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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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병사들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근위 기사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빠르게 포위망을 좁혀왔다. 한 무리를 뿌리치면 두 무리가 따라붙었다.
그들은 몹시 적극적이며, 또 집요했다.
우리를 공격하는 행위에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가 가는 길목을 몸으로 막아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신들의 목숨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 쐐액, 쇄애액-!
장대비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를 아니마의 마법이 막아냈다.
악마 숭배자들과 싸울 때는 공격에 치중하던 그녀였으나, 이들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악마가 아닌, 한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기사와 병사들이 우리를 향해 무기를 들이댔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 혹은 제압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무력화된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병사들의 공격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문제는 기사들이다.
이대로는 한계가 있다.
'이대로는···.'
검집에서 뽑지도 않은 성검으로, 복부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걷어냈다.
푸로르 또한 드루이드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병사와 기사들을 상대했다.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무기를 든 적들을 상대하는 그녀의 몸에 하나둘 생채기가 났다.
"공왕!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압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내 외침에 공왕이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눈앞의 기사를 방패로 밀쳐내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벽에 올라서 활시위를 겨누는 병사들 사이로, 공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공왕의 옆을 근위 기사단장이 굳건히 지키고 섰다.
"···왜 모르겠습니까."
"예. 몰라서는 안 되지요."
공왕의 등장으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우리를 공격해오던 검과 화살이 멎어 들었고,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하나, 이 공간에 나와 공왕만이 남은 것처럼.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를 죽였다.
"꼭 이런 방식을 택해야 했습니까?"
"선조의 잘못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왕국은 영토를 잃었으며, 왕국이 아닌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신성 제국의 속국으로, 죄인의 국가라 손가락질을 당해왔습니다. 하나,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제국이 본국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런 강경한 수단을 쓸 수밖에요."
"하필 이런 시기에 이래야만 했습니까?!"
"본국이 제국에 머리를 조아린 이래,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매해 공국에서는 해방을 바라는 요청서를 보내왔고, 아바마마께서는 그 청을 거절해 왔으니.
하지만.
"어째서 제국이 공국의 요구 조건을 거부했는지는 공왕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저 우리가 누려야 했던 것들을 뒤늦게나마 누리며, 선조의 것을 돌려받길 바랐을 뿐입니다."
"공국이 조금만 뜻을 굽혔다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조국의 해방을 일찍이 맞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양보는 가진 자의 특권입니다. 양보해야 한다면, 본국이 아닌 제국에서 해야만 합니다."
"다른 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공국을 다시 왕국으로 돌려주는 것은 물론, 세(勢)를 가다듬을 때까지 외부의 침략에서 지켜주는 것도. 얼마든지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토만은 안 됩니다. 볼타 산맥은 대륙의 큰 위협입니다."
"그렇다면 제국은 본국이 옛 영토의 '면적'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한 걸음 물러났으나, 공왕은 내가 물러난 걸음의 두 배만큼 요구했다.
볼타 산맥을 내어주지 않는 대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걸 도와 달라니.
"제국은 대륙을 수호하고 균형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래의 영토를 돌려달라는 요구도. 공국의 침략 전쟁을 도와달라는 요구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인의 국가라는 굴레를. 공국이라는 이름을 벗어 던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제국 측에서도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 굴레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건, 제국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국의 속국이라는 위치를 방패막이 삼고, 뒤로는 이런 요청서를 보내는 공국 지도층의 욕심입니다!"
토지가 척박하여 식량을 생산할 수 없는 게 아닌 이상, 영토의 확장은 백성들과 무관한 일이다.
바란다면. 누린다면.
오로지 귀족과 왕족들뿐이다.
"공국의 발전을 막아, 홀로 설 수 없게 만든 건 제국입니다!!"
"그래서 공국이 힘을 갖출 때까지 보호해 주겠노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일 뿐입니다. 공왕께서 진정 공국민을 위한다면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욕심을 버리고, 백성들에게 씐 죄인의 국가라는 굴레를 벗겨 주십시오!"
주변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좋습니다. 전하께서 약조하신 것을 모두 지키신다면."
드디어 공왕이 물러서기로 한 걸까?
오랜 세월 요구해왔던 바를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병사를 물려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로만 하는 약속을 어찌 믿겠습니까? 그것도 본국에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들어, 힘없는 백성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밤중에 도망가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을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제가 어찌하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볼모가 되어 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다.
굽히는 듯했던 공왕의 태도는 병사들의 수군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그래. 너무 긴 시간이었지.'
공국에서 매년 보내온 요청서의 내용은 매해 같았다. 현 공왕뿐만 아니라, 전 공왕도 같은 조건을 요구했다.
폴드 왕국이 공국이 된 이래로. 그 내용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정녕 그것이 공왕의···. '당신'의 염원입니까?"
몇 대에 걸쳐 새로운 공왕이 즉위하였음에도.
선대로부터 주입된 과거의 영광에 눈멀고, 대대로 물려받은 숙원에 제 목을 매었다.
'···이건 대체 누구의 바람이지?'
앞만 보고 달리도록, 눈 옆을 가리개로 가린 경주마라도 된 양. 세상에 존재하는 길이 하나뿐인 것처럼.
공왕은 그렇게 정해진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만두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
"아니! 이미 늦었습니다."
나는 젊은 지도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성벽을 붙잡은 공왕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있는 걸, 나는 왜 이제서야 발견했을까?
"더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공왕은 만인 앞에서 선언하듯 당찬 목소리로,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미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았구나···.'
공왕은 해묵은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제국의 황태자를 끌어들이려 자국민의 희생을 미끼로 내걸었다.
그렇기에 내가 무엇을 약속하든 공왕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의 대화는 무용(無用)한 것이었다.
"공왕!! 지금이라도 멈추십시오! 당신은 악마 숭배자들에게 이용당하는 것뿐입니다!"
"제국의 황태자여! 이제는 황태자라는 지위뿐 아니라, 성검의 주인이라는 지위까지 이용해 본국에 죄를 덧씌우는 것이냐!"
그 무용한 대화조차,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본국의 기사와 병사들이여! 우리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운 제국의 황태자를 붙잡아라! 자유를 우리의 손으로 쟁취하자!!"
공왕의 명령에 기사와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언제부터 틀어진 것인지.
이제 와서는 무용한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고막을 흔들었다.
어느새 푸로르의 양팔이 북슬북슬한 털에 뒤덮여 있었고, 그 부피 또한 거대해져 있었다. 사람의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곰의 앞발이 자리했다.
"푸, 푸로르?!"
"응?"
"응이 아니라···, 방금···."
사람이 피를 흘리며 날아갔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기사도 아닌 일반 병사다. 살아있다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교섭이 결렬된 것 같아서. 아니야?"
"아니긴! 맞아!!"
- 꽈광─!!
아니마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마법이 작렬했다.
성벽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성벽에 걸려있던 마법 보호막이 발동했다.
- 꽈릉, 꽈릉, 꽈르릉-!!
벼락이 연거푸 떨어졌다.
보호막이 깨지고, 견고하게 쌓아올려진 성벽도 무너져 내렸다.
공왕은 기사단장의 품에 안겨 몸을 피했으나, 병사들은 그러질 못했다.
- 쿠르릉···!
굉음이 지축을 울렸다. 수많은 생명이 꺼지는 소리였다.
"아아···! 무고한 생명들이···!!"
"리에나, 정신 차려!"
나는 비틀거리는 리에나에게 황급히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리에나는 고개를 흔들며 내 부축을 거부하고 균형을 다잡았다.
"저는 괜찮으니 앞을 보세요, 휴마누스 님!"
성검을 쥔 손을 들어올려, 바로 지척에 다다른 기사의 검을 막아냈다.
마주한 기사의 얼굴이 익숙했다. 악마 숭배자의 흔적을 뒤밟았을 때 함께 했던 자다.
국가를 향한 충성심이 뛰어나며, 정도 많고 곧잘 웃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순순히 잡혀 주기라도 할 생각이야? 명령에 따른 것이든, 조국을 위하는 마음에서든. 우리에게 무기를 들이댄 이상, 저들은 적이야!"
푸로르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번에는 기사가 푸로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용병이다. 무기를 맞대는 적에게 관용이란 없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아준 거다.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기사의 검을 밀어내며 리에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양손을 모아쥐고,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리에나에게서 피어오른 신성력이 나와 푸로르의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활력이 솟아오르자, 푸로르는 더욱 크게 날뛰었다.
팔뿐 아니라 다리까지 변형했는지, 통 넓은 바지가 덥수룩한 털과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꽉 차 터질 듯했다. 얼굴까지 털이 듬성듬성 올라오기 시작했다.
- 콰앙!! 쾅!!
허공에 끊임없이 마법진이 새로 그려졌다. 아니마도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왕성만 빠져나간다고 끝이 아니야! 다들 힘을 아껴!!"
검집에서 성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성검을 고쳐잡아, 힘껏 휘둘렀다.
성검에 깃든 황금빛 신성력이 긴 궤적을 그리며 공국의 기사를 베었다.
* * *
■
"오오! 방금 궤적 봤어요? 반짝반짝!"
나는 성검보다도 성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세니어를 한 손으로 고쳐잡고, 휘적휘적 휘둘렀다.
은은한 펄감이 범상치 않다 싶더라니, 움직일 때 더욱 아름답게 반짝였다.
"세르펜스, 세르펜스! 검 관리하는 법 알려줘요!"
"직접 할 생각입니까?"
"오늘부터 제 취미는 세니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주는 겁니다! 먼지 한 톨 없이!"
내 대답에 세르펜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부끄럽나 보다.
반대로 크레아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만든 예술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 준 것에 기뻐하는 걸 테다.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보기 좋았던가.
"아차! 프라시더스 군에게 편지가 왔었는데, 깜박했구먼! 미안하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별안간 크레아토가 호들갑 떨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엥? 편지?"
"제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편지를 보내 달라고, 공작저에 연통을 넣어놓았습니다. 그 답장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런 건 언제 보냈대?"
"당신이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파베르 님께 부탁해두었습니다."
"파베···? 아, 크레아토 씨 성이죠?"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레아토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이걸세!"
크레아토가 건네준 편지를 세르펜스가 받아들었다. 녀석은 봉랍된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뜯어 읽었다.
나도 세르펜스의 옆에 붙어 그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공왕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휴마누스와 그의 일행은 공국을 무사히 탈출해, 현재는 볼타 산맥 근처에서 대기 중이라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