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회
51. 공작님과 잠입 작전 (5)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이름이 뭐야?"
"나는 리나고, 얘는 데런이야!"
리나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처음 보육원에 들어올 때 조용했던 건 원장이 자고 있어서 조심했던 거였을 뿐, 본래 성격은 활달한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리나라는 아이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다 그러하겠지.
한창 이거저거 말하기 좋아할 나이에 어른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이들 앞에서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속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친절해 보일 수 있는 미소를 그렸다.
"그렇구나. 나는 시온이고, 앞으로 여기서 지내게 될 거야. 물론 원장···님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해."
"···봐서?"
"······."
다른 질문에는 활기차게 대답해 줬으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에는 새침한 대답이 돌아왔다.
심지어 데런이라 불린 아이는 아예 대답조차 없다. 소년의 관심은 나에게서 제 손에 들린 쿠키로 완전히 옮겨갔다.
데런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나에 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는지, 다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프라시더스 령의 보육원 아이들이 처음부터 내게 장난치고 매달리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차갑다 못해 매정하다.
이곳의 아이들은 나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에게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내게 관심을 보였던 건, 내가 에드나와 함께 왔고 그들에게 간식거리를 안겨줬기 때문이겠지.'
옆에서 데런이란 아이가 쿠키를 먹기 시작하자, 리나가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손에 든 초콜릿 포장지를 바스락거리는 게, 빨리 나와의 대화를 끝내고 초콜릿을 먹고 싶은 눈치다.
보통 아이라면 이런 눈치 안 보고 그냥 먹으면서 얘기했을 텐데.
안타까움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한숨마저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이제 가서 놀아도 돼."
내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두 아이는 나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아이는 서로의 간식을 반씩 맞바꿔서, 귀퉁이부터 깨작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저렇게 먹으면 간에 기별이라도 갈까 싶지만, 원장 놈이 아이들 간식을 챙겨줬을 것 같지도 않고.
아껴 먹느라 저러는 거겠지.
"흐에에, 케, 켁, 흐엥-."
갑자기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와 켁켁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한달음에 아기 앞으로 달려갔다. 아기는 바닥에 누운 채로 토하고 있었다.
"얘는 맨날 이래."
토사물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도록 재빨리 아기를 옆으로 돌려 눕히는데, 아기를 돌보던 소녀의 혼잣말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아기가 토를 자주 해?"
"으응. 분유를 먹이고 나면 항상 토해요. 원장 선생님께 얘기하니까, 원래 이런 거라는데요?"
최대한 따지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질문하니, 소녀가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의 말에 절로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원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아기가 쉽게 토하는 건 맞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매일 토하는 아기는 없다.
'맨날'이라는 말에 과장은 없었는지, 소녀는 익숙하게 거즈를 꺼내어 아기의 얼굴과 바닥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냈다.
"···혹시 트림은 시켜줬어?"
"트림? 꺼억?"
"그래, 그거."
소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큰 문제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기초적인 문제였다. 그 기초적인 문제가 매일같이 반복됐다는 건 무척이나 큰 문제지만.
아이들은 모를 수도 있으나, 원장은 분명 알았을 거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쭉 자라왔다면, 모를 수가 없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히고, 분유도 다시 먹여야겠네."
"가져올게요."
"고마워."
"···왜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소녀가 느닷없이 의문을 표했다.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응?'하고 반문하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잠깐만. 일단 좀 씻기고 싶은데, 욕실은 어디야?"
"저기 복도 끝에···."
소녀가 설명하다 말고, 그냥 따라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아기를 조심히 안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앞장서 걷던 소녀는 손가락으로 욕실 문을 가리킨 후, 자신은 옷을 가지러 가겠다며 복도 옆에 나 있는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나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간 후, 내부를 살폈다.
환기를 위한 작은 창문이 있었으나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턱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목을 밖으로 빼서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세···, 아도르."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녀석을 부르기에는 충분했다.
갑자기 세르펜스가 천장에서 뚝 떨어지더니, 내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들어와 문을 잠가버렸다.
대체 어디에 어떻게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부른 거지? 그것도 세례명으로."
녀석이 내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간식을 나눠준 것이 섭섭했는지, 살짝 토라진 모습이다.
"제가 아도르의 이름을 불렀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나잖아요."
"누가 듣는 게 걱정된다면, 안 부르면 되는 것 아닌가?"
"그치만 아기가 걱정돼서···."
속을 게워낸 원인은 찾았지만, 어쩌면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매번 토했다면 식도 쪽도 많이 상했을 거다.
내 품에서 연신 칭얼거리는 아기를 힐끔 내려다본 세르펜스가, 아기에게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신성한 빛을 발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성스럽고 고아하다.
녀석의 손이 떨어질 무렵에는 아기의 칭얼거림이 이미 멎어 있었다.
"당연히 남겨 놨겠지?"
"예?"
"쿠키. 아까 베네볼렌 씨 몰래 챙겨 주기로 했잖은가."
세르펜스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방금 전 보았던 온후한 성자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어린애만 남아서 내게 간식을 요구했다.
"어어···."
"깜박한 건가?"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약속했으면서,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지?"
세르펜스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선물을 깜박했다는 에드나의 말에 실망한 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시들시들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먹고 싶으면, 네가 직접 사 먹으면 되잖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잘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이 크면 식탐이 많아진다는데···. 세르펜스도 그런 거려나?'
어릴 적부터 식단을 제한당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현된 거라면, 녀석의 이런 모습도 충분히 이해된다.
"아도르는 제가 언제든지 챙겨줄 수 있지만, 여기 아이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제가 줬던 사탕으로 참읍시다. 네? 일 끝나는 대로 달콤한 디저트도 잔뜩 사주고···. 아! 그러지 말고 돌아가는 길에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 같이 가서, 아도르가 먹고 싶은 걸 직접 고르는 건 어때요? 맨날 제가 골라준 것만 먹었잖아요."
"으음···."
퍽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는지, 녀석의 얼굴에서 서운함이 가셨다.
좋아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실실 웃고 있는 주제에, 녀석이 고민스럽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달칵, 달칵
누군가 욕실 문을 열려고 시도했는지 문고리가 들썩거렸다. 돌연 세르펜스가 높이 뛰어오르더니 천장 모서리에 매달렸다.
녀석이 괜찮으니까 잠금장치를 풀라고 눈짓했다.
들키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일단 녀석이 시키는 대로 문을 열었다.
"아기 옷 가져왔어요."
"응, 고마워."
"아직 안 씻기셨네요?"
"어···, 어어? 아! 물 온도 맞추느라고."
세르펜스가 문틀의 상단부를 잡고 반동을 줘서 소녀의 머리 위로 몸을 날리고, 그녀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착지한 후, 빠르게 사라지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 신묘한 움직임에 정신을 빼앗겨, 하마터면 소녀의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여기 뜨거운 물 안 나오는데요?"
자신의 머리 위와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까맣게 모르는 소녀가 뚱하게 말했다.
"···그, 그렇구나! 어쩐지 자꾸 찬물만 나오는 게 이상하다 했어."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소녀에게 물을 데울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소녀는 나를 부엌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물을 데운 후에야 아기를 씻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소녀의 이름이 웬디라는 것과 13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기를 돌보는 건 네 당번이야?"
"언니 오빠들이나 제 또래 애들은 전부 교육을 나갔는데, 전 덤벙거려서 실수도 많이 하고 멍청해서 아무도 절 가르쳐 주려 하지 않는대요. 그래서 원장 선생님이 아기나 보고 있으랬어요."
내가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며 질문하자, 웬디가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 원장 새끼는 이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덤벙거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기는 아무나 돌보나? 얼마나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데! 정말 덤벙거리는 아이에겐 맡기지도 못해. 분명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웬디가 남을 잘 챙기는 다정한 아이라서 부탁한 걸 거야."
"···정말요?"
"그럼! 게다가 어린 나이에 불도 무서워하지 않고, 매번 물을 끓여서 아기 분유도 타 줬잖아? 섬세하고 다정한 데다 용감하기까지 하네!"
"에헤헤···."
칭찬이 효과가 있었는지, 웬디가 수줍은 웃음을 흘렸다.
"근데 트림 얘기는 뭐예요?"
"원장 선생님 말씀대로 아기들은 쉽게 구토하는데, 트림을 시켜주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거든."
간신히 기운 차린 아이에게 '네가 트림을 안 시켜서 아기가 토를 한 거다.' 같은 소리를 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진짜 쓰레기다.
아무리 몰랐다고 한들, 아이들은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어른이 아닌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마련이다.
멍청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존감이 바닥난 아이는 더더욱 그리하겠지.
말이란 건 같은 얘기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같은 뜻도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정말요?"
"응.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럼 얘도 이제 안 토해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다행이다···! 맨날 괴로워 보여서 걱정했었는데!"
원장 놈에게 아기는 원래 그렇다는 소리를 들었다 해도, 아기가 자꾸 토하는데 걱정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이제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나자 웬디의 얼굴이 활짝 폈다.
"와, 근데 되게 신기하다. 내가 씻겨줬을 땐 아무리 씻겨도 자꾸 피부가 일어났었는데, 이젠 되게 깨끗해졌네요?"
웬디가 허옇게 버짐이 일어났었던 아기의 피부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아주 예리한 질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눈썰미를 칭찬해 주면서 친절하게 답변해 주고 싶었으나, 세르펜스가 신성력으로 고쳐줬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숙련된 기술과 오랫동안 갈고 닦은 노하우 덕분이지!"
"헤···, 취직 못 해서 에드나 언니한테 도움 구한 거 아니었어요?"
"우리 집에도 아기가 있거든."
공작저에는 몸만 큰 아기펜스가 있고, 리벨론 영주성에는 정신은 어른이지만 몸이 아기인 비비가 있다.
둘 다 반쪽짜리 아기지만, 합치면 아기 하나 성인 하나가 나오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아까 그 얘기 진짜예요? 정말 여기 취직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
"네!"
어디까지나 위장 잠입인지라, 확언하기 어려워서 돌려 물었더니 밝은 웃음과 경쾌한 긍정의 말이 나왔다.
괜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편하게 물어보려면 친해지긴 해야 하는데, 섣불리 정을 붙여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게다가 에드나까지 데려가 버리면···.'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얻을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주 친해질 수도 없고 마냥 거리를 둘 수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하는데, 그 정도를 모르겠다.
아이는 경계하는 대상에겐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대답조차 안 하려 들다가도, 한번 마음을 열면 전부를 줘 버린다.
그런 아이를 상대로 어중간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친해지기보다 더 어렵다.
"참, 아까 간식은 챙겼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어, 불현듯 생각난 척 질문을 건넸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랐다면 내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려 했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아직 어린 소녀는 바로 앞에 던져진 질문에 집중했다.
"네. 에딘이 가져다줬어요."
에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착한 아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뒤로, 나는 웬디와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대화 사이사이에 장난스럽게 거들먹거리는 척, 아기를 트림시킬 땐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든가. 눕힐 땐 어떻게 하는 게 좋고, 분유 온도는 어느 정도가 좋고 하는 정보들을 흘렸다.
이렇게 해 놓으면 내가 떠나고 나서도 아기를 돌보는 데 큰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이 방식에는 크나큰 부작용이 있었으니···.
"와아, 그렇구나. 시온 선생님은 대단하네!"
웬디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자랑하는 아이를 칭찬하는 부모님'처럼 굴기 시작했다는 거다.
나를 기특하게 여기며 박수까지 쳐주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괴감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