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회
53. 공작님의 영입 제의 (4)
세르펜스는 몸을 살짝 틀며 한 걸음 물러선 것만으로, 옆구리를 노리는 늑대 마물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즉시 발을 굴러 가볍게 뛰어올랐다.
녀석이 서 있던 공간을 또 다른 마물이 물어뜯었다. 이미 그 자리에는 세르펜스가 없었으므로, 마물은 공기를 집어삼킨 꼴이다.
한 마물은 공중에 몸을 띄운 세르펜스를 향해,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발톱을 들이밀었다.
세르펜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정갈하게 정제된 신성력이 깃든 검과 아무렇게나 날뛰는 거친 흑마력이 맞부딪혔다.
위력 자체는 세르펜스의 신성력이 더 강했으나, 질량과 무게는 그렇지 않았다.
두 기운이 맞부딪히며 생겨난 반발력으로 세르펜스는 훌쩍 날아갔다. 도달 지점에는 먼저 도착한 늑대 마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뭐 이리 합이 딱딱 맞아?!'
세르펜스는 날아가는 와중에도 검을 휘둘러 어디론가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공중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마물을 단숨에 베었다.
사람들과 마차 등이 오가며 짓이겨진 회색 눈밭 위로 검은 핏물이 튀었다. 거대한 마물의 몸체가 쓰러져 눈밭에 파묻혔다.
거의 동시에, 머리 위에서 콰릉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악숭이가 또 마법을 썼나 보다. 세르펜스가 난데없이 신성력을 날렸을 때 예상했던 바다.
이제는 네 마리가 된 마물을 상대하는 세르펜스를 향해서도 간간이 마법이 날아왔다.
녀석의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 쏘아진 얼음 화살. 목을 노리는 바람의 칼날. 등 뒤를 엄습해오는 불길.
때로는 눈으로 덮인 땅속에서 느닷없이 덩굴 같은 게 자라나 그의 발목을 노렸다.
'참 골고루 사용하네!'
이러라고 있는 4대 원소가 아니건만.
악숭이 놈들은 세상에게 사과해야 한다.
세르펜스는 온갖 방해들을 뚫고 마수의 숫자를 차근히 줄여나갔다.
격렬하게 움직인 탓인지,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는 어느새 벗겨진 지 오래다. 세르펜스의 청은 빛 머리칼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네, 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버렸다. 세르펜스가 싸우는 모습에 너무 몰입했던 탓이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스태프를 꼬옥 움켜쥔 에드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태프를 꺼내셨으면 마법을 쓰셔야지, 왜 구경만 하고 계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질문한 거예요."
"예?"
"마법을 쓸 수가 없어요."
"네에?! 설마 악숭이들이 마법을 못 쓰게 하는 마법이라도 개발한···."
"아뇨, 프라시더스 씨께서 펼치신 신성 결계 때문에요."
"······."
신성 결계에 마법을 봉쇄하는 기능 따윈 없다.
그냥 결계의 존재로 인해, 그 너머의 적을 공격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프라시더스 씨는 원래 저렇게 혼자 싸우시나요?"
"어, 어어···, 음···, 그게···, 저기, 뭐시다냐···."
이 상황. 어딘가 익숙하다.
암흑가 경매장에서 허망하게 서 있던 윈스톤의 모습이 에드나와 겹쳐져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책임지는 걸 강요당하다 보니···. 일종의 고질병 같은 겁니다."
"저런···. 고위 귀족에겐 그 나름의 고충이 있나 보네요."
"세르펜스의 경우는 그놈의 시발검···. 아, 시발점이 되는 검의 줄임말입니다. 저만의 애칭이죠. 덕분에 대륙의 위기를 미리 알 수 있었잖아요? 이 대륙을 구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절대 욕한 거 아닙니다!"
"줄여도 왜 하필···. 아무튼 알았어요. 계속 얘기하세요."
악숭이와 모남이의 예시가 있었기 때문일까?
에드나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냥 넘어가 주었다.
"어쨌든 그거 때문에 특히 더 했죠. 세르펜스가 성검을 받았으면, 동료도 안 붙여 줬을걸요?"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건만. 몇 번을 떠올려도 울화통이 터진다.
내 이죽거리는 말투 속에서 반감을 읽었는지, 에드나가 괴이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신의 사자가 성검을 그딴 식으로 취급해도 돼요?"
"신의 사자니까 되는 겁니다. 왜, '까도 내가 까.'라는 말도 있잖아요? 남이 하면 이단이지만, 제가 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반성 같은 느낌인 거죠."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어요. 크게 와닿지는 않지만."
에드나가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그녀가 세르펜스의 과거를 몰라서 그런 거다.
그 증거로 유지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신의 뜻을 받드는 신도의 모습 그 자체다.
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시온, 에드나 님께 신의 사자라는 걸 밝혔어요?"
유지스가 곱게 모았던 손을 풀며 내게 질문했다.
"네, 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수상한 행동이라도 하신 건가요?"
"누가 들으면 제가 매일 수상한 짓 하는 그런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
어째서일까? 그녀는 말없이 빙그레 미소 지어 보인 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태도다.
'와, 진짜 억울하네!'
그저 에드나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함이었는데.
물론 내가 중간 설명을 너무 많이 건너뛰었다거나, 말의 앞뒤가 안 맞았다거나. 그런 이유로 에드나의 혼란을 가중시키긴 했지만!
'···그만 따지자.'
나는 유지스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르펜스는 벌판에 홀로 서 있었다. 바닥에 깔렸던 눈들은 이런저런 마법에 노출된 탓에, 죄 헤집어지고 녹아 사라졌다.
쓰러진 마물을 향해 세르펜스가 손을 뻗었다. 은빛 광채가 마물의 시체를 감쌌다. 죽은 마물의 몸에 남아 있는 흑마력을 정화하는 행위다.
분명 악숭이가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을 거다.
마법을 날린 악숭이와 마물을 조종한 악숭이. 최소 둘 이상이다. 그러나 공격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신성력을 두른 덕에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세르펜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바로 마부석에 올라탔다.
"악숭이 잡으러 안 가요?"
다시 마부석 방향으로 난 작은 창에 달라붙어 그에게 질문했다.
"마법은 세 방향에서 날아왔습니다."
일견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대답이다.
그러나 세르펜스어 해석기에 의하면, 자신이 한쪽을 조지러 가면 남은 두 방향에서 마차를 공격해 올 거라는 뜻이었다.
"결계가 있으니 괜찮지 않아요?"
"온전히 제 신성력과 정신력으로 유지되는 결계입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그 위력이 약화되거나 해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숭이들이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모양이다.
"적들은 자신의 위치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해, 소모전을 벌일 생각인 듯합니다."
방금처럼 마수를 보내거나 마법을 날려 세르펜스의 체력과 신성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겠노라, 대놓고 선포한 셈이다.
정말 치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제가 한 번 공격해 볼까요?"
우리의 시선이 에드나에게로 쏠렸다. 세르펜스도 작은 창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법이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우리 또한 그곳까지 마법을 날려 보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확한 위치만 짚어주시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때요?"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에드나의 전력을 완전히 논외로 두고 있던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4시 방향으로 3Km가량 떨어진 산이 보이십니까?"
"네, 보여요."
"정상으로부터 25m 낮은 곳에 커다란 침엽수가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정상인의 시력으로 보일 리가 만무하다.
잠시만을 외친 에드나가 눈 깜짝할 새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의 마력이 에드나의 눈에 깃들었다. 시력을 보정해주는 마법인가 보다.
"이제 보이네요."
"그 나무로부터 동쪽으로 2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다른 나무들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데···. 그냥 날리면 될까요?"
"예. 신호를 주시면 바로 결계를 거두겠습니다."
에드나의 마력이 이리저리 얽히며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마법식을 계산하는 게 아닐까 한다.
"됐어요!"
그녀의 신호와 동시에 신성 결계가 눈 녹듯 사라졌다. 결계 위에 쌓였던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작은 바람이 불었다.
시작은 연약한 산들바람이었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차 세를 불려 나갔다. 땅과 나무에 쌓여있는 눈을 거둬가며, 거대한 눈보라가 되었다.
세르펜스가 가리켰던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에드나의 마법은 훌륭한 눈사태를 일으켰다.
"어때요?"
"저들 중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죽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빠져나오려면 며칠은 걸릴 겁니다."
"다른 두 군데는 어디 어디죠?"
"방금 공격한 위치는 지령을 내리는 지휘부라 보시면 됩니다. 다른 적들은 다음 공격을 위해 자리를 옮겼을 겁니다."
공격에 성공하고 자신감에 차올랐던 에드나는 세르펜스의 말에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우선 이동하겠습니다."
에드나의 기운이 빠지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차피 적들이 알아서 공격해 올 거다. 그러니 가야 할 길을 마저 가겠다. 뭐 그런 생각 같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돌아서 가겠습니다."
"고삐를 쥔 건 세르펜스니까, 알아서 하세요."
"바람이 찹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창문은 닫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녀석의 말대로 창문을 닫았다.
보육원에서 출발할 땐 악숭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정보를 생략하더니. 이제 와서 아무래도 좋은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다.
* * *
몇 번의 공습(攻襲)이 있었다.
처음에는 세르펜스의 신성 결계로 막아냈으나, 우리가 움직이면 신성 결계도 함께 이동해야 한다는 맹점이 있었다.
즉, 신성력과 정신력이 무지막지하게 소모된다는 뜻이다.
악숭이들도 그것을 아는지, 세르펜스가 결계를 거두기만 하면 득달같이 마법을 쏘아 댔다.
우리는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콰앙!!
마차에 마법이 직격했으나, 에드나의 마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강화된 마차는 악숭이의 마법을 견뎌 냈다.
그러나 마차가 기우뚱거리는 건 물리 법칙상 어쩔 수 없었다.
세르펜스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마차가 뒤집히지 않도록 균형을 잡았다.
'과연 내 베스트 드라이버!'
마음 같아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몸을 지지하기 위해, 내부 장식을 붙들고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거다.
곧 마차의 출렁거림이 멈췄다.
하지만 내 속의 울렁거림은 멈출 줄 몰랐다. 그건 에드나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창문을 열고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보육원을 출발할 때만 해도 환자는 유지스 한 명뿐이었건만. 지금은 유지스보다 나와 에드나의 상태가 더 엉망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작은 창을 다시금 열어젖혔다.
"세르펜스."
"말씀하십시오."
"도착하려면 멀었어요?"
"으음, 애석하게도···. 말씀드렸다시피, 돌아가는 중이라 시간이 꽤 걸립니다."
이런 제기랄.
나는 속으로 악숭이를 향한 욕을 쏟아내며, 작은 창을 도로 닫았다.
우리의 바뀐 전략에 악숭이가 작전 회의라도 하는 걸까? 한동안 공격이 멎었다.
드디어 속을 진정시킨 에드나도 머리를 마차 안으로 되돌렸다.
사람의 몸은 참 간사한 것이라, 울렁거림이 가라앉고 나자 이젠 속이 허해졌다.
나는 닫았던 작은 창을 다시 열었다.
"세르펜스."
"말씀하십시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따질 법도 한데, 세르펜스의 답변은 여전히 친절했다.
"우리 저녁 식사 어떻게 하죠?"
"항상 아공간 주머니에 음식을 넣어 다니셨잖습니까? 케이크라던가, 쿠키라던가···."
"그거 애들 다 줬잖아요."
"음···.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퍼준 걸, 세르펜스가 기억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아직 담아두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하나 남겨둘 걸 그랬다.
"아, 맞다! 핫초코 분말이랑 마시멜로는 남았는데!"
"시온. 굶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걸로는 배를 채울 수 없어요."
내 외침에 유지스가 심히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다. 세르펜스에게 핫초코라도 타줄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였다.
어쩌면 세르펜스는 남은 달다구리가 하나도 없다고 말해놓고, 시온에게만 핫초코를 타준 것에 억하심정을 품은 걸지도 모른다.
'이거 정말 삐질 만했네···!'
미안한 마음에 차마 녀석의 얼굴을 볼 엄두가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