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회
60. 공작님과 계획 지침 (2)
"어쨌거나 지금은 제국군과 교단의 성직자들이 카술라 령에 주둔하며, 내부를 살피는 중이래."
카술라 령을 되찾았다고 말하면서도 휴마누스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쓸모가 없어져 적들이 버리고 간 것을 습득했을 뿐,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악마 소환을 위한 제물이 되어버렸으니.
카술라 령은 이제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전투 중 소환된 악마는 공국 쪽이겠네?"
조용히 설명을 듣고 있던 푸로르가 툭 질문을 던졌다.
휴마누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황을 설명했다.
"공국 정벌에 가장 앞장선 건 아레나 왕국이었는데···."
아레나 왕국은 영토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다.
그러한 탓에 비옥한 땅에 욕심이 많았는데, 마침 합당한 명분도 있으니 공국의 땅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돌입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전멸했다나 봐."
휴마누스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비록 다른 나라의 일이나, 같은 적을 두고 함께 싸우는 처지다.
그게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무겁다.
휴마누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전장에 나선 아레나 왕국군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전황을 알린 후 목숨을 잃었다.
그자가 말하길, 전투가 막 시작했을 당시에는 아레나 왕국 측이 우세했다고 한다.
공국의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후퇴했고, 물러나는 와중에도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레나 왕국군이 지나가는 길에는 공국군이 흘린 피와 시체가 깔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공국의 병사들이 진짜로 죽어 나갔기에, 유인책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냈다.
자신들이 죽인 적군의 시체 자체가 함정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발밑에서 적군의 시체가 폭발했다. 아레나 왕국군은 무방비 상태로 폭발에 노출되었다.
죽음이 불러온 죽음으로, 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을 테고.
결국에는 악마까지 소환됐으니. 끝이 좋을 수가 없다.
"악마 숭배자들은 공국을 본거지로 삼을 생각인 걸까요?"
"그러기에는 제국과 너무 가깝지 않아?"
리에나의 의문에 푸로르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어차피 답답한 마음에 던진 의문일 뿐이다. 리에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건 그렇죠.'하고 수긍했다.
"공국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지만, 가만히 놔둘 수도 없어. 공왕이 공국 쪽으로 이동한 데다가···. 어쩌면 카술라 령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국민을 제물로 바쳐 또다시 악마를 소환할지도 모르니까."
휴마누스가 넋두리처럼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아레나 왕국군을 유인하였고, 그전에는 공국민들의 목숨을 미끼로 휴마누스를 불러들였다.
휴마누스의 말대로, 공왕은 얼마든지 공국민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쳐들어간다면, 아레나 왕국의 절차를 그대로 답습할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교단의 도움을 받아, 길을 정화해가며 조금씩 나아가는 거다.
이는 오랜 시간과 많은 자원.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다.
"공왕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네."
푸로르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신의 사람을 끔찍이도 아끼는 만큼, 자국민을 내모는 공왕의 행태에 푸로르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공국의 병사들도 이해가 안 돼! 대체 왜 그런 사람을 목숨 바쳐 따르고 있느냐고!"
"진심으로 따르는 건, 공왕과 함께 카술라 령을 점령한 병사들뿐입니다."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트리는 푸로르의 말에, 세르펜스가 부연 설명을 하고자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쏠렸다.
"왕의 통치를 받는 것과 악마 숭배 세력으로 들어가는 건 별개입니다. 공왕이 공국의 전권을 거머쥐었다 한들, 사람들의 신앙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습니다. 공국의 귀족 중 일부는 악마 숭배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나, 전부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나리의 얘기는, 아레나 왕국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들은 공왕의 반대파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푸로르의 반문에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억지로 끌려 나온 거라면, 그냥 항복하면 되지 않나요?"
둘의 얘기를 듣던 리에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녀의 말에 세르펜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공국에서는 악마 숭배자들이 전면에 나와, 대놓고 활동하고 있을 겁니다."
"아···!"
리에나가 탄식을 흘렸다. 병사들이 항복하는 걸, 악마 숭배자들이 두고 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항복하면 실험체로 쓰겠다며 사전에 협박해 뒀거나, 아예 흑마법으로 정신을 조작했거나. 방법은 많았다.
반대파 귀족들이 자신의 병사를 내준 것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친 까닭이리라.
"그러나 공왕과 함께 움직이는 병사들은 다릅니다. 그 증거로 공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병사들의 목숨을 하찮게 내버렸으나, 카술라 령을 점령했던 병사들은 전부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실 공왕의 병사들은 아직 작위가 없어 병사라 불릴 뿐. 그들 중 상당수는 오러도 다룰 수 있으며, 실력 또한 어지간한 기사 이상이다.
그들이야말로 공왕이 가진 최고의 전력이다.
[성검의 주인]에서 공왕의 직속 기사단으로 임명되었을 정도였으니. 공왕이 그들을 아낀다는 사실은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그리고 공왕이 그들을 아끼는 만큼, 그들 또한 공왕을 따랐다.
"공왕은 오갈 데 없는 고아 혹은 빈민들을 거두어, 살 곳과 먹을 것을 베풀고 교육을 제공하며, 출세를 약속했습니다. 그자들이 공왕에게 충성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런 정보는 어디서 구한 거야?"
"일루미나티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디서 구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어디서 잘 구했다.'라고 말한 격이었다.
만능 치트키인 신의 사자를 팔아먹으면 해결될 일이나, 세르펜스는 그러지 않았다.
나를 눈짓한다고 해서, 휴마누스가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히 성검 일행 중 누군가가 알아채서 의심 살 가능성만 다분하다.
"어···, 그, 그래···."
그런 까닭에.
눈치가 없어 슬픈 휴마누스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공왕을 쫓아야지."
"하지만 공왕은 공국으로 향했잖습니까?"
"그래, 그게 문제지···."
휴마누스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공국을 정벌하는 일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차근히 진행될 예정이다.
적진인 공국에 무모하게 돌입할 생각이 아니라면, 휴마누스는 군대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또다시 휴마누스의 발이 공국에 묶이는 셈이다.
"하지만 공국에는 악마도 있잖아. 내가 아니면···. 아! 혹시 세르펜스, 네가 공국을 맡을 생각이야?"
"아닙니다. 저는 공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제가 눈에 띄어서는 안 됩니다."
"······."
휴마누스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쉬쉬한다고 해도, 귀에 들려오는 소문은 어쩔 수 없다.
"전하께서 직접 악마와 공왕을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고, 교단과 제국의 군대가 힘을 모아 무찌르는 것은 차선입니다. 그리고 제가 나서는 건···."
"최악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네, 그렇습니다."
세르펜스가 사뭇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미안."
"네?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부족해서 괜히 너까지 이런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한 것 같아서···."
휴마누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감은 아예 땅속을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 모습에 세르펜스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전하께 어찌할 생각인지 물었던 건, 악마 숭배자들에게 끌려다니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뭔가 계획해 둔 중간 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본론부터 말하기로 방침을 바꿨나 보다.
앞말과 뒷말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한 휴마누스가 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후우···."
"어, 저기, 그게, 미안···."
한숨을 푹푹 내쉬는 세르펜스의 행동에 휴마누스가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사과했다.
그런 휴마누스를 보며 세르펜스는 이마를 짚었다.
"악마 숭배자들이 그런 소문을 퍼트린 건, 저에게 제약을 걸어두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전하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나도 알고 있긴 한데···."
"그리고 전하께서는 저를 두고, 가장 친한 벗이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셨잖습니까."
"윽···!"
휴마누스는 그동안 쌓아왔던 우정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걸, 최근에 막 깨달은 참이다.
느닷없이 양심을 꿰뚫는 세르펜스의 발언에 휴마누스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제가 그러한 뜬소문에 계속 얽히는 이유는 전하께서 부족하신 탓이 아닙니다. 한때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지목되었기에, 전하의 주변인 중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 때문이라는 얘기처럼 들리는데?"
"착각입니다."
"내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을까 봐?"
"······."
세르펜스가 지그시 휴마누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
"내가 네 말을 너무 곡해해서 들었나 보다. 미안해."
휴마누스는 채 5초를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흔들었다.
본인이 눈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는 제가 아니라 전하입니다. 그 사실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으, 응. 명심할게···."
휴마누스가 쭈그러들듯 몸을 움츠렸다.
분명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의 기를 살려주려던 것 같은데, 어쩐지 휴마누스를 쭈구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아까 내게 앞으로 어찌할 거냐고 물었던 거 말인데···."
한계까지 찌그러진 휴마누스가 슬금슬금 어깨를 펴며, 잠깐 뒤로 밀려났던 주제를 끌고 왔다.
화제를 본론으로 돌려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왕과 악마의 처리를 최우선 목적으로 하되, 그것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무언가에 정신이 쏠리면, 다른 문제에는 소홀해지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앞의 피해를 줄이는 일에 급급해하다가는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꾸며내며, 또다시 휴마누스를 까기 시작했다.
휴마누스가 어깨를 도로 움츠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푸로르가 눈을 끔벅거렸다.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흥미진진함이 가득했다.
반면에 리에나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서렸다.
아니마는 에드나의 손을 가지고 장난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 넘어가고. 에드나는 둘이 원래 어떻게 지냈는지 몰랐기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윈스톤은 언제나 그러하듯 배경처럼 앉아있었으며.
유일하게 사태 파악을 끝낸 유지스만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