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회
60. 공작님과 계획 지침 (3)
막사 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일행들의 반응을 살핀 세르펜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리벙벙한 표정을 꾸며내며 주위를 휘둘러보는 체했다.
"···혹시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겁니까?"
세르펜스가 머뭇거리는 척하며, 휴마누스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을 건넸다.
질문하는 목소리가 울먹거리듯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거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다 맞는 말이고, 정말 도움 되는 얘기인걸? 완전 고마워! 덕분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세르펜스가 일부러 저런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어서 저러는 건지.
휴마누스가 허둥지둥 세르펜스를 달랬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럼!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위축됐던 어깨도 어느새 기세등등하게 펴졌다.
반대로 세르펜스의 눈빛은 가라앉았다. 그 눈빛 속에서 '걱정해서 하는 말'을 인정하기 싫다는 기색이 읽혔다.
이것저것 털어놓기 전이었다면 녀석은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을 거다.
어차피 대외 버전이고 연기였으며, 휴마누스를 거짓으로 대하는 건 늘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기서 걱정했다고 말한다면,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또다시 절친 놀이를 시작할까 봐.
세르펜스는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도 좀 그렇지.'
휴마누스가 아니라 대륙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답답한 마음에 충고한 거라고 말하는 건 대외펜스 설정에 어긋난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이런 속담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나 보다.
휴마누스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대외펜스의 설정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세르펜스는 결국.
"···그걸 꼭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새치름한 표정으로 요따위 답변을 내놓았다.
차라리 대놓고 걱정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 뻔했다.
보는 나는 기가 찰 노릇이나, 세르펜스는 본인이 적당히 잘 대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녀석의 표정에서 설핏 뿌듯함이 스쳐 지나갔다.
"미, 미안. 내가 너무 눈치가 없어서···."
휴마누스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했다.
만일 저것이 세르펜스에게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연기하는 거라면, 대단한 고단수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접전의 승자는 휴마누스였다.
"흠, 흠! 어쨌든···. 공왕이 부리는 마물은 병사와 기사들이 능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악마가 강하다고는 하나, 성검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여럿이 힘을 합치면 없앨 수 있습니다. 타지역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공국의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그곳으로 향하셔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괜한 헛기침을 해대며 화제를 돌렸다.
줄줄이 말을 늘어놓는 게, 딴소리 그만하고 본론에나 집중하라고 닦달하는 듯하다.
휴마누스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만약 그게 나를 유인해 내기 위한 악마 숭배자들의 술책이라면 어쩌지?"
"그렇게 늘 의심하고 고민하며,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는 걸 주저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겠지."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휴마누스의 손이 오므려졌다. 불끈 쥔 두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카술라 령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걸 테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혼자가 아니잖습니까. 홀로 고민하지 마시고, 동료분들께 의견을 자주 물어보십시오. 다만, 최종 판단은 직접 내리셔야 합니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말의 앞뒤가 다르지 않아?"
세르펜스의 말을 곰곰이 되뇌던 휴마누스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는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어 해석 능력이 월등하게 떨어져, 이해를 못 한 탓이다.
아무래도 세르펜스어 전문가인 내가 나설 차례인가 보다.
"세르펜스가 늘 의심하라 말했던 건, 휴마누스는 눈치가 없어서 의심스러운 것도 의심스러운 줄 모르니, 그냥 닥치는 대로 의심하는 게 낫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쯤은 얻어걸리겠죠."
"···응?"
"그리고 동료들의 의견을 자주 물어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의심하고 다녀도, 없는 눈치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동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확인받으라는 뜻입니다."
"말을···, 은근히 심하게 하는구나···?"
내 해석에 휴마누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눈치 없다는 걸 깨닫긴 했으나, 세르펜스가 자신을 대놓고 욕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세르펜스가 말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휴마누스가 너무 오랫동안 눈치 없이 굴어서, 쌓인 게 많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휴마누스 탓도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세르펜스가 아니라 시온, 너 말이야."
"제가 뭘요?"
"···너도 쌓인 게 많았나 보네, 미안해."
느닷없이 휴마누스가 내게 사과를 했다.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냥 하던 해석이나 마저 해야겠다.
"아무튼. 직접 결단을 내리고 판단하라는 건, 휴마누스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었습니다. 휴마누스라면 옳은 선택을 할 거다, 뭐 그런 의미죠. 더불어 남들이 하는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휴마누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보랏빛 눈동자에서 감동이 넘실거렸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요번에 나타났던 악마를 세르펜스가 처리했잖아요. 그거 때문에 남들 앞에서 휴마누스가 활약할 기회가 사라진 것 같다며, 세르펜스가 살짝 후회했거든요."
"어···?"
세르펜스를 바라보는 휴마누스의 눈빛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이 뒤섞여 넘쳐흐를 듯하다.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세르펜스가 손날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그래 봐야 날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세르펜스의 시선을 가뿐하게 무시하며, 여유롭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걸 봐서는 자신의 판단도 틀릴 때가 있으니, 생각 없이 따르지 말고 직접 고민하고 움직여라. 그런 의도 또한 담겨있을 겁니다. 애초에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아랫사람도 아닌데, 왜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어요? 자문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생각까지 남에게 맡기지 맙시다."
내 말이 끝나고, 휴마누스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천천히 내 해석을 되새기며 반성하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나와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너희 둘 다 이런 식으로 잘 풀어서 설명할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 꼬아서 말하는 거야?"
"예? 저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말을 어렵게 하는 건 세르펜스 뿐입니다."
"아니, 알아듣기 어려운 건 네 쪽이 더 심했어."
"제가 언제, 뭘 어떻게 말했다고 그러세요?"
"······."
내 막사에서 나눴던 대화는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떨떠름한 표정은 지워낼 수 없었지만, 휴마누스는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세르펜스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분간은 저택에서 칩거할까 합니다."
휴마누스가 구르는 동안 놀겠다는 얘기를, 세르펜스가 있어 보이게끔 말했다.
"그거야말로 악마 숭배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그리할 뿐, 뒤에서 정보를 모으고 몰래 움직일 예정입니다."
빠르게 말을 바꾸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전하께도 전달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대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 완벽한 미소 뒤편으로 피곤함이 얼핏 보였다.
딱 떨어지는 대답도, 이제 그만 대화를 끝내자고 말하는 듯 들렸다.
벽을 세운 것도, 완전히 허문 것도 아닌. 이 묘한 관계가 조금 거북했던 모양이다.
"세르펜스. 나는 네게 의지하고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게 잡는 휴마누스의 언행에 세르펜스가 경계심을 바짝 세웠다.
그 탓에 대답이 조금 늦어졌으나, 표정만은 너그러운 대외펜스 설정을 지켜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의지할까 해."
"네?!"
이어진 휴마누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네게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더 의지할 거야."
이어진 휴마누스의 말에 모두가 황당을 금치 못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휴마누스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료들도 내게 의지할 수 있도록, 굳건해질 거야."
휴마누스가 자신의 동료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면서, 다짐하듯 말했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리에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마는 그러든가 말든가 알아서 하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푸로르는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후 씨익 이를 드러내 웃었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일에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치 없는 휴마누스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신뢰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그러니 세르펜스, 너도 내게 의지해 줬으면 해."
"아, 으음···."
반사적으로 '아닙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정중하게 사양하려던 세르펜스가 황급히 제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지금 네가 보기엔 내가 못 미더울 만도 해. 그래도 믿어줬으면 좋겠어. 모두가 나를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더는 사람들도 이상한 소문에 휩쓸리지 않겠지."
"······."
휴마누스의 의도를 확인하려는 듯. 세르펜스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는 녀석의 행동에, 휴마누스가 바짝 긴장하며 눈을 부릅떴다.
"전하께서는 분명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세르펜스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긍정적인 답변이다.
휴마누스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고마···."
"그런데 전하께서는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휴마누스가 감사를 표하려는 타이밍에 맞춰, 세르펜스가 앞으로의 예정을 질문했다.
우연을 가장한 고의였다.
"내일 낮이 밝으면 출발할까 하는데, 너는?"
"저는 당장 출발할 생각입니다. 자리를 오래 비워, 일이 많이 쌓인 터라 일찍 돌아가 봐야 합니다."
세르펜스에게서 당장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그 의지는 휴마누스에게 당도하지 못했다.
"아직 피곤할 텐데. 쉬다가 내일 같이 출발하는 게 어때?"
"저택에 돌아가서 쉬는 편이 낫습니다."
"쉬기는. 돌아가면 바로 일할 거면서."
"시온이 못 하게 말려서, 최소 반나절 이상은 쉬어야 합니다."
"어, 그, 그래···."
휴마누스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르펜스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세르펜스를 시작으로 나와 유지스, 윈스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에드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무릎 위에 앉은 아니마가 꿈쩍도 하지 않은 탓이다.
"아니마, 언니도 일어나 봐야 하는데···."
에드나의 말에 아니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쩐지 세르펜스가 공국으로 향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다.
그냥 에드나와 세르펜스는 별개라고 생각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앉아 있었던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