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73화 (273/925)

273회

51. 공작님과 잠입 작전 (4)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열두어 살 됨직한 소녀가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작 아이들을 돌봐야 할 어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소녀의 표정에는 피로감이 잔뜩 끼었고, 아기의 얼굴에는 버짐이 피었다.

"···어?"

우리와 함께 들어온 차가운 바람에 의아함을 느낀 한 아이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문 앞에 선 나와 에드나에게로 쏠렸다.

"언니-! 보고 시펏써여!"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에드나의 품에 뛰어들었고, 뒤이어 다른 아이들도 앞다퉈 달려왔다.

아이들이 한 번에 종알종알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보육원은 언제 조용했느냐는 듯 왁자지껄해졌다.

에드나에게 달려들지 않은 아이는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는 소녀뿐이었다.

소녀 또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탓에 일어나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이 중에서는 저 애가 가장 맏이인가···?'

아이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젖병을 물고 있는 아기까지 포함해도 여덟 명뿐. 프라시더스 령의 보육원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다.

'아니, 그래도 애들 봐 주는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원장을 맡고 계신 아멜리아 신관님 외에도, 여러 신관이 돌아가며 아이들을 돌봐줬던 교단 소속 보육원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누나, 누나! 선물은여?"

우리의 주위를 빙빙 돌며 두리번거리던 꼬마 아이가 에드나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기며 질문했다.

자꾸 근처를 맴돌길래 처음 보는 나를 탐색하는 건가 했더니. 그냥 선물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꼬마의 물음에 에드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물···, 업써여?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어쩐지 나에게 관심이 없더라니. 더 큰 관심사가 있어서 그랬나 보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오래돼 보였고,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장난감들은 오래되어 다 낡아빠졌으며, 동화책들은 헤져서 너덜너덜했다.

오매불망 에드나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선물을 고대했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누나가 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깜박해버렸어."

에드나의 말에 꼬마를 비롯한 아이들이 울상을 지었다. 시무룩해진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나까지 덩달아 기운이 빠진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특단의 조처를 내릴 수밖에.

"에이, 에드나 씨! 장난이 너무 심하시네! 애들 울겠어요."

"네?"

내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자, 에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자신이 아이들 선물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딴 소리를 하느냐,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쭈그려 앉아서, 가장 먼저 선물을 찾던 꼬마와 시선을 맞췄다.

"잠깐만 기다려 봐, 형아가 간식 잔뜩 가져올게. 에드나 씨가 장난친다고 요 앞에 숨겨놓고 왔거든."

"정말여?!"

"그럼~!"

내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대답하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간식이라는 단어에 마탑에서 자연스럽게 쿠키를 꺼내던 내 모습을 떠올렸는지, 에드나의 얼굴에도 근심이 걷혔다.

나는 꼬마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밖은 추우니까 따라 나오지 말고. 여기서 에드나 누나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요. 다들 할 수 있죠?"

"네에!"

우르르 따라 나오려는 아이들을 저지하며, 잽싸게 밖으로 나와 건물과 담벼락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얇은 이불을 꺼내고 그 위에 온갖 간식들을 쏟아부은 뒤, 이불의 네 귀퉁이를 모아 보따리 묶듯 묶었다.

'세르펜스에겐 미안하지만···.'

녀석이 먹을 간식이야, 일이 끝나고 새로 사면 되겠지.

어차피 잠입해 있는 동안에는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질 여유도 없다.

나는 사탕, 초콜릿, 쿠키 등등이 가득 담긴 이불 보따리를 들고 다시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니까 마치 산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짜잔-!"

아이들 앞에서 이불을 끌러 내용물을 보여주자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단내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아이들은 바로 달려들지 않고 나와 에드나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씩만 가져가. 남은 건 내일 먹고."

에드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간식을 하나씩 집어갔다.

그 모습을 본 에드나가 내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가볍게 묵례했다.

"근데 이 아저씨는 누구예여?"

작은 쿠키 봉투를 손에 들고 나서야 비로소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지, 선물을 찾던 꼬마가 내게 뒤늦은 관심을 보였다.

선물에 밀린 건 둘째 치고, 어째서 나보다 연상인 에드나는 누나고 나는 아저씨인 걸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시온은 노안이 아니다. 딱 제 나잇대로 보이는 얼굴이다. 그렇다고 에드나가 특출난 동안인 것도 아니다.

본능적으로 낯선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게 아닐까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섭섭함보다 씁쓸함이 앞선다.

"그냥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분의 사촌 조카인데···."

"에드나?"

에드나가 나에 관해 설명을 하려는 찰나. 원장실이라 쓰인 문패가 달린 문이 열리며, 3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성이 나왔다.

저놈이 바로 문제의 그 원장 새끼인 모양이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오늘은 오는 날이 아닐 텐데?"

"오스틴, 너···! 애들도 안 보고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뭐 놀았나? 다 일하느라 그랬던 거잖아, 애들 때문에! 그리고 내가 원장인데, 애들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네가 자꾸 그러니까 애들이 나보다 너를 더 따르는 거 아니야?"

까치집 같은 머리를 보건대, 자다 나온 것이 분명한 원장 놈이 에드나에게 되레 큰소리를 쳤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보다, 저놈은 대체 뭐야?"

차마 애들 앞에서까지 심한 욕설을 퍼부을 수 없었는지, 에드나가 원장실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원장 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니꼽다는 시선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뭐야···,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마탑 선배님의 친척 조카인데, 아직 직장을 못 잡았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데, 애들 보는 건 좋아한다나 봐. 그래서 보육원에 자리 있으면 거기에 취직시켜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받아서, 일단 데려와 봤어."

에드나가 짜증을 억누르며 답했다.

그녀의 말에 원장 놈이 다시금 나를 훑어봤다.

"이젠 날 감시라도 하려는 생각이야?"

"뭐?"

"너한테 마탑에 친한 사람이 그 재수 없는 꼬맹이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아니마에 대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아무튼 내가 애들을 잘 보는지 아닌지, 간섭하려고 여기에 아는 사람을 심어두려는 거잖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재작년부터 갑자기 착한 척을 하던 건, 원장 자리를 수월하게 넘겨받기 위함이었을 뿐. 이젠 다시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보다.

놈이 나오자마자 아이들이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를 주고 고용한 건지는 몰라도, 그럴 돈 있으면 우리 고아원에 기부나 해. 응? 그리고 이건 뭐야? ···이것들, 엄청 비싼 거 아냐?"

"애들 간식에 손대지 마."

"고작 애들 군것질거리에 돈을 이렇게나 썼단 말이야? 와, 너 진짜 너무하다···."

대체 뭐가 너무하다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놈이 욕심내기 전에, 간식들을 그러모아서 다시 이불로 감싸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체 널 어떻게 믿고 돈으로 줘?"

"거 되게 섭섭하네. 내가 얼마나 애들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내가 중간에서 잘 균형을 잡고 있으니까 이 정도라도 유지하는 거야. 아니었으면 진작 문 닫고, 애들 다 길바닥에 나앉았어. 안 그래도 피곤한데, 너까지 이러지 말자. 응?"

애들을 내버려 두고 잠이나 처자는 놈이 정말로 애들을 위해 노력을 할까?

정말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다가 피곤해서 깜박 졸았던 거라면.

애들을 위해 가져온 간식을 보고 너무하니 어쩌니 하는 개소리를 할 게 아니라, 애들을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왔겠지.

"···아무튼. 고용하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부탁받은 건데, 최근에 그분에게 실험에 필요한 비싼 마법 시약을 받아서 거절하기 좀 그래."

"그 사람은 마법 시약이라도 줬지, 넌 나한테 뭐 주는 것도 없이 부탁만 하려고 그러냐?"

"어차피 애들 봐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써."

"네가 보기에, 여기에 직원 월급 줄 돈이 있어 보여?"

솔직히 말하자면 있어 보인다.

아이들의 초라한 행색에 반해, 원장 놈의 옷 재질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의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공작가에서 보좌관 생활을 하며 비싼 옷들을 잔뜩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딱,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에 맞춰서 산 게 분명하다.

"···집에 돈이 많아서 그냥 남들에게 소개할 직장만 있으면 된다니까, 많이 줄 필요도 없어."

"아~, 결혼 때문에?"

"그런 거겠지."

"아주 팔자 좋네. 부모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고, 고아원 다니는 시늉만 하면 돈 많은 놈이 마음씨도 좋다는 소릴 듣겠지. 그에 비해 나는···!"

나를 보는 놈의 시선에 시기와 질투가 서렸다.

열등감이 가득한 눈으로 한참 나를 노려보던 놈이 바닥에 퉤, 침을 뱉고 슬리퍼 신은 발로 그것을 짓이기듯 비벼댔다.

그리고는 말없이 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 진짜···. 미안해요."

"에드나 씨 잘못도 아닌데요, 뭘. 굳이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전 잠깐 대화 좀 하고 올 테니, 여기서 애들 좀 봐주시겠어요?"

"네,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에드나가 크게 심호흡을 내쉬고는 원장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기 취직해도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마자! 비···, 비, 뭐랬지? 아무튼 그게 없댓써."

비전을 말하는 걸 테다.

아이들이 날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넸다. 이런 환경에서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온다면 반기고 환영할 만도 하건만, 내게 빨리 도망칠 것을 권하는 듯한 이 상황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래서 누나랑 형아들도 빨리 여기 벗어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데."

"누나랑 형아? 여기에 너희들 말고도 누가 더 있어?"

에드나가 말했던 '교육'을 나간 애들일 것이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모르는 척하며 방금 누나와 형 얘기를 꺼냈던 아이에게 질문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전부 펼쳤다.

"다섯 명. 지금은 다 일 나가고 없어. 다들 열심히 배워서 에드나 누나처럼 훌륭한 어른이 될 거래."

"아닌데? 시온 오빠는 에드나 언니보다 더 대단한 어른이 돼서, 보육원을 사버린댔어!"

남자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가 반박했다.

그런데···.

"시온?"

"웅! 시온 오빠는 지금 가죽 공방에서 일해! 열네 살이야!"

"그렇구나. 내 이름도 시온인데! 참 신기하다, 그치?"

"아닌데? 저기 빵집 주인아저씨 이름도 시온이야!"

"···시, 신기하네."

시온이라는 이름이 정말 흔하긴 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시온 오빠와 시온 형이라는 호칭은 이미 선점한 사람이 있으니, 형이나 오빠 소리 듣기는 글러 먹은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