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회
59. 공작님과 우정의 자취 (4)
고뇌에 빠진 휴마누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휴마누스도 일지 남기고 있어요?"
"으, 으응?! 이, 일지? 이, 일지 말이지···. 그, 그러엄! 열심히 쓰고말고!"
어딜 어떻게 봐도 거짓말이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게임하고 놀다가, 숙제 다 했느냐는 부모님의 질문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다.
"숙제 중간 검사 하는 거 아니니까,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그럼 왜 묻는 건데?"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에서요."
역대 성검의 주인들이 일지를 남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혹시 [성검의 주인]이 휴마누스가 남긴 일지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성검의 주인] 작가를 대차게 까도 되는지, 말을 아껴야 하는지.
그 결과가 휴마누스의 대답에 달려있다.
"초반에는 열심히 썼었는데···."
"정말로요?"
"그, 그러려고 생각은 했지."
분명 숙제 검사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휴마누스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신의 사자라서 신경 쓰이나 보다.
"그런데 일지를 반드시 그날그날 쓸 필요는 없잖아? 적당히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몰아서 쓰면 안 돼?"
"아니, 그럼 그날 날씨를 적을 수 없잖아요!"
"···일지에 날씨도 적어야 해?"
"아, 아뇨. 잠깐 다른 것과 헷갈렸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휴마누스가 개학 전날 일기를 몰아 쓰는 초등학생처럼 말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다.
"그럼 그건 됐고. 혹시 휴마누스는 일지 쓸 때 3인칭으로 써요?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으로?"
"그럴 리가."
"아니면 일기 숙제···. 아니, 일지 기록을 누군가에게 떠넘겼다던가?"
"시온은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일지를 제대로 남기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3인칭 시점도 아니다.
여러모로 [성검의 주인]이 휴마누스가 남긴 일지일 가능성은 없는 듯하다.
"제가 읽은 일지들 또한 전부 1인칭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의도로 질문했는지 눈치챈 세르펜스가 첨언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휴마누스가 남긴 기록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리라.
"그리고 일지를 몰아 쓴 사람이라면 꽤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에 따라 일지를 적을 여유가 없을 때도 있다 보니···."
"아, 그래?!"
대륙을 구했던 역대 성검의 주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들의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에 휴마누스가 화색을 표했다.
"심한 경우, 사명을 끝마칠 때까지 한 페이지조차 채우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자는 성검을 받은 날부터 그것이 반환된 날까지. 그에 해당하는 일수만큼 교단에 감금되어 일지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세르펜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휴마누스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자기와 같은 꼴을 당하기 싫다면, 규칙적으로 기록을 남기라는 충고도 적혀 있었습니다."
"······."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정작 후대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에게 읽히지 않아서 문제였을 뿐.
"일지는··· 그렇다 치고. 시온은 신의 사자라고 했었지?"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휴마누스가 제정신을 차리며, 불쑥 내게 말을 붙였다.
"네, 그랬죠."
"그럼 성검이 날 선택한 이유도 알고 있겠네?"
가볍게 대답했는데, 묵직한 물음이 던져졌다.
갑자기 생겨난 의문이라기보다는 잠시 미뤄 두었던 질문을 이제서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성벽 위에서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성검을 손에 들고. 누구보다도 초라하게 고개를 푹 숙였던 휴마누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예상 못 한 질문은 아니다.
세상이 망했다든가, 꿈속에서 세르펜스가 타락했다든가, 어린 시절의 세르펜스가 처한 환경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혹은 일지라든가.
이래저래 충격적인 화제가 이어져서,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다.
'성검이 휴마누스를 선택한 이유라···.'
나야말로 그것이 알고 싶다.
성검이 주인을 선택하는 기준 같은 건 [성검의 주인]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신의 사자를 자칭하고 있긴 하나, 그건 어쩌다 보니. 일을 쉽게 풀어나가고자, 룩스메아의 이름을 치트키처럼 써먹은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는 룩스메아의 탄생 설화도 최근에서야 주워들은 사람이다.
그런 판국에 룩스메아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휴마누스를 성검의 주인으로 택했는지, 내가 잘도 알겠다.
'그러고 보면 룩스메아는 대체 뭐 하는 신이지?'
시간 나는 대로 세르펜스에게 속성 과외라도 받아야겠다.
나름 신의 사자를 자칭하고 있는데, 룩스메아에 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교단 측에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밝혔을 당시.
유지스가 세계수의 맹세를 하겠다며 나섰다. 세르펜스가 열과 성을 다해 내게 금칠을 해댔다.
그 둘의 이미지로 기초를 다진 후, 세 명의 세례명을 팔아먹는 것으로 내가 신의 사자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알타르 이단 심문관이 룩스메아에 관한 즉석 퀴즈 따위를 냈다면,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신의 사자를 사칭한 죄목으로 이단 심문관에게 끌려갔겠지.'
이 자리를 빌려 세례명을 제공해 준 세 명. 휴마누스, 리에나, 오풀렌스 영애에게 심심한 감사 말씀을 전하는 바다.
"휴마누스는 어째서 자신이 선택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알지도 못하는 룩스메아의 의도를 멋대로 지어내는 대신, 휴마누스에게 받은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모르겠으니까 물어본 거잖아."
"제가 그런 부류라, 직접 말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런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딴 변명이 정말로 먹힐 줄이야.
그런 부류라는 게 만능키인 건지, 휴마누스가 허술한 건지. 기왕이면 전자라고 믿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모르겠어. 신성력의 총량으로 보나, 검술 실력으로 보나.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잖아? 예를 들면···."
휴마누스의 시선이 세르펜스를 향했다.
나는 재빨리 세르펜스를 이불로 꽁꽁 감싸서 숨겼다.
"오늘 그런 부작용을 겪어놓고,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쥐여주겠다는 겁니까?! 아! 물론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해서가 아니라, 성검의 힘을 직접 가져다 써서 그런 현상이 발현된 거지만. 아무튼요!"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이 두 번째라며? 그냥 처음부터 세르펜스에게 줬으면 되는 거 아니야?"
휴마누스는 내 다급한 변명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하던 질문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눈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없던 눈치가 뿅 하고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안 됩니다. 선택의 날이 오기 전부터 그렇게 혹사당했는데.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면, 세르펜스는 홀로 분투하다가 결국 희생되었을 겁니다. 전 그 꼴 절대 못 봐요."
"에이, 설마 사람들이 세르펜스에게만 모든 걸 떠넘기겠어?"
"휴마누스는 성검의 주인이 되고 난 후, 세르펜스에게 동료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었죠? 만약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면, 휴마누스는 동료가 되어 함께 여행길에 올랐을 겁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야 싶지만···."
휴마누스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 휴마누스가 대륙을 싸돌아다닐 수 있는 건, 그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한 시기에 나라의 후계자가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말도 안 된다.
그가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제국에서도 가장 안전한 황궁에서 보호받았을 거다.
"잠깐만. 세르펜스도 내 동료 제의를 거절했잖아?"
"그건 휴마누스의 발전을 위해서였잖습니까? 그리고 뭐, 세르펜스가 그동안 놀았어요? 대신 프뤼네 왕국까지 다녀와 줬잖아요. 휴마누스라면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없었···겠지."
그제야 현실을 직시한 휴마누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세르펜스를 제외하더라도, 개중에는 어린 나이에 교단에 들어간 성기사도 있었잖아. 성기사라면 결계와 치료 계통의 훈련도 받았을 테고···. 그럼 나처럼 애먹지 않고, 능숙하게 결계를 생성해 냈겠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고 했던가?
세르펜스가 대륙의 편에 선 것까지는 좋으나, 반대급부로 휴마누스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게다가 내용도 좀···.'
나도 최근 그와 같은 의문을 품은 적 있는 터라, 어쩐지 찔끔했다. 뒤에서 호박씨를 까다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죄책감이 마구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수는 없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맞아. 나도 그런 이유로 널 깠었어. 미안해.'라고 말하는 건 긁어 부스럼밖에 안 된다.
사과하는 자신의 마음만 편해질 뿐, 듣는 사람에게 실례다.
'티 내지 말고, 잘해주자.'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휴마누스가 뭐 어때서 그래요? 휴마누스는 이미 한 번, 성검의 주인으로서 그 임무를 훌륭히 끝마쳤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 세상이 한 번 망해서, 신께서 시간을 되돌리신 거라며?"
세상이 망했다는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보다.
휴마누스라면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라, 그런 얘기는 귀에 쏙쏙 잘 박혔나 보다.
"그땐 상대가 상대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아?"
"그게 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점이?"
결국 상대해야 할 최종 보스가 달라졌다.
"지금은 세르펜스가 같은 편이잖아요."
"더한 짓이 어쩌고 할 때 그럴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악마 숭배자들의 편에 붙었던 거구나."
그쪽 편에 붙기만 한 게 아니라, 최종 보스까지 등극했다.
"그때 세상이 망해간 건, 대륙 각지에서 문제가 동시다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간질에 넘어간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분열한 것도 한몫했죠."
"그런 거야···?"
"네, 그런 겁니다!"
내 확언에 휴마누스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부족해서 세상이 망한 게 아니라는 건 안도할 일이지만, 다가올 미래가 걱정되는 걸 테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이간질에 앞장섰던 사람이 지금은 우리 편이잖아요?"
"그거, 세르펜스가 한 짓이었어?"
"좋은 머리를 나쁜 곳에 사용했을 때 흔히 벌어지는 일이죠."
"······."
휴마누스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군의 모략가를 성공적으로 빼돌린 것에 기뻐하기에는, 오랜 친구의 몰랐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보다.
화제를 살짝 돌리는 게 좋겠다.
"아 참! 그리고 검술 실력과 신성력이 어쩌고 했었죠? 휴마누스에게는 잠재력이 있어요! 지금부터 노력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 그래?"
"그렇고 말고요!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걸고 장담합니다."
"왜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거는 건데?"
"전 세례명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남의 세례명을···."
휴마누스의 시선이 내 옆의 이불 뭉치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세르펜스를 이불로 감싸 놓은 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치워냈다. 그 속에는 세르펜스가 몸을 동그랗게 만 자세로 색색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