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96화 (296/925)

296회

52. 공작님의 심문 (9)

에드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뒤늦게 아차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원래 세르펜스가 해야 했을 변명을 대신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세르펜스가 워낙 마음이 여려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그런 게 너무 힘들었다나 봐요. 마력의 타래를 강제로 끊는다는 게 좀···. 그렇잖아요?"

"저런···."

"필요한 일이기에 마음 독하게 먹고 시작은 했지만, 막상 비명을 들으니 망설여지더랍니다."

나는 엉엉 울어대던 세르펜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목소리에서 절로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에드나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녀를 속이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켕겼지만, 세르펜스가 힘들어한 것은 명백한 진실.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내 양심은 오늘도 떳떳하다.

"더군다나 소중한 이가 심하게 다쳐서 왔으니, 여러모로 심란할 만도 하죠."

"아, 맞아요. 어쩐지 어제 표정이 좀···."

"싸했죠? 저도 녀석이 그렇게까지 화난 건 처음 봤습니다."

"그만큼 소중했나 보네요."

"그렇죠. 굳건한 믿음으로 이어진, 아주아주 친밀한 사이입니다."

"아, 아아-!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그래서 그렇게나···. 많이 힘드셨겠네요."

내 변명이 제대로 먹혀들었나 보다.

에드나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안감은 남았다.

'세르펜스가 운 사실을 에드나에게 말해버렸다···!'

눈에 씐 아기펜스 필터가 미처 벗겨지기 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분위기 잡고 찔끔 눈물 흘렸다고 말한 정도가 아니라, 울다 잠들었다고 표현했다. 이것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 에드나가 티를 내기라도 한다면 세르펜스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을지도 모른다.

"아 참. 근데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건 절대 비밀입니다."

"알고 말고요. 그러니까···, 비밀 연애라는 거죠? 절대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할게요."

"네? 비밀 연애? 누가 누구랑요?"

"위리디아 님과 프라시더스 씨가요."

금시초문이다. 나도 모르는 세르펜스의 연애사라니.

유지스가 몰래 유언비어라도 퍼트린 건가?

"여기서 계속 떠들다간 프라시더스 씨께서 깨시겠어요. 우린 어서 식사하러 가죠. 아이들은 이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레드포드 경도···."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하오."

"정 그러시다면 식사를 가져다드릴게요."

"그리해 준다면 고맙겠소."

내가 어버버거리는 동안, 윈스톤과 대화를 나눈 에드나가 나를 질질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 * *

유지스가 눈을 뜬 것은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서다.

나는 약속했던 대로 세르펜스를 깨웠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부기가 오른 눈을 신성력으로 가라앉히고,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표정이 침울해 보이긴 했으나, 울다 잠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자신이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에드나 씨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길 잘했네.'

윈스톤은 걱정 없다.

고자질하려면 세르펜스의 면전에 대고, '주군께서 울다 잠드셨다고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

그딴 휴마눈새나 할 만한 짓을 윈스톤이 할 리가 없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요."

"아직도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세르펜스가 전전긍긍하며 유지스의 손목을 잡고 또다시 신성력을 밀어 넣었다.

신체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지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그의 말대로 유지스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지만, 세르펜스의 안색도 만만찮게 창백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환자가 둘인 줄 알겠다.

"진짜 괜찮아요. 한동안 정령은 불러낼 수 없을 것 같지만, 몸 자체에는 아무 이상 없어요."

"···정말이십니까?"

"정말이고 말고요. 제가 무리해서 힘을 끌어내는 바람에 역소환 당한 것뿐이라, 잘 먹고 잘 쉬면 괜찮아져요."

유지스가 세르펜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손목에서 떼어내며,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에드나가 훈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말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세르펜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당장은 오해라고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다.

내 예상이지만, '알았어요, 알았어. 비밀 엄수!'라고 말하며 눈을 찡긋거리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랄 수밖에.

"죄송합니다, 악마 숭배자에게서 정보를 일찍 들었다면···."

새벽에는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는데. 녀석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심문하면서 뭔가 듣긴 했나 보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악숭이 놈도 부담 없이 줄줄 말한 건지, 고문의 성과인지.

어느 쪽인지는 녀석이 무엇을 어디까지 들었느냐에 따라 갈릴 듯싶다.

"어차피 양동작전이었을 거예요. 세르펜스에게서 마지막 답장이 오고 얼마 안 되어서 일이 벌어진 거라···."

누가 들으면 전서구를 보낸 게 세르펜스인 줄 알겠다.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그보다 양동 작전이라는 건···.'

나를 납치하기에 앞서, 세르펜스의 관심을 잡아끌기 위해 꾸민 계략일 테지.

거기에 애꿎은 유지스가 걸려든 거다.

정작 세르펜스는 보육원이 붙어있었지만, 악숭이 놈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세르펜스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나 보다. 녀석의 표정이 부쩍 우울해졌다.

"일단 뭐라도 좀 먹는 게 어때요?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많이 고프네요."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달래듯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장 캐묻고 싶었지만, 환자를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렇게 하자며 유지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세르펜스는 유지스의 상태를 살폈고, 유지스는 그를 안심이라도 시키듯 그릇을 전부 비워냈다.

아이들은 모두 전 원장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원장실에 모여 앉았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에드나의 방음 마법이 펼쳐지기 무섭게 세르펜스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세르펜스의 무게감 있는 모습에 좋다고 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신흥 유지스 계파'의 시조가 녀석의 시선을 피했다.

식사부터 하자던 그 말이 시간 끌기로 느껴질 만큼, 무척이나 수상했다.

"···로시오 상단의 본단에서 폭발이 있었어요."

유지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세르펜스는 계속 설명하라는 듯,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오 상단이 악마 숭배 세력과 연계돼 있다는 건 알지만, 그곳의 직원들은 일반인이잖아요."

"그 사람들을 구하다가 다쳤다는 뜻입니까?"

"그런 셈이죠."

"으음···. 저는 고작 그것만으로 유지스, 당신이 이렇게까지 다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분석하는 듯한 눈으로 유지스의 표정을 뚫어지라 살폈다.

녀석이 보기에도 유지스의 행동이 수상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환자를 상대로 심문하는 건 너무한 처사 같다.

"제가 모습을 드러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더니, 악마 숭배자들이 나타나서 공격해오더라고요."

"빨리 알아챌 수는 없었습니까?"

"폭발이 흑마법에 의한 것이라, 흑마력이 주변에 흩어져 있어서···."

"당신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구하려 했을 테고."

"···네에."

"그리고?"

세르펜스의 말이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저 내 착각일까?

이 자리에는 에드나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지스가 사람들을 구한 것 자체를 나무라진 않을 거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을 아끼고 걱정하는 행동은 대외펜스의 설정권 내다.

녀석은 자신이 화난 것을 감추지 않았다.

"다리가 잔해에 깔린 사람을 구해서 업고 있었는데···."

"악마 숭배자였습니까?"

"그, 그렇긴 한데···."

"눈앞의 악마 숭배자의 공격에 집중하고 있던 찰나, 뒤에서 기습당했다는 변명이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아무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일반인이라 방심했다는 변명도 마찬가집니다."

유지스가 정황 설명을 가장한 변명을 하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졸지에 해야 할 말을 모두 빼앗긴 유지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만약 유지스가 환자만 아니었다면, '무릎 꿇고 손들어 형'에 처했으리라.

"상처를 입은 채, 사람들을 구하려다 상태가 더 악화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정말 그러셨던 겁니까?"

"하지만 눈앞에 다친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어요? 가만히 두었다간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유지스도 다치셨잖습니까. 그 상태로 무리해서 정령의 힘을 끌어 쓰다가···. 결국에는···."

세르펜스가 굳은 얼굴 근육을 풀며, 쓸쓸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퍽 가련했다.

갑자기 녀석이 표정을 바꿨다면 조심해야 한다.

한껏 다그치다가 풀어주는 건, 용서의 증거가 아니라 채찍을 위한 당근이다.

"위기에 빠진 타인을 구하는 건···. 네, 좋습니다. 그걸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해해 주는 건가요?"

"하나 저는 생판 모르는 자들의 부상보다, 제 사람이. 유지스가 다치는 게 더 가슴 아픕니다. 이런 제가···, 나쁜 겁니까?"

세르펜스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지며 팔(八)자를 그렸다. 그 아래의 녹색 눈동자는 슬프게도 일렁였다.

다른 누가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당장 위로해 주어야 마땅하지만, 그게 세르펜스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이건 아름다운 덫이다. 여기에 걸리면 끝장이다.

"아, 아니에요! 누구나가 다 그렇죠."

"누구나 라면, 유지스도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아···."

유지스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세르펜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는지 물었습니다."

"죄,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남들을 우선시해서···?"

"그게 잘못이라는 자각은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대화는 다시 원점이다.

유지스는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고, 세르펜스는 왜요 병에 걸린 여섯 살처럼 '왜'라는 질문을 연발했다.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도돌이표를 찍었고, 그럴 때마다 유지스의 정신은 탈탈 털렸다.

'저런 건 또 언제 어디서 배운···, 아···.'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에게 이런 대화법을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기억이 있다.

장난으로 말했던 건데, 녀석은 그걸 기억하고 응용하여 써먹고 있었다.

'유지스, 미안요···.'

유지스가 슬쩍슬쩍 나를 곁눈질하며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남들을 구하고자 했던 그녀의 용기와 선한 마음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세르펜스가 그녀에게 한소리 하지 않았다면 내가 했을 거다.

'유지스는 너무 착하고, 경계심이 없어.'

한 번 된통 당한 터라 낯선 친절을 경계하는 마음은 생겼지만, 다친 약자에겐 여전히 물렀다.

그녀는 선량한 엘프들 사이에서 몇백 년을 살아왔다. 그러니 남을 의심하는 일이 힘겨울 만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자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는 현실이 애달프다.

위태로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선한 마음씨를 악용하는 악숭이 놈들에게 치가 떨렸다.

결국 세르펜스는 유지스로부터 두 번 다시 안 그러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첫째도 둘째도 본인의 안전이요, 타인을 챙기는 건 여유가 생겼을 때나 하는 것임을 단단히 못박았다.

대륙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세르펜스가 한 말이다. 유지스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윈스톤 경."

"예! 기사, 윈스톤 레드포드! 주군의 부름을 받습니다!"

유지스가 털리는 걸 눈앞에서 봤기 때문일까?

윈스톤이 군기가 바짝 들었다. 하마터면 이등병으로 착각할 뻔했다.

"경께서 페롤 령을 벗어난 건 어제가 아닌, 그저께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세르펜스의 질문에 윈스톤이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우렁차며, 앉은 자세에는 각이 살아있다.

"목소리는 낮추고,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페롤 령에서 알고르 령으로 향하는 골목에 잠복이 있을까 봐, 돌아서 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들켜서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또한, 덕분에 유지스가 무사히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잖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 어린 세르펜스의 감사 인사에 윈스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는 직전에 갈궈진 유지스의 앞에서 차마 웃지 못하고, 입을 꽉 앙다물었다.

'얼마나 주군의 인정에 목말랐기에 저럴까···.'

유지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윈스톤을 부럽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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