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회
58. 공작님의 어린 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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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은 지루한 것 투성이다.
공부는 외울 게 너무 많고 따분했다. 그래도 이건 내가 제국의 일황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제국을 이어받을 훌륭한 황자니까, 공부하는 것에 불만은 없다.
문제는 어른들이다. 그들은 너무 모순적이다.
온종일 어려운 수업 내용을 늘어놓으며 이해하길 바랄 땐 언제고, 별거 아닌 시시껄렁한 얘기는 아직 몰라도 된다고 한다.
윗사람으로 깍듯하게 대할 땐 언제고, 어린아이라며 무시하기 일쑤다.
궁 안에서 그나마 또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동생인 프레드릭 뿐이다.
프레드릭의 애칭은 레릭인데, 여섯 살이나 됐으면서 허구한 날 울고 생떼만 부려댄다. 정말 유치해서 못 놀아주겠다.
하지만 그런 지루한 시절도 이제는 끝이다.
왜냐하면 일주일 전이기도 한, 내 여덟 번째 생일에 아바마마께서 한 가지 약속해 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꼭 맞는 동갑내기 친구를 소개해 주기로.
'나도 이제 친구가 생긴다!'
심지어는 친구가 될 아이가 그 유명한 프라시더스 공자라 한다.
그래서 더 신이 나고, 호기심이 동했다.
프라시더스 공자는 성검의 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쌓느라 두문불출한 탓에,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직접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프라시더스 공자에게는 오늘이 첫 공식 외출이 되는 셈이다.
어쩐지 동질감이 생겨났다.
벌써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아바마마께서 계시는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집무실 문을 열고 외치자, 아바마마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바마마의 품에 안겼다.
내가 아바마마를 아버지라 부르는 건 어마마마에겐 비밀이다. 원래는 꼬박꼬박 아바마마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아버지란 호칭이 더 친근하다며 마음에 들어 하셨고, 나는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사실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나는 어마마마와 둘만 있을 땐 어마마마를 엄마라 부른다.
아마 레릭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다.
이건 아바마마에게 절대로 비밀이다.
"오오, 내 사랑스러운 아들아. 예까지는 어쩐 일인 게냐?"
"오늘 프라시더스 공자를 소개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은 데다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알현실일 텐데?"
"아버지랑 같이 가려고 왔죠."
"허허허, 친구를 빨리 만나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게 아니고?"
"겸사겸사?"
내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바마마께서 껄껄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리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어 무릎에 앉힌 채 업무를 이어나가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휴스, 이제 그만 일어나려무나."
아바마마께서 나를 흔들어 깨우셨다.
어젯밤 기대감에 잠을 설쳤더니, 나도 모르는 새에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바마마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프라시더스 공작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 작은 아이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공작은 아바마마를 향해 제국의 빛이 어쩌고 하는 장황한 인사를 올렸다.
내 관심사는 공작이 아니었기에 대충 한 귀로 흘렸다.
"이 아이가 제 아들인 세르펜스 프라시더스입니다."
공작이 등 뒤에 숨듯이 서 있던 아이를 떠밀어 자신의 앞에 세웠다.
낯가림이 심한 건지, 아이는 척 보기에도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땅에 두었다.
'되게 약해 보이네.'
성검의 주인이 될 자라고 들어서, 키도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눈빛도 부리부리할 줄 알았다.
그런 내 상상과 실제로 본 프라시더스 공자의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고 축 처진 눈꼬리가 처연하기까지 하다.
악마 숭배자들에게서 대륙을 지키는 용사가 아니라, 용사에게 구해져야 할 것처럼 생겼다.
"자, 세피. 일황자 전하께 인사드리렴."
공작이 아이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번쩍 들어 공작을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하하하.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위용 넘치는 모습에 압도되어 긴장했나 봅니다."
공작이 자상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격려하듯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아이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긴장감으로 경직되어 있던 아이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프라시더스 가문의 세르펜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말갛게 웃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내가 상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성검의 주인에 걸맞은 신성한 모습이다.
나는 수줍음이 많으면서 순수한 이 친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짐은 공작과 나눌 얘기가 있으니, 휴스 너는 프라시더스 공자와 나가 있거라."
"네!"
역시 아바마마는 내 마음을 잘 아신다.
내가 새로 사귄 친구와 자유롭게 놀고 싶어 하는 걸 바로 알아채시고, 밖으로 나갈 것을 허락해 주셨다.
"가자! 내가 황궁 구경시켜 줄게!"
나는 친구의 손을 붙잡고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참 복도를 걷다가 뒤늦게 내가 아직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참! 나는 휴마누스야! 그냥 휴스라고 불러도 돼. 말도 좀 놓고."
"예?"
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아이가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눈에 순진함이 가득하다.
저택에서만 지냈다더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내가 많이 알려줘야겠다.
"뭘 그렇게 놀라?"
"황자 전하의 말동무가 되어주라는 말은 들었으나, 결코 예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들었습니다."
"에이, 내가 괜찮다는데 뭐 어때? 공작이 뭐라고 하거든, 내가 시켰다고 해."
한동안 망설이던 아이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휴스."
반말을 난생처음 해 본 사람처럼 어눌했으나, 그 모습이 순진함을 더욱 배가시켰다.
어째 친구가 아니라 귀여운 동생을 사귄 듯한 느낌이다. 레릭도 이 아이의 반만 닮았으면 내가 엄청나게 귀여워해 줬을 텐데.
"네 애칭은 세피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대뜸 허락도 없이 애칭으로 부르기 무엇해서 가볍게 던진 물음이었다.
그냥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말 줄 알았다.
"그런 것 같아!"
어딘가 이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너무 해맑게 웃은 탓에 그런 사소한 문제는 뇌리에서 곧장 지워져 버렸다.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세피는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내 여덟 평생 이보다 밝은 미소는 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반쯤 맞았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서 보았던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였고, 나는 그 표정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 * *
◈
휴스는 정말 대단했다.
제국의 황자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밝게 웃을 줄 알았다. 힘들다는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 같은 걸 친근하게 대해주고, 배려심도 깊었다.
말도 재밌게 해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정말로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그것은 비단 새로 사귄 친구 덕택만은 아니다.
휴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그와 친구가 된 것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피'라 불러준 것이 훨씬 더 격렬하게 내 가슴을 두드렸다.
어쩌면 휴스의 말이 재밌었던 게 아니라, 그만큼 내가 들떠서 실없이 웃어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깨를 토닥여 주셨던 그 다정한 손길과 눈빛. 그리고 날 애칭으로 부르시던 아버지의 따스한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목에 걸린 무언가가 왈칵 쏟아질 듯 벅차올랐다.
그래서일까?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휴스와 놀면서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두서없이 떠드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셨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의 기분이 나빠질까 봐. 그렇게 되면 나를 두 번 다시 세피라 불러주지 않을까 봐.
나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럴 필요 따윈 없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저택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손을 높이 치켜드셨다.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짜악!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세상이 암전되었다.
다시 세상의 빛이 돌아왔을 땐, 나는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뺨이 얼얼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귓속이 멍멍하다.
올려다본 아버지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차갑고 무서웠다. 두려웠다.
'나는 꿈을 꿨던 걸까?'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께 맞고 기절해서, 황궁에서 친구를 사귀는 덧없는 꿈을 꾸었던 거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그저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분명 말했을 텐데? 전하께 무례를 저지르지 말고, 예의와 격식을 갖추라고 말이다."
"죄송, 흐읍···. 합니다."
"일황자 전하뿐만이 아니라···."
귓속이 왕왕 울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첫째는 일황자 전하를 '휴스'라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내가 세피라는 애칭을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
아버지가 나를 세피라 부른 것에 애정 따위는 담기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호칭은 지독히도 가식적이었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
오늘은 세피가 황궁에 놀러 오기로 한 날이다.
몇 주 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투명한 미소가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응접실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시종 리크가 세피의 도착을 알렸다.
곧 문이 열리고 세피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했다.
"세피, 어서 와!"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황자 전하."
세피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반가움의 포옹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올렸던 팔을 도로 내렸다.
존댓말에 당황했지만, 금방 침착을 되찾았다. 시종들 때문인가 싶어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자, 자.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멀뚱히 서 있는 세피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당황스러움이 더해졌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해하는 건가?
세피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니만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있으면 시녀들이 차랑 간식을 가져올 거야. 세피, 네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최대한 다양하게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표정이 왜 그래?"
분위기를 풀고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자니, 세피가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할 말이 있다면, 그냥 말하면 될 텐데. 하여간 소심한 아이다.
"저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호의는 감사하나,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 그래? 주방장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냥 물려야겠네."
"꼭 저와 같이 드실 필요는···."
"에이, 혼자 먹어봤자 그게 뭐가 맛있겠어?"
그나저나 단것을 싫어한다니, 참 특이한 아이다.
생긴 건 요정 같아서 달콤한 것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이는데.
"전하께서는 평소에 간식을 자주 드십니까?"
"그럴 리가. 네 핑계 대고 원 없이 먹어보려 했었는데, 어쩔 수 없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세피가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당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저기, 세피?"
"네, 전하."
"세피??"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혹시나 해서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세피는 나에게 존댓말을 썼고, 나를 휴스라 불러주지 않았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저번에 만났을 때,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닙니다."
"그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곤혹스럽다는 듯, 세피의 눈썹이 휘어졌다.
레릭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에 항상 저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레릭과는 다르게 세피는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다.
"혹시 누가 뭐라고 했어? 나에게 반말하면 안 된다고?"
"아닙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는 것뿐입니다."
"내가 괜찮다니까 그러네!!"
내가 버럭 소리치자 세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죄스런 기분이 들었다.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다 잘못한 것 같다.
이렇게 겁 많고 순한 친구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나는 몹시 나쁜 황자다.
"존댓말을 쓰면···, 저희는 친구가 아니게 되는 겁니까?"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우리는 여전히 친구지!!"
내 말에 안도했는지, 시무룩했던 세피의 얼굴에 작은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안도하며 숨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