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9)
"잠깐 질문이 있는데···."
곧장 성벽 아래로 내려간 푸로르와 달리, 어물쩍거리며 남아있던 휴마누스가 입을 뗐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기색이다.
'설마 검대에 관한 걸 지금 묻지는 않겠지?'
아무리 휴마누스라 해도, 그 정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 거다.
세르펜스에게 말을 붙이기 껄끄러울 텐데도 질문을 한 걸 보면, 지금 해야만 하는 중요한 얘기일 터.
세르펜스는 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산맥 쪽을 바라보았다.
결계는 이미 다 깨져 있었고, 어지러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마물들도 차츰 대형(隊形)을 이루고 있었다.
개중 한 무리는 다시 산맥 안으로 내려갔다.
마물들이 대형을 이루는 모습을 봤을 때, 전법을 구사할 줄 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뭔가 던질 만한 것을 주우러 간 거겠지.
"···말씀하십시오."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서렸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끝내라는 무언의 압박이 휴마누스에게 가해졌다.
물론 휴마눈새가 그 압박을 눈치채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 결계 말이야, 어떻게 만들어야 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모두가 휴마누스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수련을 도왔던 리에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결계를 생성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셨다는 뜻은 아니길 바랍니다."
"그런 건 아니야. 이제 얼추 가능은 해."
"얼추···?"
"성검 없이는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데, 성검만 들면 신성력을 제어하기 힘들어져서···. 조금···."
휴마누스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공격이 아닌 다른 용도로 성검의 힘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뜻이었고, 다른 이들이 들었으면 사기가 뚝 떨어질 말이기도 했다.
성검의 역할이 중요한데, 성검 없이 결계를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럴 거면 그냥 세르펜스가 하는 게 낫다.
'아무리 휴마누스의 신성력이 공격 성향을 띤다 해도 그렇지···.'
신성력의 색에 따라 다른 성향을 띠는데, 그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마(魔)를 멸하는 황금색.
악(惡)으로부터 수호하는 은색.
기운을 돋우고 치유하는 백색.
하지만 어디까지나 해당 분야에서 효율을 보인다는 것뿐이지, 다른 분야를 익히는 데에 비효율적인 건 아니다.
그 예시로 세르펜스는 셋 다 잘한다.
어떻게든 쉴드를 쳐주려고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설정을 끌어와도,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룩스메아는 어째서 저딴 놈에게 성검을 두 번이나 준 걸까?
이번에는 다른 놈에게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성검의 주인 후보생이 한두 명도 아닐진대. 하필 휴마누스여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그 문제는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쳐 줄 테니까, 하려던 질문이나 빨리하고 꺼지라는 뜻이다.
"너도 알겠지만 산맥은 엄청나게 넓은 데다가, 위에만 덮으면 되는 게 아니라 땅속까지 막아야 하잖아? 결계 연습을 하면서 확실히 느꼈는데, 한낱 개인이 지닌 신성력으로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거 아닐까? 성검의 숨은 기능이라던가···."
듣고 보니 그렇다.
선대 성검의 주인이 성검의 힘으로 결계를 펼쳤다니까,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을 뿐.
거대한 산맥 하나를 감싸는 결계를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낸다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그런 걸 왜 세르펜스에게 묻는 거야?'
결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변명해 두는 게 아닐지 의심스럽다.
"선대 성검의 주인이 남긴 일지에서 기술하길. 평상시에는 성검을 거쳐 신성력이 증폭되는 느낌이라면, 볼타 산맥에 결계를 펼칠 당시에는 성검에서 미증유의 힘이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라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래서 저더러 뭐 어쩌라는 겁니까?'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세르펜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휴마누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말하였다.
놀랍게도 휴마누스는 변명을 한 게 아니라, 해답을 바라고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선대 성검의 주인은 본인이 지닌 신성력으로 길을 만들고, 성검에서 전해져 온 힘을 통제하여 결계를 펼쳤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염려 마시고, 결계를 펼치는 일에만 전념하십시오."
세르펜스의 설명이 끝났고, 휴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검을 꽉 고쳐잡았다.
그리고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황태자 전하는 그 일지라는 거, 안 읽으셨어요?"
"역대 성검의 주인이 남긴 일지들은 대신전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성검의 주인에게만 공개되는 거라서···."
내 어처구니없다는 질문에, 현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세르펜스가 몰래 숨어들어 읽은 거라면, 휴마누스가 저렇게 질문하지도. 세르펜스가 당당하게 대답하지도 않았을 거다.
즉,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될 거라고 확신하여 미리 공개했다는 뜻이었다.
룩스메아 교단은 원칙을 잘 지키는 건지, 못 지키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휴마누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고 난 후에는 뭐···. 성검의 힘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기 바빠서, 그런 거 읽을 시간도 없었겠지.'
다시 생각해봐도, 어째서 룩스메아가 성검을 휴마누스에게 내린 건지 모르겠다.
"으와아아아아!!"
왁, 씨. 깜짝이야.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악에 치받은 고함이다.
어디선가 뿌우-, 하고 뿔피리 소리도 들려왔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군대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마물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우글우글 밀려들어 오는 모습이, 마치 땅거미가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보였다.
하늘 위의 마물들도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다."
"잠시만요!"
리에나가 성벽에서 뛰어내리려는 휴마누스를 붙잡고, 그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휴마누스는 리에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서, 리에나는 유지스와 윈스톤에게도 버프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버프를 걸어줘야 할지, 신성력 낭비가 되는 게 아닐지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당당하게 세니어를 뽑아들고 나서야, 리에나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버프는 없었다.
'···방금 그 끄덕임은 무슨 뜻인데?'
그 뜻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니어를 움켜쥔 손아귀에 따스함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테라룸 왕국에서 세니어를 얻고 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얘, 버프 기능도 있었어?!'
항시는 아니고 위기 상황 때만 발동되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더 유용하다.
갑자기 몸에 호랑이 기운이 샘솟으면, 위험이 닥쳐왔으니 대비하라는 경고니까.
"그럼 저도 이만···."
"혼자 다니시지 말고, 반드시 믿을 만한 성기사와 동행하십시오."
"네. 그럼, 신 룩스메아의 가호가 함께하길···."
세르펜스의 경고에 리에나가 가볍게 목인사를 건넨 후,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자신을 호위해 줄 성기사를 찾으러 가는 거겠지.
리에나는 성검의 동료 중에서도 가장 똑 부러지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다.
- 퍼버벙!!
아군 부대와 마물들이 맞부딪히는 것보다 아니마의 마법이 더 빨랐다. 화려한 불꽃이 공중을 날아오는 마물들에게 직격했다.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일찍이 선빵필승의 진리를 깨닫고 실행으로 옮기는 모습이다.
아니마의 옆에 선 에드나는 초조한 얼굴로 스태프를 움켜쥐었다.
세르펜스가 그녀에게 내린 지령은 전황을 지켜보다가, 아군이 밀리는 곳에 적절히 마법을 날리라는 거였다.
그때를 대비하여, 에드나는 마력을 아끼며 대기했다.
아니마의 주변에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펑펑 터져나갔다.
효과가 있었는지 몇몇 마물들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땅에서 달려오던 마물들은 갑작스럽게 생긴 장애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우회했다.
한 무리가 아니라 한 마리 같은 움직임이다.
'저게 말이 돼?!'
인간 병사도 힘든 일을, 마물들이 한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난전이 되기 전에 최대한 마물의 수를 줄이자는 작전인지, 성벽에 선 마법 병단도 온갖 마법을 쏟아냈다.
하지만 마물들의 속도를 늦추지는 못했다.
중간중간 강력한 마물을 섞어 놨는지, 마법 몇 개가 별 소득 없이 그냥 스러져 버렸다.
결국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군 부대와 마물 무리가 격돌했다.
일부러 아군이 진격 속도를 늦춘 탓도 있었으나, 마물들의 신체 능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다.
"유지스, 발판을 부탁합니다."
가만히 하늘을 노려보던 세르펜스가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물 사이로 섞여 들어간 악마를 찾아낸 모양이다.
눈치 빠른 유지스가 녀석의 의중을 파악하고 화살을 연거푸 쏘아 날렸다.
그녀가 쏘아 보낸 총 다섯 발의 화살은 각기 다른 고도로 날아가 세르펜스의 뒤를 쫓았다.
말 그대로 화살 같은 속도로 달려나간 세르펜스는, 마물들과 격전을 벌이는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세르펜스의 모습을 놓친 것도 잠시. 이내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이 하늘 높이 솟구치듯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공중에서 다섯 번 도약했다.
마치 허공을 밟은 듯한 모양새였지만, 유지스가 쏜 화살을 밟고 뛰어오른 걸 테다.
완전히 어둑해진 하늘에 은색의 빛이 번쩍했다. 세르펜스의 신성력이다.
검에 신성력을 계속 두르고 있는 탓에, 먹구름처럼 몰려 있는 마물들 사이에서도 녀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세르펜스는 주변의 마물을 발판으로 이용하여, 하늘 위에서도 종횡무진 움직였다.
악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바에야, 혼자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렸나 보다. 마물 무리가 넓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르펜스가 이동할 수 있는 방향이 제한되었고, 전투에서 움직임이 읽힌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인간의 몸에 박쥐 날개를 달고 있는. 전형적이다 못해 개성 없는 악마 놈이 세르펜스의 공격을 피하고, 녀석을 향해 검은 구체를 던졌다.
- 콰아앙!!!
바로 근처에서 터진 굉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최전방이 아니다뿐이지 이곳 또한 전장이었다.
세르펜스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굉음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성벽 위에 있을 리 없는 바윗덩이가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잘 피했는지 깔린 사람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유지스는 세르펜스에게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주기 위해, 화살을 쏘느라 여념이 없다.
핑, 피잉. 활시위를 튕기는 소리가 연달아 귀청을 때렸다.
나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비행형 마물들이 저마다 다리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성벽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돌을 들고 있는 마물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두 마리의 조류 마물이 곰처럼 생긴 마물의 양어깨를 한쪽씩 붙들고 있다가, 성벽 위로 떨어뜨렸다.
"크아아아-!!"
쾅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곰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낙법을 한 것도 아닐진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
마물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유지스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