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회
56. 공작님의 쇼핑 (4)
"···데릭?!"
에드나가 놀란 눈으로 모남이를 바라봤다.
월권기사에게 이것저것 듣긴 들었지만, 모남이가 사회봉사 처분을 받았다는 건 못 들었나 보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모남이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제야 놀라 도망갔던 정신이 돌아온 에드나가 소매로 눈물 번진 눈가를 문질렀다.
"내 이름은 이제 데릭이 아니라···."
"모남아!! 아, 아니, 모남 씨!"
"모···, 뭐?"
내 반가운 부름에 모남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해괴한 거라도 본 듯한 얼굴이다.
"그렇지 않아도 보육원에 인력이 부족해서 걱정이었는데, 일꾼을 둘이나 데려오다니! 역시 믿을 건 모남 씨뿐이라니까요? 둘 다 듬직~한 게, 진짜 일 잘하게 생겼네!"
"···우리가 친한 사이던가?"
모남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아니꼽다.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친하지도 않은데 왜 친한 척하느냐는 불만이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일손이 왜 없···. 어째서 엘프가 둘이나···? 아니, 한 명은 인간···인가?"
뒤늦게 세르펜스와 유지스를 발견한 모남이가 흠칫 놀랐다.
이렇게 눈에 띄는 두 사람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모남이의 시야가 지나치게 좁은 건지, 덩치가 셋이나 있어서 시야가 가려졌던 건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데릭···. 지금은 도리안이라고 했던가? 잠깐 나랑 나가서 얘기 좀 해."
"좀 이따 해요. 아직 송별회 중이잖아요. 주인공이 먼저 일어나면 안 되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나에게 다시 앉을 것을 권했다.
그녀는 망설였으나, 자신을 붙잡는 아이들의 손길에 도로 앉았다. 모남이는 그런 에드나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송별회? 떠난다고? 갑자기 왜···? 저 사람들이랑 가는 거야?"
마치 기폭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모남이가 질문을 쏘아 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에드나도 크게 당황한 눈치다.
"누나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또 그때처럼···. 그때 내가 누나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친부모에게 버려지고, 친누나처럼 따랐던 사람까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이, 날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 어떻게 또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널 버리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에드나가 벌떡 일어나며 경악했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난데없이 막장 드라마로 장르가 변경되었다.
"시온 씨,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잠깐 나가서 데릭과 대화 좀 나누고 올게요."
에드나가 성큼성큼 걸어, 모남이의 손목을 잡고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에 모남이의 호위들이 작은 목소리로, '불쌍한 도리안 님···.'같은 얘기를 저들끼리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에드나가 마법을 배우느라 보육원에 신경을 못 썼고, 어린 모남이는 자신이 또 버려졌다고 오해하고, 그대로 입양을 가는 바람에 오해를 못 풀어서···.'
모남이의 시간은 그 시절에 그대로 멈춰 섰던 거다.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모남이의 호위들도 입을 다물었고, 식당은 적막에 잠겨 들었다.
적막 사이로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짝-, 하는 마찰음이 뒤를 이었다.
한 아이가 케이크를 마저 먹으려고 포크를 들었다가, 옆의 아이에게 손등을 맞은 거다.
"흠, 흠! 다들, 일단 먹자꾸나."
원장님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하나둘 포크를 손에 쥐었다.
무심코 본 세르펜스의 접시 위에는 케이크가 하나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에드나와 모남이에게 쏠려있을 때. 은밀하게 기척을 숨기고 혼자 케이크를 먹고 있었던 거다.
'그래, 어린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 먹어라, 먹어.'
나는 입가심으로 먹으려고 아껴 뒀던 케이크 위 딸기를 세르펜스의 케이크 위에 얹었다.
* * *
"진짜 이대로 떠나도 괜찮겠어요? 오늘 하루 정도는 묵었다 가도 되는데···."
마차가 달리고 있으나 이제 막 출발한 참이다.
보육원은 점차 멀어지고 있지만, 아직 가까웠다. 마차를 돌리려면 얼마든지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드나는 내 권유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작별 인사가 길어지면 아쉬움만 커지는 법이라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오해는 잘 풀었어요?"
"네, 다행히도···."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래요?"
"당시 보육원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저를 기다리는 데릭···. 도리안에게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저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버리고 간 거라고 얘기했다나 봐요."
뭐 그런 애들이 다 있나 싶다가도, 그렇게 단념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안타깝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입양 날짜가 정해지고. 자신이 보육원을 떠나는 그날까지 제가 나타나질 않아서···. 입양된 후에도 연락해오지 않아서. 그래서 절 원망했대요."
"오해를 풀어서 다행입니다."
"네, 도리안은 착한 아이거든요."
"아, 네···."
"걔가 보육원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긴 했지만! 그건 저를 향한 원망 때문이고, 진짜 아이들을 해코지할 생각은 절대 없었대요!"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아무래도 찔렸나 보다.
'결국 후원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했네.'
그런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남이가 깽판 치러 와서, 집기 하나 부수지 않고 얌전히 돌아간 것. 아까 식당에서의 외침.
'그리고 아까 놀이방에서 뭐라고 했더라?'
에드나가 위임장에 서명하러 잠깐 원장실에 들렀을 때. 우리는 다 같이 놀이방에 모여있었다.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놀이방을 둘러보던 모남이는 다 낡아 빠진 장난감들을 발견하곤, '구질구질하게. 뭐 이딴 걸 갖고 놀고 있어? 새로 사 줄 테니, 싹 다 버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나, 안쓰럽게 여기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한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굳이 내가 나서서 후원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알아서 보육원을 도와줄 것 같다.
'내가 억지로 강요하는 것보다, 그게 낫지.'
마냥 선의로 가득 찬 사람은 아니지만, 모진 사람은 될 수 없는.
그게 내가 모남이를 보고 느낀 감상이다.
아이들과 정이 든다면 정해진 봉사 기간이 끝나도 가게가 쉬는 날에 종종 방문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저나 마탑에서 짐을 싹 빼 와서 다행이네요. 마탑에 들렀으면 일정이 길어졌을 텐데."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었는지, 에드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가증펜스는 빙그레 웃으며 '네,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말했고, 유지스는 낯을 가리는 척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낯가림 설정이 처음으로 도움이 된 순간이다.
그리고 윈스톤은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마차 안에 없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게 다 저의 선견지명 덕분이죠!"
"참! 시온 씨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셨었죠?"
"네, 뭐···. 그랬죠."
괜히 나댔다.
나는 조용히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마차는 어색함을 헤치고 달려, 다시 페롤 령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차표를 예약한 후,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케이크 한 조각으로 어물쩍 넘겨버렸잖아?!"
"케이크 한 조각이면 한 끼 열량으로는 충분하죠."
"열량이 아니라 영양분을 따져야죠! 열량만 채우면 그만이라니. 그럼 그냥 버터를 퍼먹지, 왜 빵을 먹겠습니까?"
"아···! 이해했어요!"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와 에드나는 바람직한 식단에 관한 토론을 주고받았다.
마차에서 보냈던 숨 막힐 듯 어색한 시간은 마치 환상처럼 부서져 내렸다.
테이블 위에 세르펜스가 좋아하는 미트볼 토마토 리조또를 비롯한 여러 음식이 하나둘 올려지기 시작했다.
"윈스톤 레드포드 경이랬나요? 제가 동행한다는 얘길 갑자기 들어서 많이 놀라셨죠?"
"아니오. 아, 아니, 그렇소! 많이 놀랐소."
에드나의 물음에 윈스톤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무래도 윈스톤은 비밀 결사 단체의 일원으로서 연기력과 순발력을 키워야 할 성싶다.
"흠, 흠! 앞으로 잘 부탁하오, 베네볼렌 양."
"저도 잘 부탁해요, 레드포드 경."
다행스럽게도 에드나는 윈스톤의 어색한 답변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달짝지근한 소스 사이로 후추의 매운맛이 톡톡 튀고, 씹으면 육즙이 쫙 흐르는 게 정말 감동적이다.
사실 그렇게 맛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 부실하게 먹다 보니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좀 미안한데···.'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먹던 부실한 식단을 떠올리자 마음 한쪽이 무겁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던 원장 놈이 없어졌으니, 이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유지스 님과 시온 씨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시던데···. 프라시더스 씨와 레드포드 경께서는 성으로 부르시네요?"
"그야 유지스 님과 시온 선배는 붙임성이 좋으시···."
"쿨럭, 쿨럭!!"
한가롭기 짝이 없는 윈스톤의 말에 먹던 스테이크가 목에 걸려버렸다.
나는 미친듯이 기침했고, 세르펜스는 그런 내 등을 두드리며 물을 건넸다.
숟가락을 받치고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말던 유지스는 그만 손을 삐끗해버렸다. 파스타 소스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무, 무슨 일이오? 습격인가?!"
윈스톤이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갑자기 벌어진 난장판에 에드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윈스톤 경, 아무 일도 없으니 자리에 앉으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한. 이번 사건의 원흉인 세르펜스가 윈스톤을 자리에 앉혔다.
사레들린 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하나도 안 고마워서, 녀석의 손을 쳐냈다.
"저···. 유지스 님은 낯가림이 심한 편 아니었나요?"
"······."
휴마눈새라면 '응? 아닌데?'라는 말이 대뜸 나왔겠지만, 윈스톤은 말을 아꼈다.
그 대신 윈스톤의 시선이 유지스에게 다다랐다.
유지스는 죄가 없건만. 그녀를 바라보는 윈스톤의 시선이 무척이나 차디찼다.
"유지스는 그저 제 말에 맞춰준 것뿐입니다."
세르펜스가 자진 납세했다.
유지스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윈스톤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만 보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탈룰라 할 뻔했다.
"저는···."
녀석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일렁일렁한 눈동자로 에드나를 바라봤다.
가련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그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시들어 떨어져 내릴 듯, 위태로운 목련화를 연상케 했다.
그렇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받길 원하는 게 아니라, 어물쩍 넘어가려는 수작이다.
"저는, 어릴 적부터 모든 일을 홀로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시온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덕택에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도 낯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많이 서툽니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세르펜스가 작정하면 이 세상에 못 속일 사람이 없다. 그런 녀석이 실제 있었던 일을 들먹였으니.
그 누가 지탄하거나 의심할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도르륵 흘러넘칠 듯, 가녀린 세르펜스의 모습에.
"그, 그런···!"
에드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탄식을 흘렸다.
이쯤 되면 세르펜스의 얼굴로 해결 못 하는 문제가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다.
게임으로 치자면 치트키요, 소설로 치자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할 수 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베네볼렌 씨."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죠!"
이런 식으로 유지스의 낯가림 설정을 끝내줄 수 있었으면, 진작에 좀 해주지.
"그리고 유지스에게도···.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괜찮아요. 이해해요."
세르펜스가 자신을 아껴서 그런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지스 또한 너그럽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아량이 바다만치 넓어서 하늘과 맞닿았다.
"아···. 그런데 유지스 님만요? 시온 씨는요?"
"유지스가 낯을 가린다는 건 거짓이었으나, 시온은 원래 그런 사람이 맞습니다."
에드나의 의문에 세르펜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