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65화 (265/925)

265회

49. 공작님과 드워프 장인 (6)

"앞으로 저와 함께 더욱 열심히 노력해 봅시다."

세르펜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검술 수련에 박차를 가하자는 얘기일 뿐인데, 어쩐지 지난날 꿈속에 나온 타락펜스가 함께 타락해 달라고 말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크레아토가 또다시 허억 하며 숨을 들이켜지 않았더라면, 꿈인가 하고 세르펜스의 뺨을 꼬집어 볼 뻔했다.

'아, 엄청 빡셀 것 같은데···.'

졸지에 검술 수업 커리큘럼이 짜였다.

분명 검을 사러 왔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검술 교습소에 앉아있었다.

"이제 얘기는 다 끝났나?"

"예. 죄송합니다, 갑자기 관련 없는 얘기로 시간을 빼앗아서···."

"전혀 그렇지 않네! 영감이 마구 샘솟는, 아주 값진 시간이었어!"

크레아토가 신성석을 들지 않은 빈손을 내저었다.

그에 세르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금은 어느 정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진 세르펜스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지만, 어쩐지 먹고 떨어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신성석을 맡기면서 잠적 탈 리는 없고. 그냥 전액 후지급으로 합세."

"혹시라도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있다면 제국의 프라시더스 가문에 연락하시면, 최대한 구해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으잉? 자네들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생각인 건가? 이 아름다운 신성석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 과정을 보지 않을 생각인 게야?!"

세르펜스의 말에 이상을 느낀 크레아토가 절망적이라는 듯 말하였다.

아름다움을 함께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세르펜스가 가버리는 게 아쉽다는 마음이 더 크겠지.

"잠시 일이 있어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

"어디에?!"

세르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레아토가 빠르게 질문했다.

표정, 말씨, 목소리. 그 어느 것 하나 다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

"프뤼···."

"프뤼네 왕국이라니! 거긴 너무 멀지 않은가! 왕복으로 다녀온다 치면, 검이 거의 완성 될 때쯤에나 돌아올 텐데···."

말이 끊기긴 했어도 빠른 대화 진행 속도가 마음에 드는지, 세르펜스의 표정에 불만은 없었다.

얘가 휴마누스 이후로 다른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꺼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만큼 크레아토가 많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사람이 말이야, 나처럼 정도를 알아야지!'

하지만 그는 세르펜스에게 멸시받고 싶어 했다. 만약 그걸 염두에 두고 한 언행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놀라운 계획성에 박수 칠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저도 뛰어난 장인의 실력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놓쳐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도 안타깝지 않은 주제에,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치는 듯한 표정을 꾸며내는 모습이 실로 감탄스럽다.

"그, 그런데 왜···."

"사람을 구하는 일입니다."

"마, 많이 급한 일인가?"

사실 그렇지는 않지만, 세르펜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급한 일이었으면 테라룸 왕국을 들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녀온 후에나 들리지···."

크레아토가 말끝을 흐렸다.

그 말 뒤에는 '그랬다면 검이 완성되는 동안, 주기적으로 세르펜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저희가 그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 됩니다."

사기의 서두를 여는 소리다.

세르펜스는 지난날 아니마에게 했던 설명을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악숭이의 양동 작전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그거 말이다.

"허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구먼."

대의를 위해서라는 데 어쩌겠는가.

크레아토는 허탈한 표정으로 슬픈 현실을 받아들였다. 의욕이 과도하게 꺾인 것 같은데,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검을 만드는 데 지장이 없어야 할 텐데···.'

신성석의 아름다운 광채가 그를 위로해주길 바랄 뿐이다.

"완성된 검은 직접 찾으러 오는 거겠지?"

"네.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숨기며, 세르펜스가 대답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버, 벌써 가는 건가?!"

"시간이 늦었습니다. 더 머무르는 건 실례···."

"실례라니, 가당치도 않네! 아, 그래! 아예 내 집에서 머무르는 척하는 게 어떤가? 바로 여기 위층일세! 손님 방도 있다네!"

저 말은 오늘 이곳에서 머물다 가라는 말과 상통했다.

어지간히도 세르펜스를 빨리 보내고 싶지 않았나 보다.

"누군가 자네를 찾아온다 해도, 작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내가 쫓아낼 수 있지 않은가?"

"어?! 그거 괜찮은데요?"

듣고 보니 꽤 솔깃한 조건이라 그렇다고 말한 것뿐인데, 세르펜스가 입 좀 닥치라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내 입을 떠난 뒤.

형체가 없는 소리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봐야 오늘 하루뿐 아닌가?"

"하지만···."

"어허, 호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야."

호의가 아니라 사심인 것 같다는 말을, 대외펜스는 차마 하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설정값에 패배한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일 출발 전에 창고도 좀 보고 가게."

"호의는 감사하나 길이 좀 급해서···."

"내 자랑하려고 보자고 하는 게 아니네. 자네, 악마 숭배자와 싸우러 간다면서 그런 검을 들고 갈 생각인 건가?"

"네···?"

"빌려주겠네. 자네 손에 딱 알맞지는 않겠지만, 내게 보여줬던 검과는 비교도 안 될걸세."

크레아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르펜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개인 창고에 모셔둔 컬렉션을 빌려주겠다는 것인지, 의심하는 거다.

"아, 대여료는 얼마나···."

"내가 내 소중한 아이들을 돈 받고 빌려주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자신의 컬렉션에 가치를 매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 건 잘 알겠으나, 무료로 빌려주는 건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호의일 뿐이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무사히만 돌아오게나."

세르펜스가 다치지 않고 무사해야, 녀석의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그게 사실이겠지.

어떤 이유건 간에 그의 호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나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에게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니다.

특히, 무기를 빌려준다는 건 우리의 안전도 그만큼 보장된다는 뜻이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감사합니다."

갈등하는 듯했던 세르펜스도 결국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분명 오늘 하루 머물 장소를 구한 사람도, 한동안 쓸 검을 빌린 사람도 세르펜스건만. 그것들을 제공하는 크레아토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작업은 내일부터 들어가겠네."

우리가 들르기 전까지 작업했으니, 그도 쉬어야 할 테지.

그런가 보다 하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올라감세. 자네들, 혹시 술은 좀 하나? 작업이 끝나면 마시려고 준비해둔 술이 있는데,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들지 않겠나?"

어떻게든 세르펜스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려는 수작처럼 보인다.

문득 든 의문에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으잉?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가?"

"음! 으으음! 읍읍!"

"······?"

내가 말은 안 하고 읍읍거리기만 하니, 크레아토가 나를 미친놈 보는 눈으로 바라봤다.

억울하다. 그저 내기의 벌칙을 수행한 것뿐이건만.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닥친다고 하지 말고, 10초만 닥치겠다고 할걸!'

속으로 후회하며, 한 손으로 세르펜스를 툭툭 치면서 다른 손으로 내 입을 가리켰다.

이런 내 모습을 세르펜스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보지만 말고 좀···!

"저놈은 대체 왜 저러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게 닥치라는 눈빛을 보낼 땐 언제고, 세르펜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유지스뿐이다.

나는 유지스에게 도움을 바란다는 눈빛을 보냈다.

"세르펜스가 엘프가 아니라는 걸 맞추는 사람이 있는지 내기를 했거든요."

"아아~, 그런 모습이었구먼?"

"네. 세르펜스는 들킬 거라는 데 걸었고, 시온은 들키지 않을 거라는 데 걸었어요. 만약 시온이 이기면 세르펜스가 시온에게 형이라 부르고···."

"아까 보좌관이라 소개하지 않았나?"

세르펜스가 내 검에 신성석을 달겠다고 했을 때, 말하긴 했다.

그냥 지나가는 얘기일 뿐이었는데 잘도 기억하고 있다. 크레아토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그게 뭐 어떠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네, 뭐···."

유지스도 뭐라 말을 해야 모르겠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아꼈다.

"어쨌든 내기는 천사 공작이 이겼다는 게지?"

"네, 그래서 시온이 입단속하기로···. 아! 시온이 평소에 말을 좀··· 험하게 하거든요."

대신 설명해주는 건 감사하나, 마지막 말은 유언비어다.

내가 말을 험하게 해 봤자 얼마나 험하게 한다고!

"제 상관에게 형이라 불러달라 할 정도면 안 들어봐도 훤하지."

이번만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수긍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세르펜스가 입을 열게 허락해 주겠지.

"그런 것보단, 안전을 걱정해서죠. 시온이 좀···. 여기저기 싸움을 걸고 다니는지라···."

유지스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말에 침묵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기 결과를 받아들이는 나의 공정함 때문이다.

수학 미제 문제를 풀어냈지만, 지하철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리고 지면이 부족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움이 바로 이런 것인가 하노라.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지금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했길래 자진해서 입을 닫고 있는 건가?"

"세르펜스가 조용히 하라고 시키면, 말을 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가 조건인데. 지금은 왜 닫고 있는 거죠?"

크레아토와 유지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유지스는 세르펜스가 내게 눈으로 닥치라고 한 걸 못 봤나 보다.

억울한 마음에 나는 세르펜스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버릇도 만만찮게 험한 것 같구먼."

나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사람을 향해 삿대질하는 건 나쁜 행동이기 때문이지, 찔려서 그런 게 아니다.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생판 남인 크레아토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계속 나를 닥치게 둘 수는 없었는지, 녀석이 내가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말 한마디 하기 참 어렵다.

"세르펜스가 눈빛으로 제게 닥치라고 했잖아요?"

"제가···, 말입니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더 따지고 들어 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히 생사람 잡는다고 오해하겠지.

세르펜스가 저런 얼굴을 가진 이상,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진짜 저 얼굴은 반칙이다.

"예이, 예이. 제가 오해했나 보죠, 뭐. 거 죄송합니다."

"반성하신다니, 용서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이 온화하고 너그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었다는 건 세르펜스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다. 즉, 그의 말은 그냥 나를 놀려 먹기 위해 얹은 말에 불과했다.

진짜 너무 얄미워서, 저 보들보들해 보이는 뺨따귀를 콱 꼬집어주고 싶다.

"그래서 아까는 무슨 말을 하려던 건가?"

내가 세르펜스를 보며 이를 갈고 있자니, 크레아토가 내게 질문했다.

"여기 있는 유지스도 한 미모 하는데, 아까부터 세르펜스만 보고 계신 것 같아서요. 다른 드워프들은 둘을 골고루 쳐다봤거든요."

"아, 그거 말인가?"

혹자는 취향 차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저 둘의 미모를 앞에 두면 취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그러니 취향 차이는 아닐 거다.

"나는 어렸을 때, 천사를 보았네."

"진짜 천사요?!"

"그래, 뒷모습뿐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네. 찬란한 광휘를 두르고 순백의 날개를 펼친 그 모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네."

크레아토가 아련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추억을 말하였다.

"수도 없이 상상했네. 그 천사의 앞모습을. 뒷모습도 저토록 아름다운데, 얼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과연 미에 미친 종족다운 생각이다. 천사를 봤는데 궁금한 게 얼굴뿐이라니.

"그러다 만나게 된 거라네. 내가 상상했던 천사의 얼굴보다, 더욱 천사 같은 미모를 가진 자를! 이 감동을 대체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감격에 겨워하는 크레아토의 외침에 세르펜스가 나를 노려봤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하냐고 따지는 듯한 표정이다.

엄청 민망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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