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12)
"괜찮아요. 연습 많이 했잖아요? 휴마누스 님이라면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리에나가 휴마누스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했다.
그녀의 나이는 휴마누스보다 한 살 아래인데, 이럴 때 보면 동생이 아니라 꼭 누나 같다.
[성검의 주인]에서 주인공 일행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건 유지스지만,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은 리에나였다.
그래서 휴마누스가 리에나에게 심리적으로 많은 위안을 받고 의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후우···."
휴마누스가 크게 심호흡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성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는 검대에 매어 둔 검집을 끌러냈다.
검집이 성검의 힘을 제어해 주는 용사의 무구니만큼, 검집째로 들고 결계를 펼칠 생각인가 보다.
"일단 혼자 해 볼게."
휴마누스가 성검을 양손으로 굳게 잡았다.
리에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응원의 눈으로 휴마누스를 지켜봤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리에나의 모습이 마치 기도라도 하는 듯 간절했다.
휴마누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세계에 떨어져 그를 본 이래, 가장 진중한 표정이다.
성검을 통해 휴마누스의 황금빛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볼타 산맥을 덮었던 신성 결계와 비슷한. 오색 빛깔로 일렁이는 기운이 피어나, 휴마누스의 신성력과 섞여들었다.
'아! 저게 세르펜스가 말했던 그 미증유의 힘이구나!'
안 그래도 휘황찬란한 색에 금빛까지 더해지니 신성한 게 아니라 화려하기 짝이 없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점차 덩치를 부풀렸다. 생각보다 휴마누스가 잘 하는 것 같아 안심이다.
나는 휴마누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특히 하늘 쪽을 유심히 살폈다.
비행형 마물 수가 적었던 게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휴마누스가 결계를 펼칠 때 방해하려고 따로 빼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늘은 잠잠했다.
몇 마리 안 남은 비행형 마물들조차,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혹시나 마물이 성벽을 타고 오르거나 돌을 던지는 게 아닐까 하여, 성벽 바깥도 내다보았다.
"선배, 위험하오."
윈스톤에게 뒷덜미를 잡혀 유지스 옆으로 질질 끌려가는 동안에도, 마물의 공격은 없었다.
'막 시작해서 그러나?'
세르펜스에게 직접 지시를 받은 에드나와 아니마 외에도, 유지스와 윈스톤도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어차피 마물이 공격해 온다고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어는 저들에게 맡기고 나는 휴마누스 응원이나 해야겠다.
휴마누스는 여전히 성검을 세워 들고 있었는데, 성검의 기운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지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성검에서 피어오른 빛은 어느새 성인 남성의 덩치보다도 커졌다.
뭔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한데, 바람 앞에 흔들리는 불꽃처럼 불규칙적으로 일렁거리는 모습이 불안하기만 하다.
보다 못한 리에나가 휴마누스의 손목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리에나의 손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신성력이 휴마누스의 손을 거쳐, 성검을 휘감듯 타고 올라갔다.
백색의 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기운을 포근하게 감쌌다.
휴마누스의 신성력이 성검의 기운에 완전히 섞여든 것과 다르게, 리에나의 신성력은 어딘가 따로 노는 듯했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던 기운이 누그러졌다.
기운이 안정되자 리에나의 신성력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듯, 백색의 신성력이 길게 뻗어 나와 볼타 산맥 쪽을 가리켰다.
금색 펄이 섞인 오색찬란한 빛이 백색의 빛을 뒤따랐다.
아니, 그러는 듯했다.
'저거 또 저러네?!'
휴마누스가 진정된 기운을 통제하여 움직이려고 하자, 또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리에나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나 했건만. 또다시 난항을 맞이했다.
"크윽···."
악다문 휴마누스의 잇새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휴마누스의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옷이 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간절하다 못해 절박한 표정이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제발···."
힘겹게 끄집어낸 절실한 바람에도 성검의 힘은 휴마누스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나, 매우 느린 속도였다. 아직 성벽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래서야 언제 볼타 산맥까지 닿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라, ······였다면."
기어들어 가는 듯한 소리였으나, 분명히 들었다.
자조감이 짙게 배어든 목소리를.
리에나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휴마누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휴마누스는 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키 차이로 인해 리에나에게는 들킬 수밖에 없었다.
리에나의 눈이 더욱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
'휴마누스라면 이겨낼 줄 알았는데···.'
비록 내가 속으로 휴마누스를 씹고 뜯고 했지만, 진심으로 그가 싫거나 못마땅했던 건 아니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의사는 추호도 없었을뿐더러, 누군가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면 내가 먼저 죽빵을 날렸을 거다.
약간의 심술과 까도 내가 깐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심하긴 했다···.'
괴로워하는 휴마누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후회가 막심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어색한 기색이 없잖아 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던 모습에.
[성검의 주인]을 통해 읽었던, 역경을 이겨내던 그 모습에.
그만 안심해 버렸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으면서.
휴마누스라면 알아서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하며 신경을 꺼버렸다.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와 절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까지는 아니지만.
'나에게 상담하러 왔었는데···.'
그런 그를 홧김에 쫓아내 버렸다.
얼마나 막막했으면 나를 찾아왔을까, 그런 고민조차 해보지 않고.
땀 때문에 손이 자꾸 미끄러지는지, 휴마누스가 성검을 더욱 거세게 움켜잡았다.
휴마누스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고개를 숙인 휴마누스의 턱선을 따라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맺혀서, 바닥에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며 메마른 성벽을 점점이 적시는 저 투명한 액체가, 휴마누스의 땀인지 눈물인지 알 도리가 없다.
확인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으나,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괴로운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성검의 힘을 통제하는 휴마누스에게도, 옆에서 돕는 리에나에게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일행들에게도.
그리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나 역시도.
모두에게 끔찍한 시간이었다.
힐끔힐끔 우리 쪽에 시선을 던지는 병사들의 눈빛에 불안과 불신이 깃들었다.
차라리 마물이 공격해 왔다면 그쪽으로 정신을 돌릴 수 있었을 텐데.
휴마누스가 성검의 기운을 통제하지 못하고 애먹는 것도 그 탓으로 돌릴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물들은 휴마누스를 무시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휴마누스는 더욱 힘겨워했다.
더 이상 바라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나 또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르펜스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으음."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세르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무언가 갈등하고 있었다.
"검집은 치우는 게 좋겠습니다."
가만히 휴마누스를 지켜보던 세르펜스가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휴마누스도 마찬가지였는지, 휴마누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땀과 눈물로 범벅되고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얼룩진 얼굴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건···."
"알고 있습니다. 성검의 힘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용사의 무구'잖습니까?"
"그런데 왜···?"
휴마누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의문보다, 그걸 알면서도 이 상황에 검집을 치우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느냐는 의문이 앞섰다.
휴마누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성검의 기운이 또다시 크게 요동쳤다.
"힘을 제어한다는 말은 곧, 억누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성검의 힘을 다스리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대로는 산맥 전체를 감싸는 결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말투만 온화했지, 이제껏 해왔던 노력이 헛짓거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금도 이렇게나 버거운데···."
휴마누스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이어질 말은 아마도, '과연 검집에 깃든 무구의 능력 없이도, 내가 성검의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겠지.
"···저도 돕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얼핏 결심의 흔적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안 된다고 외칠 뻔한 것을 겨우 틀어막았다.
세르펜스는 어지간한 일도 직접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런 녀석이 마핵을 품은 산맥에 결계를 치는 중요한 일에 쏙 빠지고, 그 보조를 리에나에게 맡긴 이유는 휴마누스가 끔찍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지만.
아무튼 녀석은 직접 돕지 않는 수준을 넘어, 곁을 지키지도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마물들과 싸우러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 "그, 그치마는···, 셩거메 접쪽하지 모타게 하라고···." ]
이제는 비비가 된 시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하다.
정작 그 말을 전한 비비는 지독한 팔랑귀라서 뇌리에서 지워버린 듯했지만.
어쨌거나 그 전언은 룩스메아가 나와 세르펜스에게 보낸 명백한 경고였다.
'괘, 괜찮···나? 리에나처럼 하면 직접 만지지 않아도 되니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성검의 주인이 아닌 이상, 누구도 성검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흉터가 남는 건 둘째치고, 반발력 탓에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런 경고를 남겼다는 건, 직접 성검을 잡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 외의 접촉도 피하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접촉'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불명확하다는 거다.
'일단 검을 맞부딪히는 것까진 괜찮아.'
비비를 만나기 전.
세르펜스는 성검을 든 휴마누스와 대련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서로의 신성력을 밀어내며 무력을 겨루는 것과 힘을 합쳐서 성검의 힘을 끌어내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 휴마누스는 자신감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다.
만약 세르펜스가 나서자마자, 일이 해결된다면···.
'휴마누스가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말려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그것도 모르겠다.
볼타 산맥을 내버려 둔다면 마물들이 계속해서 생겨날 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마핵의 영향을 받겠지.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다.
혹시 모를 가능성과 확실한 결과.
그 사이에서 내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휴마누스는 결의를 다졌다.
휴마누스가 성검의 힘을 제어하고 있던 검집을 벗겨냈다.
- 화아아악─!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빛이 세상을 밝혔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태양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거룩한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일견 신성한 모습이었지만, 실상 그렇지만도 않았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거대해진 만큼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그 힘을 억누르려던 리에나가 반동으로 인해 꺅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다친 것 같지는 않지만, 마냥 안도할 수는 없다.
날뛰는 성검의 기운을 안정시키는 건, 이제 그녀의 능력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