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10)
유지스와 마물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끼어들었다.
휘둘러지는 마물의 앞발을 윈스톤이 가로막았다.
- 카앙!
마물의 앞발을 감싼 검은 마력 탓인지, 금속끼리 맞부딪힌 듯한 소리가 울렸다.
'저번에 봤던 늑대 마물만 해도 장난 아니게 커다랬는데···.'
곰이 베이스인 마물답게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했다. 윈스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니 말 다했다.
저런 놈의 앞발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리라.
"흐읍!!"
윈스톤이 검을 든 양팔에 힘을 더해 마물을 밀어냈다.
마물의 앞발이 확 뒤로 밀쳐졌고, 그 반동으로 휘청거리며 반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마물의 가슴이 활짝 열리며 빈틈이 생겨났다.
윈스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물이 뒤늦게 앞발을 휘둘렀지만, 윈스톤은 이미 마물의 품 안으로 뛰어든 후였다.
윈스톤의 어깨가 마물의 명치를 들이받았다.
훌륭한 몸통박치기다.
"쿠우우···!"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마물의 상체가 앞으로 숙어졌다. 저대로 고꾸라진다면 윈스톤을 깔아뭉개버릴 거다.
윈스톤은 재빨리 마물의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뜨리고, 다시 한 번 어깨로 마물을 들이받았다.
쿵 소리와 함께 마물이 뒤로 넘어갔다. 윈스톤이 쓰러진 마물의 목을 베었다.
'음···.'
마물의 피가 검은색이라 다행이다. 윈스톤의 모습이 피가 아니라, 진득한 석유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전장 한복판에서 이런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이 몰려든다.
자동으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세니어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세르펜스가 직접 신성력을 써서 정신을 안정시킨 것만 못하지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신경 안정제를 투여받는 것과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는 정도의 차이다.
'스스로 이겨낼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는 이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세니어로부터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을 의지하며, 주위를 살폈다.
마물 한 마리를 병사 여럿이 에워싸고 상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쇠사슬로 엮은 그물을 던져 마물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창으로 눈알과 입구멍을 집요하게 노렸다.
그들 나름대로 마물을 상대하는 메뉴얼이 있는가 보다.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마물의 목을, 오러로 둘러싸인 기사의 검이 썽둥 잘랐다.
들고 왔던 돌이나 마물 등을 떨어뜨려 맨몸이 된 비행형 마물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무기 삼아 성벽으로 돌진했다.
마법 병단을 향해 딱정벌레처럼 생긴 마물이 파다다닥 소리를 내며 사납게 다가들었다.
마법사들을 지키는 기사가 벌레 마물을 막아선 사이, 마법사들의 마법이 마물에게 작렬했다.
단단한 각피가 깨졌다. 그 틈새로 푸른 오러가 깃든 검이 파고들었다.
다들 마물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는 듯했지만, 아군의 피해가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새 마물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병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발톱에 베이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성벽 위에서 대기 중인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제할 가능성이라도 있으니까.
'리에나도 있으니, 어지간한 상처로는 안 죽겠지.'
하지만 마물에게 잡혀서 공중으로 끌려갔다면 가망이 없다.
악랄하게도, 마물들은 성벽에서 잡아챈 사람을 성벽 바깥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내던졌다.
한창 싸우고 있는데 하늘에서 아군이 뚝 떨어져, 옆에서 싸우던 동료가 맞아서 절명했다고 생각해 봐라.
사기도 함께 뚝뚝 떨어질 거다.
그럼에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는 건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어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달빛이 아군을 비춰 주었다.
기사와 성기사들의 검에 깃든 오러와 신성력이 횃불처럼 주변을 밝혔다.
성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반짝이는 찬란한 금빛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휴마누스는 언제 빌린 건지 모를 말을 타고, 마물을 향해 성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온갖 비명과 기합들이 난무한 가운데. 언뜻 휴마누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푸로르는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기사들을 압박해나가던 거대한 마물이 느닷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푸로르가 기습을 가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에드나도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시기적절하게 날아간 마법이 벌써 몇 명의 목숨을 구했다.
에드나의 옆에 서 있는 아니마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전장에서 가장 많은 마물을 죽인 사람은 단연코 아니마, 그녀이리라.
아니마는 지친 모습으로 숨을 고르며 에드나에게 몸을 기댔다.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오직 나만이 견제용으로 뽑아 든 세니어를 움켜만 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세르펜스가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거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소리를 왜 하나 했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다.
'저 아래에서 싸우는 병사 중, 오러를 깨우친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마물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 우우웅···.
직접 마물을 상대하고 죽일 용기도 없으면서 착잡함을 느끼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세니어가 가늘게 진동했다.
미처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엄습했다.
내 대처는 늦었지만, 세니어의 반응은 빨랐다. 세니어에서 은빛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싸는 결계를 형성했다.
- 카가각!
몸을 틀어 뒤를 확인했다.
갑자기 생겨난 신성 결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향해 들이민 검에는 검푸른 오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차림새로 보면 아군 병사가 분명한데, 검에서 일렁이는 검푸른 오러는 악숭이의 것이었다.
놈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마물을 상대하던 윈스톤이 부랴부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윈스톤의 검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에게 휘둘러졌다.
검푸른 오러의 병사는 나를 죽이는 것만이 목표인 양,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진짜 뭐야?'
병사에게서 튄 피를 막아준 것으로 제 역할을 끝낸 신성 결계가 사라질 때까지. 얼떨떨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면 바로 눈앞에서 튀어 오른 붉은 피와 반으로 갈라진 시체 때문에, 혼란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윈스톤은 나를 구하느라 상대하고 있던 마물을 내팽개치고 왔다. 훤히 빈 윈스톤의 등 뒤를 마물이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물은 윈스톤의 뒷목을 물어뜯기라도 할 생각인지, 거대한 입을 쩍 벌렸다.
"윈스톤, 뒤, 뒤!!"
내 외침에 반응한 것은 윈스톤뿐만이 아니었다.
유지스가 활시위를 당긴 자세 그대로 상체를 틀었다. 세르펜스에게 발판을 만들어주려고 메겼던 화살이 마물을 향해 쏘아졌다.
윈스톤이 몸을 틀며 마물의 송곳니를 검으로 막아냈고, 유지스의 화살이 마물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세르펜스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발 디딜 곳을 잃은 세르펜스는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검에 깃든 은빛 신성력이 밤하늘에 긴 잔상을 남겼다.
세르펜스니까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어떻게든 무사히 착지할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악마다.
악마 놈이 무방비 상태로 추락하는 세르펜스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가, 헛것이 다 보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잔상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은빛 실선이 역행하는 모습을 언뜻 본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
느닷없이 악마가 휘청거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추락하는 것도 이상한데, 추락하는 모습은 더 이상했다. 한쪽 날개만 열심히 파닥거리며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졌다.
'설마···, 아까 그거 암기였어?!'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봤던 모양이다.
그동안 세르펜스는 땅에 무사히 착지한 후, 지면을 박차고 다시 뛰어올랐다.
악마는 불의의 기습에 당황했을 뿐 크게 다친 건 아니었는지, 땅에 도달하기 전에 균형을 잡고 다시 날아올랐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악마의 다리를 잡아채는 게 더 빨랐다.
세르펜스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그 원심력으로 악마를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커다란 먼지 구름이 솟아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땐, 세르펜스의 손에는 악마의 날개가 들려 있었다.
뜯어낸 건지 잘라낸 건지 모를 날개에서 새하얀 불길이 피어났다. 성화(聖火)다.
세르펜스는 성화로 타오르는 날개를 주변의 마물들에게 집어던졌다.
마물들은 빠르게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마물 한 마리가 새하얀 빛과 함께 타올랐다.
'성화, 저거···. 공격용으로는 효율이 겁나 구리다고 알고 있는데···.'
리에나는 어째서 성화로 마물이나 악마를 태워 죽이지 않느냐는 한 독자의 물음에, [성검의 주인] 작가가 구린 효율 탓에 정화 용도로만 쓰인다고 답변을 달았었다.
'신성력은 오지게 잡아먹는데, 끽해봐야 지지는 게 전부라 했던가?'
그리고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알게 된 건데, 세르펜스의 설명에 의하면 정화 용도로도 잘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거나 불은 불이니까 옮겨붙어야 진가를 발휘하는데, 성화는 부정한 것만 태우니까.
그저 보여 주기용 기술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다른가 보다.
세르펜스는 성화를 아주 요긴하게 잘도 써먹었다.
성화는 마물을 완전히 재로 만들고 나서야 빛을 꺼트렸다.
마물들이 도망치듯 물러난 탓에, 전쟁터 한복판에 휑하게 비어버린 공터가 생겨났다.
악마는 검은 구체들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세르펜스가 그것들을 막는 동안 어디론가 내달렸다.
공격들을 보아하니 원거리 계열의 악마인 듯한데, 날개도 없는 상태로 세르펜스와 맞부딪히고 싶진 않은가 보다.
이동 방향으로 봤을 때 전장으로 섞여 들어갈 생각인 듯하다.
마물들 사이로 숨어들건,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쓰건. 득 될 건 하나 없다. 악마가 전장에 다다르기 전에 세르펜스가 공터를 감싸는 결계를 만들어 냈다.
악마는 마기를 모아 결계를 깨부수려 시도했는데,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견제 공격이 사라지자마자, 세르펜스가 거리를 좁히며 악마를 베어버린 까닭이다. 악마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마물들은 대체 누가 조종하고 있는 거지?'
처음에는 악마의 능력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악마는 세르펜스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악마가 쓰러진 지금도 마물들은 여전히 잘 훈련된 군대처럼 움직였다.
깜박, 휘영청 빛나던 달빛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고 본능적인 불길함이 심장을 똑똑 두드렸다.
악마가 소환된 지,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악마를 해치운 참이다.
'그런데 벌써···?'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딜 봐도 적은 마물뿐이다.
'카술라 령을 점령했다던 공국의 병사들은···?'
눈앞에 들이닥친 마물들에 정신이 팔려, 그만 간과하고 말았다.
전쟁터는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인질을 제물로 써버렸으니, 그 주변에서 주둔하고 있던 제국의 병사들이 카술라 령으로 들이닥쳤을 거다.
그리고 공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는 제국 하나가 아니다. 그쪽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겠지.
애초에 교단에서 전쟁을 금지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악숭이가 전사자들을 제물로 써먹으려 들 게 뻔하니까, 그것을 막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