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37화 (337/925)

337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13)

리에나가 넘어진 자세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멍하니 휴마누스를 올려다보았다.

휴마누스는 어찌어찌 성검을 붙들고 있었으나 위태위태했다.

하지만 이대로 빛이 꺼진다면, 그때는 희망 또한 꺼질 것임을 알기에. 꾸역꾸역 버틸 뿐이었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성검은 왜 저렇게 비협조적인 거야? 기왕 힘을 보태주는 거, 세니어처럼 결계 형성까지 자동으로 진행해 주면 어디 덧나나?'

출력은 성검이 나을지 몰라도, 기능 자체는 세니어가 더 뛰어난 것 같다.

'대체 뭐가 문제지?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내렸다는 건, 휴마누스가 성검을 다스릴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 아닌가?'

룩스메아가 지독한 사디스트이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성장을 위한 시련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내려야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다.

내가 속으로 성검의 기능과 룩스메아를 원망하는 사이,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짧은 순간 둘의 시선이 교차했고, 거의 동시에 서로의 눈을 피했다.

방금까지 리에나가 그러했듯. 세르펜스의 손이 휴마누스의 손목 위에 얹혔다.

세르펜스의 손에서 흘러나온 은빛의 신성력이 휴마누스의 손을 타고, 성검에···.

'흡수됐어?!'

이런 적은 처음이었는지, 휴마누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란 건 세르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경을 쓰지 않은 상태라, 동그랗게 커진 눈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미친 기세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차 온순해지기 시작했다.

금색 펄이 가미된 오색찬란한 빛에 은색 펄까지 더해져,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화려함이 완성되었다.

이렇게나 야단스러운데도 유치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어느덧 성검의 기운이 완전히 안정되었다.

언제 미쳐 날뛰었느냐는 듯 얌전하기 그지없다.

그 변화가 너무나 뚜렷하여, 이렇게 얌전해질 수 있는데 아까는 왜 그랬느냐고 성검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성검에서 흘러나온 빛이 볼타 산맥을 향해 뻗어나갔다.

잘 된 일임에도, 휴마누스의 얼굴을 밝아지지 않았다.

휴마누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 저 빛이 누구의 주도하에 움직이고 있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속이 어지러운 건 세르펜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얼굴에 난감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성검에 접촉하면 안 된다니까, 한때 적이었던 세르펜스를 보고 성검이 발작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이게 웬걸?

주인을 본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듯,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따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거였으면 '남들 앞에서' 접촉하지 말라고 조건을 덧붙여주든 할 것이지.

'진짜 큰일 났는데···.'

입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차라리 처음부터 세르펜스가 도왔다면, 다들 원래 이런 건가 보다 생각하며 넘어갔을 텐데.

앞서 휴마누스가 허덕거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마물들이 체계를 잃고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물들을 조종하던 자가 손을 뗀 모양이다.

결계가 생성되는 것을 막을 수 없어서. 눈부신 빛에 기가 죽어서. 겁먹고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곳에서의 볼 일이 다 끝나서 관심을 거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복잡한 내 머릿속과 달리 빛은 순조롭게 나아갔다.

오색영롱한 빛이 얇고 투명한 베일처럼 넓게 펼쳐져, 전장을 가로질러 너울너울 날아갔다.

마침내 성검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산맥에 다다랐다.

빛의 장막이 산맥을 감싸고 결계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세상의 어둠을 몰아냈던 빛이 제 사명을 다 하고 후욱, 꺼졌다.

그와 동시에 휴마누스와 세르펜스가 의식을 잃고 맥없이 쓰러졌다.

"세르펜스!!"

"주군!"

"휴마누스 님!"

"······!!"

나와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이름을 비명처럼 소리쳤다. 윈스톤도 부르는 호칭만 달랐을 뿐,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에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마누스에게 달려갔다.

두 명의 마법사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휴마누스는 성검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내리눌렀다.

* * *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지쳐서 기절했을 뿐이라는 진단을 받고, 내 막사로 옮겨졌다.

모두 지친 가운데 유일하게 팔팔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세니어를 들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노라, 내가 주장하기도 했고.'

그 전에 악숭이가 쳐들어올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이미 이뤘으니까.

나는 속으로 악숭이의 비겁함을 욕하며, 불편한 군용 침대를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어 치웠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품을 뒤져 아공간 주머니를 찾아냈다.

군용 침대를 놓았던 자리에 세르펜스의 침대를 꺼내 놓자, 유지스가 곱게 안아 들고 있던 세르펜스를 침대에 눕혔다.

휴마누스는 윈스톤이 업고 왔는데, 내 침대에 눕혀졌다.

"그럼 저희도 이만 쉬러 가볼게요."

유지스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윈스톤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앞으로는 의자도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하며 세르펜스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혹시 모르니까 미리 준비해 둘까?'

나는 대야에 물을 가득 담고 발열석을 하나 빠뜨렸다.

물이 뜨뜻미지근하게 데워졌을 즈음,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악몽을 꾸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런 주제에 몸을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공연히 이불만 움켜쥐었다.

수건을 적시고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꽉 짰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세르펜스의 이마를 닦아주며, 다른 손으로는 녀석의 가슴께를 토닥였다.

'휴마누스는 괜찮나?'

문득, 아까 땀을 비 오듯 흘렸던 휴마누스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끙끙 앓는 세르펜스와 다르게 휴마누스는 죽은 듯이 고요하게 누워있었다.

우선 세르펜스부터 진정시키고, 저쪽은 그다음에 신경 써 줘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세르펜스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쯤 하면 안정될 만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얕은 신음까지 흘리며 덜덜 떨었다.

'대체 무슨 악몽을 꾸고 있길래···?'

덜컥 겁이 나서 수건을 내팽개치고 세르펜스를 흔들어 깨웠다.

기력이 다해 쓰러진 사람을 무턱대고 깨우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펜스, 세르펜스? 일어나 봐요."

"으, 으읏···."

"야, 인마! 일어나 보라니까?"

"흐으···."

"지금 안 일어나면 오늘 간식 없···, 컥···!"

세르펜스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새하얀 손이 불쑥 나를 향해 뻗어졌다.

단숨에 내 목을 틀어쥔 세르펜스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무감각하게 눈을 깜박였다.

"세, 세르···, 윽···."

"···리벨론 경?"

녀석이 나를 부르는 호칭을 듣자마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룩스메아가 '그런' 경고를 남긴 이유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목을 조르는 세르펜스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도···, 르···!"

"······!"

세르펜스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손아귀 힘이 서서히 풀렸다.

어딘가 탁해 보이던 녀석의 눈동자가 감정을 되찾고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녀석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콜록, 콜록···!"

"···선우?"

"아, 진짜 죽는 줄 알았, 흡···!"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새어 나온 말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다.

혼란스러운 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깜짝 놀란 세르펜스가 내 목을 틀어쥐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방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지, 진정해요, 세르펜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에게···."

"일단 진정하고 저쪽을 봐요! 휴마누스 앞에서 울 생각입니까?!"

내가 급하게 휴마누스를 가리키며 외쳤으나, 세르펜스는 이미 정상적인 사리 판단이 불가능했다.

이불 속으로 숨어들듯 몸을 웅크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내게, 다가오지 마라···."

"아이고, 우리 공작님! 누가 울렸어요, 누가! 내가 아주 그냥 혼쭐을 내줘야겠네!"

오지 말란다고 안 갈 내가 아니다.

나는 괜찮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 떨며 다가갔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요? 방금 세르펜스가 아니라···. 아니, 세르펜스는 세르펜스인데, 다른 버전의 세르펜스가 잠깐 왔다 간 것 같은데···."

애써 태연하게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지 히끅거리는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이불 위로 손을 얹자 녀석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계속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며, 이불 속에 숨어든 세르펜스를 토닥였다.

이런 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녀석이 슬그머니 이불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세르펜스가 겁먹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거든요? 괜찮아졌으면 일어나서 얘기 좀 해봐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세르펜스에게서 이불을 뺏으며 말했다.

"자, 잠깐 오 분만 더···."

"오 분만 더는 얼어 죽을!"

오 분이 십 분이 되고, 십 분이 한 시간이 되는 건 금방이다. 나는 이불을 힘껏 잡아당겼다.

이불을 빼앗긴 세르펜스가 무릎을 감싸 안으며,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나는 찬찬히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눈물로 젖어 든 불긋한 눈가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는 녹색의 눈동자 등.

소심함의 결정체 같은 저 모습은 내가 애지중지 길러온 세르펜스가 틀림없다.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그런 자세로 그런 대사를 하면 안 부끄러운가?"

"······."

세르펜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는 뺏었던 이불을 세르펜스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포근한 이불 덕분인지, 파리했던 녀석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괜찮···흐윽···."

혈색이 돌아온 건 줄 알았는데, 다시 울음이 차올라서 얼굴이 붉어진 거였나 보다.

세르펜스가 자신도 모르게 내 목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흠칫 놀라 거두어들였다.

물론 아까처럼 내 목을 조르기 위함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느낌이 손바닥에 생생하게 남았는지, 내 목을 졸랐던 손을 반대 손으로 단단히 움켜잡았다.

나도 반사적으로 목을 매만졌다.

살짝 아릿한 게 멍이라도 생겼나 보다.

"미, 미안하다···. 내, 내가 어떻게···."

"아니, 뭐. 괜찮아요. 세르펜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척 봐도 착란 증세 같았는데···."

"우으으···."

"미안하면 세르펜스가 치료해주던가요."

내가 목을 쭉 내밀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 손끝이 덜덜 떨렸다.

'에휴.'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손을 잡고 내 목에 가져다 댔다.

당연히 은색의 신성력이 빛을 발하겠거니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잠잠하다.

"아, 아으, 흐으윽···!"

세르펜스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신성력을 다 써서 쥐어짜 낼 것도 없나 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세르펜스 대신 세니어다.

나는 세르펜스의 손을 놓고, 세니어에게 치료 기능이 탑재되어 있길 바라며 손잡이를 목에 가져다 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치료 기능은 없···는 게 맞나?!'

단념하며 세니어를 떼어 놓는데 돌연 의문이 들었다.

세르펜스가 내 목을 졸랐을 때, 세니어는 여전히 내 허리에 걸려 있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득 충전해놨던 신성력이 벌써 바닥을 드러냈을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혹시 신성석 제작자인 세르펜스는 경계 대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건가?'

신성석에 충전된 신성력이 세르펜스의 것임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따라서 치료 기능이 없는 건지, 고작 멍 정도는 자연 치유하라고 내버려 두는 건지, 가해자가 세르펜스인 탓에 인식 자체를 못 하는 건지.

세니어의 생각을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매일같이 공들여서 손질해 줬는데···!'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져서, 세니어를 침대 위로 휙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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