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회
52. 공작님의 심문 (8)
세르펜스가 내 방을 찾은 건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다.
불안감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고 느낀 게 아니라, 확실한 증거도 있다.
하늘에서 밝게 빛나며 제 존재감을 과시하던 별들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새까맣기만 하던 하늘은 푸른색과 분홍색이 뒤섞여 어스름한 보랏빛을 띠었다.
프뤼네 왕국은 추운 지역답게 밤이 길었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야 일을 끝낸 셈이다.
마력의 타래만 끊고 온 거라 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어쩐 일인지 창문이 아닌 문을 통해 방문했다. 무력화된 악숭이를 윈스톤에게 넘겨주고 온 것이리라.
물론 에드나에게 넘겨줬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세르펜스 행동 분석가인 내 추측에 따르면, 그는 놀이방을 거치지 않았을 거다.
원장실 창문을 통해 나와서 복도 창문으로 들어왔겠지.
추측의 근거로는 녀석의 표정을 들 수 있다.
무표정해 보일 정도로 무감각한 얼굴을 한 주제에, 두 눈만은 촉촉하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에 대해, 타래를 끊어내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망설였다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변명을 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때는 숨 쉬는 것만큼 익숙했던 연기가 힘겹게 느껴질 만큼.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으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세르펜스가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옆에 앉으라고 빈자리를 툭툭 쳤음에도, 녀석은 멀뚱히 서서 발끝만 쳐다봤다.
"뭘 가만히 서 있어요?"
"으, 으음···."
"으음 밖에 못하는 병에라도 걸렸나?"
"···그건 아니다."
다행히 언어 능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단지 내게 다가오는 걸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이유야 뻔했다.
본인을 잔인한 사람이라 규정하며, 내 곁에 있어도 되는가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는 거겠지.
"됐고 그냥 앉아요."
나는 힘 없이 축 처진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듯 늘어뜨린 녀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못 이기는 척 내 옆에 앉았다.
"근데 소매가 왜 이렇게 축축해요?"
"아···!"
내 의문에 세르펜스가 급히 팔을 빼냈다. 그리고는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입 가리고 고양이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저게 더 수상해 보인다.
묻은 게 피라도 되나 싶어 녀석의 팔을 붙들었던 손바닥을 펼쳐봤다. 약간의 수분감은 있었지만 깨끗했다. 코를 대고 맡아봐도 아무 냄새도 안 났다.
별 특징 없는 그냥 맹물이다.
"···물고문 했어요?"
"그자가 이번 계획의 총책임자 같기에, 유지스가 다친 이유도 알고 있을까 하여 물어보려는데,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아서···. 깨우기 위해 물을 좀 뿌렸다."
구구절절 늘어놓은 변명은 그럴듯했지만, 결론 부분에서 신빙성이 뚝 떨어졌다.
물을 뿌리기만 했으면 세르펜스의 소매가 젖을 이유가 없다.
"정말 '뿌린' 거 맞아요? '담근' 게 아니라?"
"으, 음···."
세르펜스의 고개는 날 향했으나, 눈동자는 대각선 방향의 허공을 향했다.
누가 보아도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담갔네, 담갔어.'
나도 모르게 나오려는 한숨을 꾹 삼키며, 오랜만에 방음용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저에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게 실망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르펜스가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겠죠."
"······."
"전에도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왜, 있잖아요. 암흑가에서 세르펜스가 인신매매범들 조졌···, 아니.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려고···."
"···기억한다."
유지스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이기도 하다.
그 때문일까? 녀석의 얼굴이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치료한 장본인인 세르펜스가 그렇게 불안해하면 어쩌자는 건데요?"
"······."
"자기 입으로 유지스가 정신을 차리면 물어보니 마니 해놓고. 그렇다는 건 생명에 지장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아련한 표정은 오히려 유지스에게 실례입니다."
내 말을 이해했는지, 녀석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마치 표정을 지워 내는 것처럼 보인다.
기운 내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전달 과정에서 어딘가 왜곡된 모양이다.
"아무튼. 그때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먼저 다가가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이것도 기억하죠?"
"···기억한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대체 왜 그랬을까?"
"미안하다."
"또 거짓말할 겁니까?"
"······."
세르펜스가 등 뒤로 숨겼던 양손을 다소곳하게 자신의 무릎 위에 얹으며, 예의 바른 자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리도리만 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세요."
"앞으로는 선우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
"옳지, 옳지. 잘했어요."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녀석이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로, 그가 오늘 보였던 모순된 행동들이 전부 이해되었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녀석은 내게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내 손짓 한 번에 손을 뻗으면 닿을 곳까지 다가왔다.
앉으라고 옆자리를 비워놔도 멀뚱히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볍게 잡아끌자 뿌리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 모순된 행동들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줬으면 해서.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위로받고 싶어서.
결국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화 많이 났죠? 유지스가 다쳐서."
"······."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질문하자, 녀석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참아왔던 서러움이 쏟아지듯 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흘렀다.
고문당한 악숭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가증스럽다며 펄쩍 뛰겠지만,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애초에 악숭이가 악숭하지만 않았더라면 유지스가 다치지도 않았다. 그랬더라면 세르펜스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다.
보복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다.
하나,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감내하라고 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다만 그것이 도덕을 위배하는 건, 그 끝맛이 전혀 달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오는 경우가 흔하며, 때로는···.
"그래서, 이제 좀 풀렸어요?"
"···으흑."
내 질문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며,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놨던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혔다.
"그러게 본인도 힘든 걸 왜 하려 합니까?"
"···흐읍."
"알아요, 알아. 저도 답답해서 해 본 말입니다."
"흐윽···."
"어휴, 그랬쪄요? 무서웠쪄요?"
"우으읏···."
이왕 질러버린 거, 개운해 하기라도 할 것이지.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예전에는 신성력으로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워냈기에, 그럭저럭 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부작용을 알기에. 더는 그러지 않겠노라 나와 약속했으니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다.
괴로워하는 악숭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괴로웠던 과거를 꺼내보고.
그런 무서운 짓을 몇 번이고 행하였고, 지금도 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덜컥 겁을 먹었으면서. 끝내 그것을 끝마치고 온 걸 테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녀석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할 거다.
겁 많고 단순한 녀석이니까.
'원래 애들은 자기가 사고 쳐놓고도, 놀라서 우는 법이지.'
내가 자신을 피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는지 녀석의 울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꾹꾹 눌러 참는 흐느낌이 아니라, 펑펑 울어 젖혔다.
그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지하실에 끌려갔던 10살짜리 어린 아이가 되었다.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았던 그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살며시 그를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녀석은 갓 태어난 새끼 동물이 제 어미 품을 파고드는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며 내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체격이 체격인 만큼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세였으나, 세르펜스는 오히려 안정을 찾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녀석이 방금까지 누군가를 고문하고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정말 알고 있긴 한 건지, 문득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유선우, 정신 차려야 해···!'
세르펜스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그런 녀석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내가 같이 흔들려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를 이해하되, 그에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
"세르펜스."
"으응···."
얼핏 들으면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니다.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불렀을 때. 세르펜스가 '음', '그래', '말해라' 등등으로 대답한 적은 있어도, '응.'이라 한 적은 없다.
'···아마도?'
적어도 당장 떠오르는 기억이 없으니까, 있다 한들 매우 드문 경우겠지.
즉, 그냥 칭얼거리는 소리다.
자기가 울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어르고 달래라는 요구다.
나는 그를 과대평가했다. 아무리 봐도 열 살이 아닌 것 같다.
분명 전 원장님에게 아기를 넘겼는데, 어째서인지 내 품에는 여전히 아기가 안겨있다.
미스터리한 일이다. 엘로윈 보육원 1대 불가사의라 해도 손색이 없다.
"부르면 제대로 대답해야죠. 의사소통까지 아기처럼 할 필요는 없잖아요."
"···흐끅."
"···아, 예. 그럼 풀릴 때까지 더 우시든가."
잠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던 녀석은 바라는 것을 얻고 난 뒤, 도로 시선을 거뒀다.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세르펜스 전용 자동 토닥임 기계가 되어버리게 생겼다.
"어휴. 여섯 살이나 되어서, 이게 뭡니까? 리벨론 령의 비비가 친구 하자고 하겠네!"
세르펜스를 떼어내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리자, 녀석이 우는 와중에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관심을 돌리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다.
"세르펜스, 여기 누워봐요."
녀석이 훌쩍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말은 안 하고 울기만 할 생각인가 보다.
"오랜만에 자장자장 해줄 테니까, 좀 자요. 피곤하잖아요? 쉬어야 체력도 회복될 거 아닙니까? 그래야 적들이 와도 저나 다친 유지스를 지켜줄 수 있죠."
"······."
"저요? 저야 뭐. 이따 낮에 낮잠을 자도 되는 거고."
"······."
"유지스가 정신 차리면 바로 깨워 줄 테니까, 어서 자요. 지금 안 자면 자장자장 필요 없는 줄 알고, 앞으로 영원히 안 해줄 겁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딴 거에 혹할 것 같으냐고, 자신이 진짜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자겠다."
나는 세르펜스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줬다. 입으로 자장자장 거리며 그의 가슴께를 토닥여 주었다.
아기가 밤에 울지 않고 얌전히 자주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
훌쩍거리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르펜스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부드러운 손수건에 물을 묻혀 녀석의 얼굴을 닦아준 뒤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윈스톤은 여전히 복도에 서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기절한 노인 악숭이가 뒹굴어 다녔다.
아침 인사를 건네려는 윈스톤에게 나는 검지를 들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그가 열었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땀을 닦으며 안심하려던 찰나.
"깨어나셨네요? 안 그래도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서···."
복병은 등 뒤에서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에드나의 입을 막으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쉿···! 울다가 이제 겨우 잠들었어요."
"앗, 그, 그렇군요···."
과연 보육원 짬밥깨나 먹은 에드나답게 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마찬가지로 속닥거리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하마터면···. 어?"
"왜요?"
"···저, 아기는 원장 선생님께 맡기지 않았나요?"
"맡겼죠."
"······??"
그때 어디선가 깊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윈스톤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