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회
56. 공작님의 쇼핑 (1)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빈 그릇들을 식당에 반납하고, 신전 밖으로 나왔다.
정문에는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떡하니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 옆에는 월권기사도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함이다.
에블린에 관해 물어보니, 아직 조사 중이라 바쁘단다.
'월권기사, 얘는 일 안 하나···?'
궁금증이 일었으나, 대놓고 물어보기 뭐해서 그냥 참기로 했다. 그 대신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의 위치를 물었다.
우리는 미련 없이 마차에 올랐고, 마부석에는 후드를 눌러 쓴 세르펜스가 앉았다.
손을 흔들어주는 월권기사를 뒤로하며 마차가 출발했다.
"간식이라면 저번에 주신 게 많아서 당분간은 괜찮아요."
에드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넌지시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간식이 필요한 아이가 하나 있어서 그렇다.
사실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간식이라는 건, 세르펜스를 위한 간식을 사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아직 분유밖에 못 먹는 아기를 제외해도 열두 명이나 되잖아요. 이틀에 하나씩만 나눠줘도 금방 떨어질걸요?"
"군것질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안 좋아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마부석 쪽을 바라봤다.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은 닫혀있건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에드나의 말에 반박하고 있을 세르펜스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먹을 수 있다면 모를까, 군것질에 한번 맛 들이면 끊기 어려워요. 받는 처지에서 이런 말 드리긴 죄송하지만···.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는 시온 씨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아이들에겐 도움이 안 돼요."
에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라고 아이들이 간식을 좋아하고, 적당한 간식은 아이들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걸 모르겠는가.
다만 간식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떨어졌을 때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걱정하는 거다.
"그럼 커다란 홀 케이크나 하나 사서 다 같이 나눠먹는 건 어때요? 간식은 안 돼도, 특별한 날 먹는 케이크는 괜찮잖아요?"
"특별한 날이요?"
"송별회 해야죠."
"···아."
이제야 아이들을 떠나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난 걸까?
에드나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비록 그녀가 항상 보육원에 머무르는 건 아니었으나, 같은 프뤼네 왕국 내에 있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보육원을 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와 비교도 안 되는 먼 거리를. 긴 시간을 떨어져 있는 거다.
"이별 선물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사주고 싶은데. 그 정도는 괜찮겠죠?"
"네,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에드나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창을 열고, 길 가다가 서점이 보이면 멈춰줄 것을 세르펜스에게 부탁했다.
'제과점에 도착하기 전까지 서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서점을 찾을 때까지 빙빙 돌아야 하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서점은 쉽게 발견됐다.
마음 같아서는 서점에 있는 동화책을 전부 사들이고 싶었으나, 보육원에 둘 데도 마땅치 않아 적당히 골라서 사기로 했다.
"저는 낯을 가리니까, 마차를 지킬게요."
아까 에드나에게 설정을 지적당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정말로 낯가림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다.
유지스가 낯가림을 운운하며 자진해서 마차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세르펜스는 혼자 남을 그녀가 걱정되는지, 서점 입구에서 갈팡질팡했다.
"전 괜찮아요. 슬슬 정령의 힘도 돌아오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유지스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바람이 일렁였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췄으며 정령도 부를 수 있게 된 유지스. 그리고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일반인인 나.
둘 중 어느 쪽이 세르펜스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는지는 뻔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소리를 지르십시오. 바로 구하러 오겠습니다."
세르펜스는 유지스에게 명심하라는 투로 주의를 남기고, 나와 에드나를 따라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이 사뭇 비장하다.
우리가 동화책을 사기 위해 잠깐 서점에 들른 것뿐이라는 현 상황을. 녀석이 바르게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에드나와 나는 동화책 판매대에서 책을 뒤적거렸다.
전부 살 게 아니라면 최대한 교훈적인. 그리고 흥미진진한 내용의 동화책을 사는 게 제일이다.
"에드나 씨, 가격표 보지 마세요."
"하, 하지만···. 비싼 동화책은 어지간한 전문 서적 이상인걸요?"
동화책은 아이들이 주로 읽는 만큼, 종이가 쉽게 찢어지지 않도록 두껍고 튼튼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 유발을 위해 삽화도 들어가는데, 이 또한 동화책의 가격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만약 삽화가 컬러라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구친다.
"괜찮습니다. 저 월급도 꽤 많이 받는 데다가, 작위 있는 귀족이라 황실에서 품위 유지비도 나오거든요."
"그래도 너무 비싼 선물을 턱턱 받는 건 너무 미안해서···."
"누가 들으면 에드나 씨를 위한 선물을 사는 줄 알겠습니다."
에드나는 고민 끝에 눈을 딱 감고, 손에 들고 있던 동화책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들이 열세 명이니까, 열세 권만 사죠."
"그렇게나 많이요?!"
내가 툭 던진 말에 에드나가 화들짝 놀라 하며 반문했다.
그러나 동화책 열세 권은 절대 많은 수가 아니다.
비록 그 가격이 전문 서적 급이라지만, 동화책 열 권 읽는 시간을 쏟아부어도 전문 서적 한 권을 못 읽는다.
"···살면서 책 열 권도 안 읽어본 사람처럼 뭘 그리 놀라요? 책이 읽고 나면 사라지는 물건도 아니고. 사면 두고두고 읽는 건데."
"그, 그건 그렇긴 하죠···."
"제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계속 같이 있을 것처럼 굴어놓고, 속인 거나 다름없잖아요."
"시온 씨 잘못이 아니에요."
에드나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동화책 선별 작업에 집중했다. 그녀도 신중하게 동화책을 골랐다.
그렇게 나와 에드나가 합계 여덟 권의 책을 고르는 동안. 세르펜스는 한 권의 책도 고르지 못했다.
그저 이 책 저 책을 들었다 놨다 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슬쩍 다가가 물었다.
"읽고 싶은 거 없어요?"
"···예?"
"아, 아니. 아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없어요?"
"으음···."
세르펜스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책장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과 함께였다. 무려 손가락 네 마디 두께에 달하는 책 겉면에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가나안 대륙 기초 상식 대백과]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슬쩍 넘겨보니, 깨알만 한 크기의 글자가 종이를 빼곡히 채웠다.
세상이 무너져도 지면 낭비만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흘러 넘친다.
군데군데 삽화가 있긴 했으나, 철저하게 정보 전달에 치중하여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읽으라고 가져온 거 아니시죠?"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찔리느냐고 묻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녀석의 그런 시선을 못 본 체했다.
어쨌거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다.
에드나와 합의하여, 동화책 권 수에는 포함하지 않고 구매하기로 결정 내렸다.
"이번엔 동화책으로 골라 봐요."
"······."
세르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녀석은 나를 노려보다가 동화책이 꽂힌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싸움할 시간에 책을 고르는 게 더 생산적이라 판단한 거다.
카운터에 네 권의 동화책이 더 올려졌을 무렵. 드디어 세르펜스가 동화책 한 권을 나에게 내밀었다.
제목은 [눈물들의 담론].
'대백과는 이것을 위한 큰 그림이었나?'
동화책의 주 소비층인 어린아이가 과연 '담론'의 뜻을 알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고심해서 고른 동화책이다.
나는 녀석을 타박하는 대신 동화책을 펼쳐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눈물들의 담론]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인화된 눈물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다.
비관의 눈물이 흐느껴 우는 것으로 동화는 시작되었다.
「 "우리는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일 뿐이야." 」
시작부터 자기 비하가 장난 아니다.
동화가 이렇게 비관적이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좌절 끝에 도달한 눈물, 이별의 슬픔에서 온 눈물,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마지막 눈물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눈물이 비관의 눈물이 하는 말에 동의를 표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며, 자신들을 버리고 나면 사람들이 가뿐해 하는 게 그 증거라 하였다.
자신들의 존재가 사람들을 힘겹게 한다며, 이 세상의 해악이라 자칭했다.
이에 배신감에 차오른 눈물은 자신들을 버린 사람들에게 복수하자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분위기가 반전되는 건, '기쁨의 눈물'이 목소리를 내고 나서부터다.
「 "그렇지 않아! 우리의 존재 의의는 행복이야. 우리는 절대 쓸모없지 않아! 버려지는 게 아니야!" 」
어른의 관점에서 읽으면, 공감 능력 떨어지는 놈이 저 혼자 즐겁다고 눈치 없이 떠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동화였다.
「 "맞아. 우리는 가치 있는 나눔의 증명인걸. 사람들은 우리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 힘을 내기 위해 우는 거야." 」
기쁨의 눈물이 하는 속 편한 얘기에 동정심에 우러나온 눈물이 힘을 실어 주었다.
눈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박장대소하다 찔끔 흘러나온 눈물이 맞는 말이라며 깔깔 웃었다.
재회의 반가움에 흘러내린 눈물, 감사함에 복받쳐 오른 눈물,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여 샘솟은 눈물 등.
긍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한 눈물들이 슬퍼하는 눈물들을 달래며, 그들을 설득해 나갔다.
'이건 어른들을 위한 동화네.'
세상에 치여서, 힘들고 고달파서. 그리고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져서. 작가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서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건 확실했다.
다소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어린아이가 읽기에 어려운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괜찮은 동화책이다.
나는 [눈물들의 담론]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계산하시겠어요?"
"잠깐만요! 그 전에···."
서점 주인이 질문에 나는 잠깐만을 외치며 에드나를 돌아봤다.
"에드나 씨는 먼저 나가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합산 가격을 들으면 까무러칠 텐데."
"···네, 그게 좋겠어요."
에드나가 도망치듯 서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라도 가격을 듣게 될까, 귀까지 막은 채다.
문이 열렸다 닫히며, 문에 걸려있던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맑은 방울 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즈음.
"이 책 찾은 곳에서 똑같은 거 한 권 더 가져오세요."
나는 세르펜스에게 [눈물들의 담론]을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은 뭔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순순히 동화책을 들고 왔다.
계산을 마치고, 열세 권의 동화책과 한 권의 대백과를 내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 권의 동화책이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로 들어갔다.
"독후감 쓰고 검사 맡으세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졌지만, 그 미래를 바꾸지 못한 세르펜스가 한탄스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