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71화 (271/925)

271회

51. 공작님과 잠입 작전 (2)

다행히도 다음 정차역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윈스톤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혼자서도 식사는 제때제때 챙겨 드시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뭐니 뭐니 해도 본인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아시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윈스톤에게 거듭 당부했다.

에드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은퇴한 원장이 그녀에게는 소중한 사람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생판 남이다.

나는 윈스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도움을 받는 처지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기 때문인지. 에드나는 서운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윈스톤 쪽이다.

"알겠소."

윈스톤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정말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다

기사라는 족속들은 주군의 명령에 목숨을 거는 걸 로망으로 여기는 지라, 영 불안하다.

세르펜스에게 거들어달라는 의미로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시온,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윈스톤 경이 당신도 아니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녀석이 갑자기 나를 디스했다.

더 억울한 건, 세르펜스의 저 되지도 않는 말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덤덤하던 윈스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처럼.

"무사히 다녀오시리라 믿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내가 벙쪄있는 사이, 윈스톤은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에서 내렸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그럼 이제 그 상단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르펜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은 에드나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말씀드리는 건 상관없긴 한데···. 그 일루미나티라는 단체는 악마 숭배자들이 보육원의 아이들을 제물로 악마를 소환하려는 것까지 알아냈으면서, 보육원의 실소유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이런 건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좋을 텐데. 어째서 다들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이 조사를 하다 보면 실수로 좀 빼먹을 수도 있지. 인생을 너무 팍팍하게 사는 것 같다.

'먼저 질문을 꺼낸 건 세르펜스니까,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더군다나, 일루미나티와 직접 연결된 건 세르펜스라는 설정이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세르펜스의 보좌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에드나의 질문에 내가 세르펜스를 바라보는 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다. 그저 내 배역에 충실히 이입한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제한된 정보만 던져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번 이래 왔다고요?"

"예.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제 능력을 시험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끊임없이 시험받는 어린양 역할을 자처한 세르펜스가 씁쓸한 미소를 꾸며냈다.

그 가련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일루미나티 수장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나쁜 놈은 바로 나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내 얼굴에 먹칠하고 있다.

"그리 좋은 집단 같지는 않네요."

에드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대로 두면 안 좋은 이미지가 박혀서, 나중에 내가 일루미나티 수장이라 밝혀졌을 때 애로 사항이 생길 것 같다.

세르펜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게 판명 나면 오해도 풀리겠지만, 나쁜 이미지는 처음부터 없는 게 낫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르···, 공작님의 추측일 뿐이잖아요."

"그냥 평소대로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웬일이래?"

"지금은 제국의 공작이 아닌 일루미나티의 단원으로서 온 거잖습니까?"

세르펜스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외펜스와 대내펜스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혼종펜스의 모습이다.

어쩐지 자꾸 '경'을 빼먹고 부르더라니. 나름 업무 중이라 생각해서 꼬박꼬박 공작님이라 부른 것이 괜히 억울해졌다.

에드나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에 굴복할 내가 아니다.

나는 세상의 모진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내 신념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냥 세르펜스의 추측일 뿐이고, 녀석도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녀석···?"

나를 보는 에드나의 시선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이 세계에 와서 누군가가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건 흔한 일이다. 모르는 척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가설인데 말이죠, 일루미나티의 수장은 사실 신의 계시를 받는 게 아닐까요?"

"신의 계시요?"

"네. 사실 그렇잖아요? 정보를 대체 어디서 얻는 건지 확실치도 않고, 그 정보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파내다 보면 진짜로 악숭이가 걸려든단 말이죠? 그리고···."

먼 옛날, 유지스가 나를 신의 사자라 의심하며 들었던 근거들을 조금 각색해서 늘어놓았다.

에드나는 내 말을 신중한 표정으로 귀 기울여 들었다.

"그뿐 아니라, 저는 일루미나티라는 단체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말로 전 대륙에 단원들이 퍼져있다면, 이 먼 프뤼네 왕국까지 세르펜스를 보낼 리가 없잖아요?"

"글쎄요···?"

철저히 사실에 근거하여 유지스의 설정을 뒤범벅해 설명했음에도, 에드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마지막 의견은 흥미로웠지만, 신의 계시를 받는다니···. 그건 너무 허황되지 않나요?"

"예? 허황되다뇨?"

"신의 계시를 받을 정도라면 고위의 신관일 텐데, 굳이 교단 내 인력을 놔두고 교단 밖에서 단체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다양한 인재 영입이 목적이더라도, 정체불명의 단체명을 내거는 것보다 교단의 이름을 내거는 게 협조를 받기도 편하잖아요."

신의 계시를 받는 게 고위의 신관이라니.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그런 틀에 박힌 사고로는 마법을 탐구할 수 없다.

그녀는 좀 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가정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왜 신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 꼭 신관이어야 하는 거죠? 그런 걸 두고 편견이라 하는 겁니다! 이 대륙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누구나 신의 사자가 될 수 있어요! 신성력의 유무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그렇게 흥분하시죠? 누가 보면 시온 씨 본인 얘긴 줄 알겠어요."

에드나는 그냥 던진 말이었겠지만, 내겐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려지고 어깨가 움찔 들썩였다.

"···그 반응은 뭔가요?"

"네?"

"방금 움찔하셨잖아요."

"제가요?"

"네. 시온 씨가요."

"에드나 씨께서 착각하신 겁니다."

"······."

나와 에드나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며, 세르펜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는 시선이다.

녀석의 그런 생각은 오해에서 불거진 것이다.

나는 에드나가 일루미나티에 가입하게 됐을 때를 대비하여, 그녀가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설정 일부분만 미리 설명해준 것뿐이다.

"일루미나티라는 단체가 어떤 곳이든, 우리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준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악마 소환의 제물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냥 시원하게 다 밝혀버릴까 고민하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끼어들어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에드나를 영입하지 못했을 때를 염두에 둔 거다.

어떻게든 설득해 볼 생각은 못 할망정, 일이 틀어질 경우를 먼저 생각하다니. 하여간 부정적인 녀석이다.

세르펜스는 입으로는 정의로운 말을 하며 숭고한 성자 행세를 하면서, 테이블 아래로는 껄렁하게 무릎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옆에 앉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닥치라는 뜻이다.

"하긴, 그렇네요. 공작님···, 아니. 세르펜스 씨의 말씀대로···."

"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에드나의 언행에 세르펜스가 화들짝 놀라 하며 반문했다.

녀석에 의해 말이 끊긴 에드나는 세르펜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제국의 공작으로 오신 게 아니라고 하셔서 이름으로 불러드린 건데···. 뭔가 잘못됐나요?"

"아, 아닙니다. 오늘 초면인 '베네볼렌 씨'께서 저를 이름으로 부르실 줄은 몰라서 좀 당황했을 뿐입니다."

대놓고, '그쪽이 아니라 시온에게 한 말이었습니다.'라며 정색할 수 없었는지, 세르펜스가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라는 뜻을 돌려서 전했다.

"아, 죄송해요! 시온 씨께서 너무 거침없이 절 이름으로 부르시길래, 제국에서는 그게 보통인 줄 알았어요."

세르펜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누가 보면 나만 잘못한 줄 알겠다.

"또 '평소대로' 이름으로 부르라고 말씀하시길래, 제국은 격식에서 자유로운 줄 알고···. 공작님께선 프뤼네 왕국의 문화를 존중해서 저를 성으로 불러 주시는 줄 알았지 뭔가요? 그래서 저도 문화 차이를 존중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괜찮습니다, 듣고 보니 오해하실 만도 했습니다. 시온과는 사석에서 친구로 지내기로 한 터라,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혼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프라시더스 씨라 불러 드리면 될까요···?"

"···네. 그리고 지금은 '페르센트 라시더스'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 밖으로 나가면 호칭에 주의해 주십시오."

보는 내가 다 어색하다. 이 분위기 어쩔 셈이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깔끔하게 이름 트고 지내면 되지, 뭘 정정하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부르라고 존재하는 게 이름인데, 왜 그걸 친근함의 척도로 여기는 거야?'

어쩌면 가까운 사람에게만 세례명을 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례명이 없는 사람이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라도 내려고, 가문이 아닌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에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한 게 아닐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그로 인해 자신만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불리기 어려워졌다는 뜻이 된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멍청함의 끝을 달린다.

어쨌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함인지 에드나는 본론으로 돌아와 상단에 관한 정보를 풀어놓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상단의 이름은 로시오 상단으로, 창립된 지는 고작 2년이 조금 지났다고 한다.

'또 2년인가?'

상단측에서 처음부터 엘로윈 보육원을 차지할 작정으로, 지금의 원장 놈에게 미리 접촉했던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만약 그랬다면 선택의 날 이전. 즉, 아니마가 성검의 동료로 뽑히기 전이라는 뜻이다.

‘마왕이 개입한 거려나?’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성검의 주인]에서는 상단측 접촉이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현 원장 놈이 전 원장님을 죽여서 그 권한을 넘겨받은 게 아닐까 한다.

아이들을 제물로 악마를 소환하려는 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2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암흑가의 악마를 물리치자마자 바로 오길 잘했다.

"고작 2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보육원을 후원해줄 정도의 대상단을 인수했다고요? 재정이 휘청거렸다 해도 사업체 규모가 꽤 되었을 텐데요?"

"사실 로시오 상단은 재작년만 해도 그리 빛을 보지 못했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죠. 그러다 작년 1월경, 갑자기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시장의 흐름과 앞으로 유행할 물품을 미리 아는 것처럼, 손대는 족족 모두 성공하기 시작했죠."

유지스의 질문에 에드나가 척척 잘도 답변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라기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악숭이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상단이다. 미래를 아는 것처럼 사업체를 불렸다면, 정말 미래를 알아서 사업에 성공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런 거라고 봐야 한다.

'마왕, 이 새끼는 뭔데 회귀물 주인공이 자본금 마련하는 듯한 방식을 쓰는 거야?!'

애초에 마왕이 왜 이런 걸 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무능메아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제국이 망하면서 대륙 경제도 박살 나고 전시 체제를 갖췄으나, 제국이 건재한 지금은 시장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거다.

마왕이 알고 있는 정보들의 상당수는 더 이상 못 써먹을 거다.

그래도 상당수의 돈이 이미 악숭 세력으로 흘러들어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룩스메아의 무능함에 치가 떨린다.

"꽤 자세하게 알고 계시네요?"

에드나의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는지 유지스가 질문했다.

나도 묻고 싶었으나 세르펜스에게 닥치라는 명령을 받은 탓에 묻지 못했던 질문이다.

"뒷조사를 했으니까요."

일루미나티에 최적화된 에드나의 답변에 유지스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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