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회
53. 공작님의 영입 제의 (16)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세르펜스가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보육원의 소유권을 사들여서···. 그 이후의 운영비는 어디서 구하실 생각입니까?"
매정한 말이다. 하지만 타당했다.
세르펜스는 냉정하게 말하였으나, 표정은 안타까움을 한껏 머금었다. 물론 연기다.
"또 베네볼렌 씨께서는 시약과 스크롤 판매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판매하실 생각입니까?"
"마탑을 통해서···."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마탑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금액 상당수는 수수료로 빠져나간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신 마탑에서 판매 전반을 도맡아 주잖아요. 마탑의 시설을 이용하는 비용과 제가 평소 마탑에서 지원받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마탑도 마탑을 운영해서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건물의 유지관리도 신경 써야지, 에드나처럼 가난하지만 유능한 인재도 양성해야지. 돈 나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에드나가 그런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세르펜스는 고개를 저었다.
"소량만 판매하는 거라면 몰라도,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쉬는 날 없이 작업에 몰두하셔도 순이익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소소한 용돈 벌이나,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라면 마탑에 납품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것 없이 제작에만 몰두하면 되니까.
그러나 대량으로 넘어가면 말이 다르다. 박리다매를 추구하기에는 마법사의 인건비가 너무 비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드나의 손에 들어올 돈은 소량이지만 판매되는 가격 자체는 정찰가다.
마법 시약과 스크롤은 사는 사람만 사는 고가의 물품. 애초에 '다매(多賣)'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크롤이 됐든 시약이 됐든, 재료비가 장난이 아니다. 살짝만 삐끗해도 재료비가 와장창 깨진다.
새로운 연구 없이 항상 같은 물건만 찍어낸다면 연구비는 소모되지 않을 거다. 그 대신 발전이 없겠지.
또한 사람이 반복 노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도 단순한 반복 노동이 아니라 '섬세하고 복잡한' 노동을 하면서. 그게 가능할까?
힘들게 벌어들인 수익이 실수 한 번에 몽땅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솔레르티아가 괜히 제국까지 와서 개인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세르펜스에게 투자받는 것을 대가로 수익의 일정 비율을 떼이지만, 마탑에서는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금액을 떼간다.
그리고 프뤼네 왕국의 세금은 제국과 비교도 안 되게 높다.
솔레르티아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게 떼일 거 다 떼이고 재료비를 충당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며, 제국에서 장사를 시작한 자신의 선견지명을 스스로 치하했다.
"베네볼렌 씨께서는 사업을 해보신 적···. 아니, 최소한 관련 공부를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시약과 스크롤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어디서 구매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마···."
"마탑을 거쳐서 구매하는 방식 이외에 말입니다. 유통 단계가 늘어날수록 수수료가 붙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량만 필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
세르펜스가 사업 컨설턴트로 돌변하여, 에드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이 '사장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사업을 시작하시면 망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길바닥에 나앉고 싶어요?'라고 번역되어 들렸다. 무지막지한 독설이다.
에드나가 듣기에도 다를 바가 없는지,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드리기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베네볼렌 씨께서는 생산 계통과는 맞지 않는 듯합니다."
"아,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저도 가끔 스크롤이나 시약을 만들 때도 있어요!"
"가끔이잖습니까?"
"열심히 하면 돼요. 잘할 수 있어요."
"잘할 수 있으시다면, 어째서 이제까지 안 하셨던 겁니까?"
세르펜스의 말에 에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력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흔들리는 에드나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세르펜스는 쐐기를 박았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얼굴로, 비정한 현실을 입에 올렸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긴 알지만···.'
녀석이 에드나를 영입하려 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뻔한 이야기다.
괜히 성격에도 안 맞는 사업해서 말아먹을 생각하지 마라. 계약금과 월급을 두둑이 챙겨줄 테니, 얌전히 고용이나 돼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제가 베네볼렌 씨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볼렌 씨의 성격이 급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급한 편이긴 한데···."
"가만히 앉아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시간과 공을 들여 무언가를 하는 일이 맞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그, 그게···."
"새로운 연구는 즐겁고,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기꺼우며, 예상치 못한 결과는 탐구심을 충족시켜 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과정은 몹시 지루하고, 지루함은 실수를 유발하며, 실수는 손해로 이어집니다."
"······."
녀석의 연이은 팩트 폭력에 에드나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졌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기 위함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고작 그딴 이유로 사람의 정신을 몰아가는 건 너무하다.
"가끔은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매일 하실 수 있습니까? 자신의 성장을 포기하고, 새로운 발견을, 좋아하는 일을, 자신의 꿈을.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을 외면한 채. 자신의 성향에 맞지도 않는 일에만 매달릴 수 있으십니까?"
세르펜스를 말리며, '그만둬! 에드나 씨의 라이프 포인트는 이미 제로야!'라고 외치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아냈다.
나라면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펑펑 터트렸을 텐데도. 에드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울음을 참아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에드나가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말을 내뱉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제가 베네볼렌 씨를 고용하겠습니다."
드디어 세르펜스가 팩트 폭력을 멈추고 본래의 목적을 입에 담았다.
"베네볼렌 씨는 뛰어난 마법사이며,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인재입니다. 그런 분께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시는 모습을···, 저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세르펜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긍휼히 여기는 시선을 보내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차갑게 내려앉은 어둠을 가르며,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 줄기 햇살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분'이 좌절하도록. 심한 말로 몰아갔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고, 고용이요···?"
에드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르펜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모습이다.
"저는 한때···. 저 혼자 희생한다면 이 대륙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네, 네?"
"아이들을 위해 홀로 희생하려 하시는 베네볼렌 씨의 모습을 보니···. 문득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세르펜스는 과거형처럼 말했으나, 아직 진행형이라 나에게 많이 혼나고 있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경계하고, 아끼는 사람이 무리한다 싶으면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걸을 수 있다는 사람을 들어서 옮기고, 밥 먹이겠다며 자는 사람 입에 빵을 욱여넣었지···.'
그래도 휴마누스에게 악숭이를 떠넘기고, 자신은 나와 유지스랑 함께 뒤에서 놀고 있겠다는 말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고쳐지긴 했다.
"그래서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인가요?"
에드나가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기쁨과 당혹. 감사함과 미안함이 뒤섞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들뜰 뻔했던 에드나의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치사함의 끝을 달리는 세르펜스의 줬다 뺏기 화법에, 지켜보던 월권기사가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월권기사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에도 세르펜스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후.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베네볼렌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순수하게 '거래'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너무 부담을 갖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심 넘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녀석이 진심으로 그녀를 배려했다면 팩트를 한 마디라도 덜 날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고용하겠다는 말을 했을 거다.
즉, 오늘도 평범하게 세르펜스가 대외펜스 했을 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검의 선택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이 세상을. 이 대륙의 모든 이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건, 세르펜스에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녀석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해댔다.
한때 세르펜스는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을 진심으로 구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주제로 고민했었다.
당시의 나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참으로 숭고하다 생각했었다.
지금 녀석이 악숭이들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건···. 맞긴 맞다.
그러나 녀석의 말에는 두 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첫째. '여전히'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녀석은 과거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을 뿐. 구하고 싶다는 바람은 없었다.
둘째. 말해 무엇하랴. '모든 이들'이 거짓이다.
녀석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 영역을 최대한 넓게 펼쳐봤자, 공작저 인원이 한계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그들조차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져 있다.
"베네볼렌 씨께서 시온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면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날 거라며, 걱정하셨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 그걸···, 들으셨어요?!"
위험한 상황이라 혼자 착각하여, '주인공의 성장에 (중략) 희생 장면'을 연출했던 에드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 싸이월드를 켰다가, 욕하면서 탈퇴 버튼을 누르던 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당시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으니 감성적인 말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 이후다.
세르펜스가 눈 깜짝할 새에 상황을 끝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롭게 차를 마셨다.
허무함.
그 허무함이 에드나의 결단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없이 진지했던 그때의 감성이 부끄럽게 되어 버렸다.
흑역사가 생성된 것이다.
"보육원 아이들이 걱정되어, 그들의 곁을 떠나기 힘들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베네볼렌 씨에게는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습니다. 희생을 줄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능력이 있습니다. 베네볼렌 씨께서 말씀하셨던, '대륙의 안녕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에드나의 흑역사를 들추다 못해, 재방송하고 감상평까지 덧붙였다.
부끄러워하는 에드나가 보이지 않는 건지, 월권기사가 '오오!'하고 감탄사를 추임새처럼 넣었다.
"힘든 일입니다. 겪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악마 숭배자들의 계략은 음습하고 잔인합니다.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을 보며 가슴 아픈 일도 많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베네볼렌 씨께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저희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에드나가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저희와 함께···, 세상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듣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멘트다.
저런 말을 하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세르펜스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신성함이 넘치고 처연한 미인상이라 그런가···. 그림은 되네.'
그림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RPG 게임 도입부에 '용사여, 성공을 빕니다.'라는 말과 함께 주인공에게 축복을 내리고 사라지는 여신 같다.
물론 세르펜스는 남자고, 이 세상의 신은 룩스메아 뿐이지만.
"타인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멘트 하나하나가 주옥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