 여론도 나쁘지 않았고."
"으, 음···. 그랬지."
"네, 아주 숭고한 희생이었죠."
"그쪽이 아니···, 아니다."
내가 창문 너머의 먼 산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말하자, 녀석이 그 얘긴 그만하자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얘기는 그만두고···. 도망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것 먼저 설명해라."
"말 그대론데요? 변장하고 사람 없는 동네에 짱박혀서 평생 놀고먹을 생각이었죠. 가는 길에 라드라바의 유산도 좀 슬쩍하고."
내 눈부신 계획성에 할 말을 잊었는지, 세르펜스는 '허···.'하는 바람 빠진 소리를 흘리며 눈만 끔벅거렸다.
"시온, 신의 사자가 그래도 되는 거예요?"
"네, 저는 됩니다. 세르펜스를 우쭈쭈해주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라서요. 직접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원래 신탁이라는 게 두루뭉술 대충 던져줄 테니, 입맛에 맞게 알아서 끼워 맞추라는 의중이 담겨 있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신탁의 진실을 알아버린 유지스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정신을 잠깐 놓았던 세르펜스가 '또 선우가 헛소리를 하는군.'이라 말하는 표정을 지으며 정신을 되찾았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 얘기를 어째서 지금 하는 거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세르펜스가 더 강한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매일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세르펜스의 반문에, 윈스톤이 입을 떡 벌리며 '아···.'하고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탄성을 흘렸다.
고개까지 끄덕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오랜 의문이 풀린 듯한 반응이다.
"그거랑은 별개죠. 나이가 어려도 심지가 굳을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죠. 어린 것과 여린 것과 약한 것. 그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간혹 있잖아요? 어린아이가 어른을 위로해 준다거나. 마음이 여려서 남들에게 모진 말 하나 못하면서, 막상 불의를 마주하면 참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과연 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 예. 그렇다고 칩시다. 일단은 예시를 든 거니까."
"계속 대화가 헛돌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가?"
"그러는 세르펜스야말로 언제까지 자기 비하를 계속하실 겁니까?"
녀석이 불만스레 입을 샐쭉 내밀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너무 치사한 것 아니냐고 시위하는 거다.
"그래서 도망간다는 선택지가 생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책임이고 뭐고, 전부 버리고 자유를 찾아 훌쩍 떠나고 싶으세요?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노력하실 겁니까? 어느 쪽이건 저는 비난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골라 보시죠!"
"···당신은, 정말."
세르펜스가 하아,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의 등이 작게 오르내렸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금 이 삶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것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