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회
53. 공작님의 영입 제의 (15)
나는 귤에서 눈을 떼고 다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세르펜스, 세르펜스. 정말 제가 그런 대답을 바라고 질문한 것 같아요?"
"······."
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는 뜻이다.
일부러 내 복장을 뒤집어놓으려고 그런 건 아니고, 그러기 싫다는 자기 뜻을 내게 전한 거다.
"적어도 한 명은 양보해야죠. 아니, 이걸 양보라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요."
"···꼭 그래야만 하는 건가?"
세르펜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마치 청천벽력의 비보라도 들은 사람 같다.
의문과 상실감이 뒤섞여, 어딘가 처절하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거지?'라며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원래 이 시기.
그러니까 교우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처음 사귄 친구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한다.
조금 다른 예시지만, 다 큰 성인조차 친구들이 자기만 쏙 빼놓고 놀면 서운함을 느끼지 않는가.
하물며 세르펜스는 이십여 년 동안 소중한 것을 만들 수 없었다.
나와 유지스는 세르펜스가 긴 세월을 혼자 견뎌낸 끝에, 겨우 사귀게 된 소중한 친구다.
평생 가져본 적 없었고,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던.
하지만 남들은 쉽게 만들고, 쉽게 버리는.
그렇기에.
이미 많은 것을 가진 타인이 자신의 것까지 탐내려 한다고 세르펜스가 오해한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내 의견만 강요했나···?'
짧게나마 반성해 본다.
무작정 이렇게 하라고 시키기보다는 녀석도 수긍할 수 있는 타협점이 필요하다.
세르펜스는 아직 어리긴 해도, 천재라서 어른과 대등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 세르펜스. 우리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내가 운을 띄우자, 녀석이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이 좋다.
"세르펜스가 저와 유지스를 양 옆구리에 끼워 옮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이쿠! 악숭이가 나타났지 뭡니까?! 상상했어요?"
"···그래."
"검을 휘둘러 악숭이를 처치하려는데, 아차! 양손은 이미 저와 유지스를 들고 있어서 검을 뽑을 수가 없어요!"
"으음···."
"그런데 옆에서 누가 저와 유지스 중 한 명을 들어주겠다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자, 이때 세르펜스는 어떻게 해야 하죠?"
세르펜스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했다. 그러자 녀석이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그자는 정말 믿을만한 사람인가? 도와주는 척 배신할 가능성은? 혹은 유사시에 자신의 목숨을 우선하여,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방패로 쓰는 사람일 가능성은?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할 바에는 그냥 도망친 후, 나중을 기약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너무 진지하게 고민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좋아요, 인정! 그럼 세르펜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때요? 예를 들어 윈스톤이라고 가정하죠."
"흐음, 윈스톤 경이라면···. 유지스를 양보하겠다."
옆에서 '아···.'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유지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가 더 실망하기 전에 세르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콕 찍어서 유지스를 건네겠다고 한 이유는 뭐죠?"
"윈스톤 경이라면 안정적으로 목말을 태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건 대체 무슨 이유죠?"
"목말을 탄 상태라면 유지스가 활을 쏠 수 있잖은가."
나는 드넓은 윈스톤의 어깨와 그 위에 올라타 활을 쏘는 유지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브레멘 음악대야, 뭐야?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내가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유지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죠."
대체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가출한 어이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세르펜스가 뚱하게 질문했다. 녀석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혼난 거라고 판단을 내린 거다.
하지만 이대로는 내가 납득할 수 없다.
"그럼 휴마누스는 어때요?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잖아요. 방패가 되면 됐지, 남을 방패막이로 쓸 사람도 아니고."
"그자는 성검의 주인이잖은가?"
성검의 주인을 옆에 두고, 왜 자기가 싸워야 하느냐는 의문이다.
"사람을 들고 싸우는 건, 여러모로 제약이 많다. 한쪽 팔이 봉쇄된 두 명이 싸우는 것보다, 한 명이 전력을 다하는 편이 훨씬 낫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건 휴마누스에게 시키고, 자신은 나와 유지스를 양 옆구리에 끼고 물러나 있겠다는 소리다.
실로 우문현답이다.
악숭이와 싸우도록 선택받은 용사를 두고, 왜 세르펜스가 짐까지 든 채 싸운단 말인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맞아요, 쉴 수 있을 땐 쉬어야죠."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악숭이는 성검의 주인에게.
세르펜스는 분업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실천할 준비를 마쳤다. 혼자서 다 처리하려고 아등바등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녀석의 성장에 찔끔 눈물이 나오려 한다. 정말 감동적이다.
"으음···. 인기척이 느껴지는군.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뭐해요? 빨리 안 내려오고."
세르펜스가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는 나와 유지스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빈자리에 앉았다.
나는 벌서느라 수고한 녀석의 팔을 조물조물 주물러 주었다.
녀석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행위이다.
네가 싫어서 혼낸 게 아니라고. 언제나 아끼고 걱정하고 있노라고.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걸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혼나서 의기소침해진 아이의 기를 살려주는 거다.
세르펜스는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며 나를 흘깃 흘겨봤지만, 방금 혼난 사람치고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 똑, 똑, 똑.
녀석의 말대로 누군가 방에 찾아왔다.
조몰락거리던 세르펜스의 팔을 놓아주고, 문을 열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유지스가 급하게 저지했다.
"잠깐만요. 제가 열어 줄게요. 시온은···, 세안이라도 하고 오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막 자다 깬 상태라는 걸 잊었다.
눈을 떴는데 입안에 음식물이 있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는 손님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위에 붙어있는 거울을 본 나는···.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준 거야?"
까치가 와서 알을 낳고 갈 정도로 머리가 덥수룩했다.
입가에는 흰 수프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이는 필시 세르펜스가 묻힌 게 틀림없다. 자는 사람 입에 수프에 담갔던 빵을 욱여넣는데, 깔끔할 리가 있나.
나는 조용히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일단 머리부터 감고 생각하자.
* * *
나는 허겁지겁 씻고 욕실에서 나왔다.
세르펜스와 유지스뿐 아니라, 에드나와 월권기사까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까는 갑자기 잠드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워낙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 아하하···."
"일반인 몸으로 악마 숭배자들에게 쫓겼는데, 피곤하신 것도 당연하지요. 긴장이 풀려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나 봅니다."
월권기사도 성직자이긴 한가 보다.
민망해하는 나에게 월권기사가 괘념치 말라는 듯 말했다.
- 끼익···.
월권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느닷없이 빈 의자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세르펜스가 의자를 당긴 탓이다.
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꺼내주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그냥 빨리 자리에 앉기나 하라는 뜻이다.
"무슨 대화 중이셨어요?"
"현재 엘로윈 보육원의 소유권은 로시오 상단에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의자에 앉으며 질문하자, 세르펜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다른 지역의 신전에서 온 연락에 따르면, 로시오 상단의 타 지부들도 괴인의 습격을 받아 무너졌다고 합니다."
"악숭이 놈들, 아주 그냥 싹 다 날려버렸구나?"
작정하고 꼬리를 자르려나 보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살살 문지르듯 털었다.
"아 참! 상단주는요? 놈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상단주라면 발견하긴 했지만···."
대외펜스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떨궜다.
상단주가 시체로 발견됐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로시오 상단은 악마 숭배 세력에 동조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보육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아이들은요?"
"다른 지역의 보육원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세르펜스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표정도 짓지 못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람은 정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기존의 아이들을 우선으로 신경 써 주겠지. 외부에서 온 아이의 순서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서로 똘똘 뭉쳐도 앞으로 살길이 막막한 아이들이다.
낯선 지역, 낯선 사람들 속에서. 언제 적응해서 언제 자리를 잡는단 말인가.
'설마 에드나가 보육원에 미련을 갖지 않도록···. 아니, 아니지. 이건 아니야.'
이건 세르펜스가 유도한 상황이 아니다.
로시오 상단이 악숭 세력과 관련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르펜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죠?"
녀석은 월권기사에게 보육원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분명 보육원을 유지할 방법이 있는 걸 테다.
"반역자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것처럼, 악마 숭배자의 재산은 교단에 귀속됩니다."
"그럼 교단이 보육원을 운영하는 겁니까?"
"교단 소유의 보육원으로 아이들이 뿔뿔이···."
"네, 아닌 거 알았고요. 그래서 진짜 해결 방법은요?"
"누군가 보육원의 소유권을 사들이면 됩니다."
심플 이즈 베스트. 간단하고 참 좋다.
"참고로 귀족 혹은 왕족이 외국에 개인 사업장을 개설하는 건, 국제법 위반입니다."
"···보육원인데도요?"
"복지 사업도 사업은 사업입니다."
나나 세르펜스, 유지스의 명의로 보육원을 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에드나에게로 쏠렸다.
해결 방안이 제시되었음에도 그녀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녀는 가난한 마법사였다.
"이런 얘기, 정말로 염치없는 건 알지만···. 혹시 돈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
에드나가 우리 중 가장 부유한 세르펜스를 향해 머리를 푹 숙였다.
평소라면 세르펜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겠노라, 자신이 호구임을 선언했을 거다.
하지만 웬일인지 녀석은 침묵을 지켰다.
"꼭 갚을게요! 시약을 팔든, 스크롤을 팔든! 그···러려면 재료를 살 자본금도 필요한데···. 아이, 씨···."
말을 뱉으면서 바로 계산에 들어갔는지, 점차 불어나는 금액에 에드나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반쯤 쥐어뜯다시피 머리를 부여잡았다.
왼손으로는 머리칼을 헝클이며, 오른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이 무척이나 초조하고 불안해 보인다.
그녀는 처음 듣는 무언가의 명칭과 가격 등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마법 연구에 필요한 물품의 이름과 중고가로 추정된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팔면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것 같다.
"저는 베네볼렌 씨에게 돈을 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세르펜스의 목소리다.
에드나의 중얼거림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