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회
61. 공작님과 잠깐의 휴식 (5)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으나, 나는 다시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지금 세르펜스는 자제를 안 하고 있을 뿐이니까.
'자신이 심하게 취한 것 같다고 느껴지면 알아서 술기운을 정화하겠지.'
하지만 남은 걸 전부 따라 주기는 뭣해서, 와인이 반쯤 남아있던 내 잔을 먼저 채웠다. 그리고 나머지를 녀석의 잔에 따랐다.
쪼르륵, 와인이 유리잔을 채우는 소리 사이로 언뜻 세르펜스의 웅얼거림이 들렸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나는 텅 빈 와인병을 거꾸로 세워 탈탈 털며 녀석에게 질문했다.
세르펜스가 취기로 인해, 다소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쟁이···라, 하였다."
꼬부라지는 혀로 제대로 된 발음을 내려 애쓰는 모습을 보아, 정신은 또렷한가 보다.
"제가요?"
"그대의 말으은-, 온통··· 거짓말이다."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야 서누느은 도라···,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잖은가."
세르펜스가 되지도 않는 억지를 쓰며 술주정을 부렸다. 게다가 내 이름 또한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정신이 또렷하다는 말은 전면 취소다. 혀도 풀리고 정신도 풀린 게 확실하다.
"제가 돌아갈 준비를 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오늘 이러언···, 얘기를 한 것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갈수록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발음도 뭉그러졌다. 그로 인해 말끄트머리에 가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녀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대로 전달됐다.
내가 거짓말로 자신을 안심시켜 분리 불안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고 생각한 거다.
그렇게 자신이 안정되고 나면, 떠나려는 것 아니냐고. 세르펜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당찮은 얘기에 '얼씨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혹시, 돌아가는 방법으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 가?"
술기운으로 어눌해진 세르펜스의 발음이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돌아가는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고, 그냥 돌아버리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아닙니다."
"그러엄-, 왜 그랬지이···?"
세르펜스가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었다.
제 딴에는 나를 심문한답시고 저런 자세를 잡은 것 같으나, 그건 녀석의 바람으로 그쳤다.
'한때는 저것과 똑같은 자세로 날 몰아갔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의 세르펜스에게서는 그때와 같은 기백도 뭣도 없었다.
그냥 술기운에 목도 가누지 못하여, 턱을 괸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 탓에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제가 뭘 어쨌다고요?"
"아까, 식사 자리에서도오···. 앞으로는, 다 같이 먹자고. 말했, 잖은가?"
"그게 왜요?"
"선우우···가 사라졌을 때. 내가 빈자리를 느끼지 모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닌가?"
"예에?!"
그걸 그런 식으로 해석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의 별거 아닌 행동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법이라는 걸 간과했다.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세르펜스는 언젠가 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고가 불길한 쪽으로 흘러가는 건, 녀석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무심결에 손이 술이 든 잔으로 향했다.
와인을 두어 모금 마시고 나자, 허했던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르펜스는 제가 오기 전까지, 그 넓은 식탁을 항상 혼자 썼잖아요. 그래서 그 빈자리들을 채워주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여럿이서 왁자지껄하게 식사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 이유도 있고요."
"···정말로, 그 이유뿐인가?"
돌아가는 걸 포기한 거냐고 따질 땐 언제고. 세르펜스가 미심쩍다는 듯, 내게 거듭 질문했다.
역시 그때의 물음은 나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때문이었을 뿐. 지금 하는 말이 본심일 거다.
그러니 거짓말쟁이는 내가 아니라 세르펜스였다.
"굳이 이유가 더 있다면, 에드나 씨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 말고는 공작저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요?"
"음···."
"그런데 에드나 씨까지 함께 식사하게 되면, 일루미나티 멤버 중 윈스톤만 따돌리는 셈이 되고···. 그러다 보니 그냥 다 같이 먹자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내가 말을 마치고 난 후로, 세르펜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와 눈을 맞췄다. 녀석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며, 내 말을 곱씹고 생각을 정리했다.
술에 취해도 남의 말을 분석하는 저 버릇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내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긴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불안해하셔도 됩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의 감긴 눈이 도로 뜨였다.
나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잡히지 않고 흐릿했다.
"서누우···를 보고 있으며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내게도, 이럴 수 있는 거겠지이···."
내게 많은 애정을 쏟아 준,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도 정말 괜찮은 거냐는 물음이다.
"저는 어른이잖아요. 이제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도 아니고. 독립해서 먼 나라로 이민 온 셈 치죠, 뭐."
"어른이 되면···, 소중한 이와 떨어져도-. 괜찮아지는 건가? 괜찮아야 하는 건가?"
세르펜스의 입에서 비슷한 듯 다른 질문이 연달아 나왔다.
어느 쪽도 '그렇다.'라고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르을 만나기 전의 나와···. 무엇이, 다른가? 선우으는···, 그렇게 될 생각, 인가?"
술에 취한 주제에 말은 왜 이렇게도 논리적인지. 정말로 취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갈수록, 두려워지는 거지? 내가 성장해 간다면···. 어른이 되고 있다면···. 이럴 수는 없잖은가···!"
세르펜스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그 모습이 깊은 고뇌에 빠진 철학자 같다.
녀석이 모순에 빠지게 된 원인은 내가 그에게 잘못된 명제를 넘겨준 탓이다.
나는 내 잘못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래요, 세르펜스의 말이 맞아요. 어른이라고 해서 괜찮을 수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죠.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내가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 오히려 세르펜스의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다.
"하지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이곳에 남겠다는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아마 가족들도 제 뜻을 지지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다들 선우르을, 그리워하고. 곁에 있길 바랄 거다."
녀석이 말한 '다들'이라는 단어에는 세르펜스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이 메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더니, 어째 입안이 쓰다.
제온에게 와인을 부탁할 때, 분명 당도가 높은 거로 가져다 달라 했었는데. 나중에 따져야겠다.
"세르펜스야말로 누구보다도 절 필요로 하면서, 보내주려고 하잖아요."
"지금은 이렇···게. 붙잡고 있잖은가."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주제에?"
내 말에 세르펜스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제 딴에는 이게 붙잡는다고 붙잡은 거였나 보다. 고작 이 정도가 녀석이 부릴 수 있는 욕심의 한계였나 보다.
녀석이 평소에 감정을 절제하고, 티 내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을지. 상상하면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그냥, 솔직하게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괜찮습니다. 원래 애들은···. 아니, 애들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에 욕심을 부리고 떼도 쓰고 하는 법입니다. 매번 그러면 피곤하겠지만, 세르펜스는 너무 많이 포기해 왔잖아요. 이제는 바라는 걸 원해도 됩니다."
세르펜스는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니 포기하겠다.'가 아닌, '돌아갈 수 있어도 안 가겠다.'라는 확언을 원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르펜스는 경계하고 부정했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면 자기도 마음 편하고 좋을 텐데···.'
하기야 세르펜스가 약삭빠르게 자신의 이득을 챙길 줄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녀석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이런 녀석이니까 더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는 거다.
참 얄궂은 일이다.
"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다.
녀석은 뒷말을 잇는 대신 입을 앙다물고,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내 잔에 내 모습이 비친 것처럼. 녀석의 잔에는 녀석의 모습이 비칠 거다.
"내게 함께 하는 사람이, 많아져도···. 선우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선우, 당신뿐이다. 그걸 잊지 말아 다오···."
세르펜스가 마디마디 꾹꾹 눌러 담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붉은 액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잔에 남은 와인을 꿀꺽꿀꺽 마셔 잔을 비워 버렸다.
그러고는 쿵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고개를 박으며 쓰러졌다.
결국 세르펜스는 내가 남아있길 바란다거나, 가지 말라거나.
그 한마디를 꺼내지 못했다.
"어휴···."
탁자 위로 흘러내린 탐스러운 청은 빛 머리칼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내 잔에 남은 와인을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르펜스에게 다가가, 녀석의 팔을 잡아서 내 어깨에 걸치고 일으켜 세웠다. 한 팔로 세르펜스의 허리를 감아, 내게 기대게 했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하지만 나는 한 발짝 걸음을 떼자마자 후회했다.
'검술 훈련한답시고 운동도 많이 했으니까, 당연히 옮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원래의 내 육체는 술을 전혀 못 마셔서, 술자리에서 항상 탄산음료만 마셨다. 따라서 끝까지 맨정신을 유지했다.
인사불성으로 취한 친구 녀석을 집까지 바래다준 전적도 꽤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침대까지 세르펜스를 옮기는 것쯤은 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었다.
앉아있었을 땐 잘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어질어질을 넘어 아찔아찔하다.
내 한 몸 가누기도 힘들다.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근육질인 세르펜스의 무게는 상당했다.
그렇다고 녀석을 다시 의자에 앉히는 일 또한 요원했다.
'침대까지만 가자, 침대까지만···.'
녀석을 내 침대에 눕혀 놓고, 탁자와 의자는 대충 밀어서 구석으로 치워버리자.
그리고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녀석의 침대를 꺼내, 내가 거기서 자면 된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다.
- 쿠당탕!
정정하겠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기 전까지는.
술에 취한 탓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음에도 아픔이 무디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은 와인은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다. 뭐가 아깝다고 꾸역꾸역 마셨는지 모르겠다.
'아,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침대가 있는데···! 잠깐만. 난 분명 넘어졌는데, 어째서 여긴 침대가 아니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다.
'잠깐만 쉬었다가···, 술 좀 깨고 나면 일어나야겠다.'
참 좋은 생각이다.
훌륭한 의견을 낸 나 자신에게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술에서 깬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었다.