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27화 (327/925)

327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3)

[성검의 주인]에서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나라가 지금은 가장 먼저 등을 돌렸다.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악숭 세력이 이간질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왕이 세뇌를 당했다든가, 무언가 약점이 잡혔다든가···.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세르펜스의 손에 들려 있다.

이 편지가 거짓일 리는 없다. 어차피 제국 근처만 가도 알게 될 사실이다.

'세르펜스에게 미리 언질을 듣긴 했지만···.'

눈앞에 닥치고 나서야,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정신이 얼떨떨하고 심경이 복잡하다.

테라룸 왕국에 디저트로 유명한 도시가 있다고 해서 들를 예정이었으나, 그럴 여유는 없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세르펜스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크레아토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제국으로 향했다.

'···그래 봤자 기차 안에서는 강제 느긋 모드였지만.'

기차 안에서 부지런 떤다고 기차의 속도가 빨라진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지만, 물리 법칙상 불가능한 일이다.

불안한 마음을 달콤한 간식들로 달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우리는 제국에 들어오자마자, 수도도 들르지 않고 볼타 산맥으로 직행했다.

거대한 산맥을 따라 두꺼운 성벽이 길게 둘러쳐져 있었다. 이 정도면 만리장성은 못 되어도 천리장성쯤은 되지 않나 싶다.

"성벽을 둘러놨네?"

"신성 결계가 깨졌을 때를 대비한 겁니다."

가볍게 흘린 내 혼잣말에 누군가 화답했다.

설명한다면 당연히 세르펜스일 줄 알았는데. 녀석의 미성이 아닌, 거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높다란 성벽에서 시선을 거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거친 목소리만큼이나 험한 풍파가 느껴지는 얼굴의 성기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볼타 산맥의 경계를 맡은 테르멘 O. 마르코라 합니다."

어쩐지 고생을 많이 한 얼굴이더라니, 볼타 산맥 담당이란다.

이곳을 지키는 임무가 보통 힘든 게 아닌가 보다.

"성검의 주인께서는 위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기사는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바로 우리를 휴마누스에게 안내해 주었다.

이게 다 세르펜스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완전 하이패스 저리가라다. 세르패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오는 길에 공국이 카술라 령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세르펜스가 앞장서 길을 안내해 주는 성기사에게 질문했다.

카술라 령은 폴드 공국과 접하는 지역으로 공국과 볼타 산맥 사이를 잇는 영지다.

볼타 산맥을 하나의 선으로 봤을 때, 우리가 와 있는 위타 령의 맞은 편이기도 했다.

현재 카술라 령은 제국의 영토지만, 공국이 왕국이던 시절에는 그들의 영토였다고 한다.

"영주가 공국에 항복하며 문을 열어줬다는 모양입니다."

"카술라 령의 신전 상황은 알고 계십니까?"

"하아···."

성기사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예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으나, 그런 걸 따질 겨를조차 없다는 뜻이리라.

공왕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공국의 병사가 카술라 령을 점령했다면. 그곳의 신전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공국 내부의 신전들도 그건 마찬가지겠지.

"주변의 영지 상황은 어떻습니까?"

빠르게 파악을 마친 세르펜스가 다른 화두를 던졌다.

"타 지역의 피해는 없습니다. 다만 카술라 령의 영지민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어, 상황을 지켜보는 중입니다."

"으음···."

"공국이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으니, 그곳의 사람들에게 큰 위해를 끼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나···. 크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신성 루멘 제국의 백성으로 신앙심을 갈고닦으며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 나라가 '옛날 옛적에 이 땅은 우리 땅이었다!'라고 외치며 침입해 온 셈이다.

그리고는 신전을 부수고 성직자들을 학살해 댔다.

반발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 반발을 억누르는 방법이 결코 평화적일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성기사를 따라 걸었다.

성벽 위에 올라서니, 볼타 산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외부의 침입이나 공격에 반응하여 발동되는 여타 결계와 달리, 항상 내부의 기운과 마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일까?

성검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신성 결계가 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볼타 산맥이 신성 결계로 보호되고 있다는 말은 지겹게도 들었으나, 그게 어떤 모습인지는 알지 못했다.

직접 두 눈으로 본 볼타 산맥은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는데? 요정들이 날아다니는 동산이라면 몰라도.'

비눗방울처럼 무지갯빛이 일렁거리는 신성 결계로 감싸여, 언뜻 보면 성스럽기까지 했다.

신성 결계가 너무 아름다운 탓이다.

"언니이이이이─!!"

저 멀리서 하늘색 솜 뭉텅이 같은 게 뛰어왔다. 자세히 보니 아니마다.

아니마가 풍성한 숱을 자랑하는 하늘색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같은 방향, 좀 더 먼 곳에서 휴마누스의 금붕어 색 머리칼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니마처럼 뛰어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아니마아!!!"

내 뒤에서 따라오던 에드나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니마와 에드나가 성벽 한복판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감격의 해후를 맞이했다.

누가 보면 몇십 년 넘게 떨어져 있다가, 기적적으로 만난 줄 알겠다.

'하긴. 서로에게 닥쳤던 위험을 알고 있으니까.'

에드나는 악숭이의 계략으로 악마의 제물이 되거나 타락을 할 뻔했다. 아니마는 적지에서 살아 돌아왔다.

서로의 무사함에 안도하고, 멀쩡히 살아서 다시 만난 것에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 저는 제 위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를 휴마누스에게 안내해 준다는 목적을 달성한 성기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뒤돌아 멀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에드나와 아니마를 사이에 두고 우리 일행과 성검 일행이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어쩐지 들러리가 된 기분이다.

"언니! 언니, 언니, 언니!!"

"그래, 그래. 수고했어, 많이 힘들었지?"

아니마는 이미 에드나의 품에 쏙 안겨 있었으나, 아직 부족하다는 듯 머리를 부비적대며 더욱 깊숙이 에드나의 품에 파고들었다.

에드나는 그런 아니마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들러리 수준이 아닌데?'

견우와 직녀에 나오는 까치나 까마귀가 된 기분이다.

그것도 지각해서 오작교가 되지 못해, 뻘쭘하게 주변을 맴도는.

"언니, 보고 시퍼쪄~!"

드디어 아니마의 입에서 언니라는 단어가 아닌 문장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정상적인 문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전면 취소한다.

저럴 수는 없다.

'저자는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마 프루이토, 당신은 대체 누구지?'

가히 충격적이다.

뒤통수만 보고 친구인 줄 알고 헤드락을 걸었는데, 놓아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모르는 사람의 것일 때.

그런 당혹스러움이 나를 덮쳤다.

아니마의 입에서 나온 혀 짧은 소리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귓가에 파고든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 건, 고난과 역경을 함께했던 그녀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리에나는 입을 작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데 그쳤지만, 휴마누스와 푸로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구멍을 후벼댔다.

"있지, 있지! 아니마 완~전 무서웟쪄! 근데 힘냈쪄!"

[성검의 주인]을 외전까지 완독한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아니마는 저런 가당찮은 말투를 단 한 번도 쓴 적 없었다.

비록 아니마가 [성검의 주인]에서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조금. 뭐랄까. 사실 괴팍하다는 말이 더욱 걸맞았다.

귀여운 건 외양 묘사뿐이었다.

'아니, 지금도 귀엽다기보단 조금 무서운데···?'

사람이 한순간에 저렇게 돌변하니, 낯설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에드나 앞에서 일부러 귀여운 척을 하고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저렇게까지 자신을 내려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무심결에 옆에 선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세르펜스가 눈빛으로 '난 저렇게까지는 할 자신이 없으니, 시키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런 건 바란 적도 없건만.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건 피차일반이다.

"세피, 오랜만이야!"

아니마의 행태에 큰 충격을 받았던 휴마누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세르펜스에게 말을 건넸다.

팔은 왜 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과 세르펜스의 사이가 아니마와 에드나의 사이 비슷한 거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

"네. 오랜만입니다, 전하."

세르펜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휴마누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꽤 늦었네? 먼저 도착해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에드나가 여정을 함께한 이상, 일정이 늦어진 이유를 거짓으로 꾸며낼 수는 없었다.

세르펜스는 들통날 거짓말을 늘어놓는 대신 대답을 회피했다.

"그보다 공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하자면 좀 긴데···. 이럴 게 아니라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공국에서 있었던 일도 있었던 일이고, 지금 이곳 상황도 설명해야 하니까."

한가로이 카페에 가서 디저트나 먹자는 제안은 아닐 테고. 오는 중 보았던 막사를 얘기하는 걸 테다.

이렇게 바로 내려갈 거면 뭐 하러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막사로 안내하고, 휴마누스 일행을 그리로 불렀으면 발품 안 들이고 좋았을 텐데.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앞장서 걸어갔다. 따라오라는 신호다.

그런 거 안 해도 세르펜스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니 잘 따라갔을 거다.

그러니 휴마누스는 세르펜스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인 아니마를 챙겼어야 했다.

아니마는 여전히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껌딱지처럼 에드나에게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에드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마의 분홍색 눈동자가 나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애써 못 본 척했다.

"에드나 씨, 내려갑시다."

"아! 죄송해요. 워낙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에드나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아니마를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아니, 저걸 떼어 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더 붙어 있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아니마가 에드나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 걸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에드나가 발목을 다쳐서, 아니마가 부축이라도 해주는 듯한 모양새다.

실제로는 걸음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불편함을 주고 있었지만.

'저쪽도 분리불안으로 고생하네.'

독립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떨어뜨려 놓은 반작용이리라.

나도 저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에드나와 아니마의 사례를 보며 경각심을 되새기는 사이, 성벽에서 내려와 막사가 죽 늘어선 군영에 진입했다.

어딜 봐도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생김새의 막사뿐이라, 미로에 들어선 듯하다.

'지휘 본부를 못 찾아서 회의에 지각하는 사령관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곳이라면, 길치가 아닌 사람도 길을 잃을 것 같다.

군영에 병사보다 병사였던 미아들이 넘쳐날 것 같은데, 이래도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시온."

"네?"

"막사 위, 깃발에 쓰여있는 숫자들이 보이십니까?"

"아···."

세르펜스가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막사 위에 숫자가 큼직하게 쓰여있었다. 중구난방이 아니라 순서대로 적혀있어, 그 숫자만 따라가면 길 잃을 걱정은 없을 듯하다.

'잠깐만. 내가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새로운 의문의 해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휴마누스의 걸음이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했는가 보다. 막사의 깃발에 적힌 숫자는 17이었다.

"혹시 배정된 막사 번호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런 게 있으면 안 되지. 어느 막사에 누가 머무는지 적에게 알려진다면, 노려지기밖에 더하겠나?"

내 질문에 휴마누스가 쾌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런데 손은 왜 들어 올린 건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며 질문했나 보다. 완전 습관이 들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